134화
<7권>
“그 가시나가 오십억을 준다는데 어뜨켜! 우리가 돈이 있어 뭐가 있어! 에휴...!”
그리고 대문 밖에서 구경하던 마을 노인들은 저마다 안타까운 얼굴로 뒷짐을 지며 혀를 찼다. 시골이라 다 한 건너 아는 사이다보니 그 집 사정을 모를리 없었다.
“저 집도 참 안됐구먼 그랴.”
이윽고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할아버지를 연행해 승용차에 태웠다.
차는 곧 출발했고, 남은 사내들도 줄지어 선 승용차에 차례차례 탑승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 남자.
그는 차에 탑승하기 전 먼 바다를 바라봤다.
굳게 다문 입매는 우직하고 흔들림 없는 그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의 정체는 대테러진압부대 909특임대 소속 송은혁 대위.
송은혁은 고아로 자라, 일곱살에 태권도를 배우며 열일곱의 나이에 특전사에 지원했다. 그 이후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 2006년 레바논 내전에도 참가하며 탁월한 경력을 쌓았으며, 그가 수라에서 데바로 각성한 2008년에는 909특임대에 발탁되었다.
그는 인상이 부드럽거나 자상해보이지 않는, 강인한 골격에 날카로운 수리와 같은 눈매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유. 안타슈?”
목소리가 들리는 차안으로 송은혁은 시선을 돌렸다.
승용차 뒷자석에 먼저 타고 있던 거한.
덩치도 우람하고 키도 어찌나 큰지, 머리가 자동차 천장에 닿는 바람에 고개를 약간 수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문상석이라는 괴력의 사나이다.
송은혁과 마찬가지로 909특임대에 소속이며 계급은 중위였다.
“날씨도 쌀쌀한데 이러다 감기걸리겄슈. 가면서 해줄 말도 있응게 어여 타슈.”
“......”
송은혁이 묵묵히 차에 탑승하자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두 사람은 신우주 납치사건 해결을 위해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참고로 909특임대는 수라와 데바 관련 사건을 전담으로 맡는 국내 최고의 특수부대였으며 개개인의 얼굴이 2급 기밀일 정도로 철저히 베일에 감춰진 조직이었다.
“강미라의 범행이 우발적이라기보단 계획적인것 같다는구먼유. 지 계좌에서 지난 6월부터 10월초까지 수차례에 걸쳐 총 150억원 가량을 현금으로 빼갔다네유. 그 중 50억원은 평소 접선하던 어부 할아버지한테 신우주가 납치당하는 날 새벽에 줬고, 나머지 100억은 사용처를 더 캐봐야한다네유. 방금 검찰한테서 이렇게 연락이 왔슈.”
문상석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가방속에 있던 과자 한 봉지를 뜯더니 한주먹 움켜쥐고 입안 가득 쑤셔 넣었다.
“아움, 바삭하구먼.”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입술에 묻고 정장 위로도 떨어졌다.
그는 다시 과자를 한움큼 집어 옆으로 내밀었다.
“좀 줄까유?”
차창밖을 보던 송은혁이 무심코 옆을 돌아봤다. 문상석의 몰골을 보고는 이내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먹는다.”
“허참. 배도 부르시구먼유. 선심썼는데 안먹고 나 삐지겄슈.”
송은혁은 그의 투덜거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을 돌렸다.
“부대로 가야하나? 대령님에게서 연락은?”
“아직 안왔슈. 아까 보고 드리자마자 장군님 뵈러 가신것 같아유. 이제 어딨는지도 알았겄다 곧 작전이 시작되겠쥬. 강미라 그뇬은 이제 뒈진겨.”
송은혁이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송은혁 대위다.”
-명령이 떨어졌습니까?
“아니, 아직이다. 하지만 오늘 내로 출동걸릴것 같으니까, 모두에게 장비 손질해놓고 항시 대기하라고 일러둬. 오늘 퇴근은 없다.”
-옛,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부대로 복귀하시는 겁니까?
“군산 합동작전 지휘소에 들려 제네틱스 기무팀과 신라그룹 화랑팀 관계자들을 만나볼 계획이다. 명령이 떨어지면 신속히 복귀할테니 그리 알도록.”
