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141화 (141/285)

141화

대낮 저잣거리는 장사치들과 구경하는 행인들로 가득차있었으며 마츠다이라가 행차할땐 바닷길이 열리듯 저마다 고개를 숙이며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는 한편 우주의 급한 걸음은 인파에 밀려 답답하기만 하였다.

모두가 허리를 굽히며 경의를 표하는데 저만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느릿느릿, 상당한 거리를 두고 뒤를 밟던 와중에 문득 허가네 하인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는 쫓아오며 부르는 소리가 났으나 우주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윽고 마츠다이라 무리가 저잣거리를 빠져 나가자 또다시 소란스럽고 북적거리기 시작하였다.

우주는 앞길을 가로막는 행인들을 이리저리 밀치며 초조한 표정으로 발길을 재촉하느라 바빴다.

“아, 누구야! 누가 날 밀었어! 이리 나와!”

행인 하나가 성이 난듯 싶었지만, 우주는 모르는척 하고 얼른 지나갔다.

그러나 시장통을 벗어나려는 찰나에 누군가 갑자기 그의 뒷목깃을 꽉 움켜잡았다.

“이 호