-네, 그리고 혹시나... 짬나시거든, 김수희랑 박현아 사인 좀 받아다 주십시오. 정 안되면 유하나나 한성일도 괜찮...
뚝.
송은혁은 무시하며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안주머니에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어리석군. 군인의 우상은 이순신 장군님이면 족하다. 연예인들을 빨아서야 나라가 지켜지겠는가.”
“대위님, 그건 그거고 이거 진짜 맛있는데 같이 안먹을테유?”
문상석이 과자를 한움큼 쥐고 다시 내밀었다.
송은혁은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크고 우락부락한 손에 과자를 쥐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다섯개의 손톱에 낀 때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됐다, 배부르다.”
***
조그만한 섬은 아름다웠다.
해변은 화이트비치로 부드러운 모래밭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시야 한가득 펼쳐졌다.
우주는 오랜만에 청량한 바람을 쐬니 머리가 상쾌해지는것 같았다. 두 손은 비록 수갑에 묶여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옆에는 평온한 표정의 미라가 있었다.
10월말 바닷바람은 아주 쌀쌀하고 강해서, 가져온 옷가지 하나 없는 두 사람은 해변에 오래 머무르기가 힘들었다.
이내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장작불로 바닷물을 데우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두 사람이 헤엄쳐도 공간이 남을만큼 커다란 욕조는 미라가 사전에 공수해온 것이었다. 8월달에 미리 가져다 놓았단다. 아울러 섬에 단 하나뿐인 이 오두막도 그녀 혼자서 책을 봐가며 지은것이었다.
욕조안에서 한차례 뜨거운 섹스를 하고, 후에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즐겁게 샤워를 끝마쳤다.
즐겁게. 우주의 입가에는 언제부턴가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섬에서의 생활 패턴은 매일이 똑같아서 그도 이젠 나름 적응해가는 것 같았다.
이후 점심으로 구운 조개 구이를 먹고, 방으로 가서 우주의 레지스트 쉴드 활약상을 담은 '신우주 2010 in 레지스트 쉴드 스페셜' 블루레이버젼을 노트북으로 감상했다.
우주는 자신의 모습을 영상으로 본다는게 멋쩍었으나 미라는 상당히 흥분해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염원하던 상대가 곁에 있다는게 믿겨지지 않는다는듯 영상을 보는 내내 그를 부둥켜 끌어안고 있더니 이윽고 못참겠다는 듯이 키스를 해왔다.
그동안 계속 거부만 해오던 우주가 이번에는 거절을 하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미라는 기뻤다.
드디어 우주가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더는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주는 이제 별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올때까지 그녀와 잘지내보자고 다짐했을뿐이다.
거의 무감각하다 싶을 정도로 이런 생활에 적응이 되어버린 그다. 어차피 이 섬에서 탈출이란 불가능하다. 육지까지 헤엄치다 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었다.
문득 그럴바엔 누릴건 누리고 즐길건 즐기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미라가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으로 그는 저항을 그만두었다.
해가 저편으로 질 무렵, 미라는 혼자 숲으로 들어가 짐승을 사냥해왔다. 평소 생선을 주로 먹었지만 오늘은 닭고기였다. 닭 역시 미라가 새 밖에 없는 섬에 미리 풀어놓은 것이었고, 그 숫자는 스무마리 정도였다.
자정.
보름달은 밝았다.
아늑하고 좁은 방안은 젊은 남녀의 체온으로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침대 옆으로는 커다란 거울이 있어 두 사랑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미라는 정신없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연신 강하게 고추를 박아대는 우주 때문에 그녀는 마치 낙원에 온것만 같았다.
***
매서운 추위가 불어닥치는 늦은 가을밤.
소리 없는 새벽, 이름 없는 무인도.
우주와 미라가 있는 무인도 앞바다에는 수십척의 군함이 봄날의 흩날리는 벚꽃처럼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거센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는 '제네틱스', '신라그룹', '909특임대' 등을 상징하는 각종 문양의 깃발이 바닷바람을 헤치고 힘차게 질주해 나아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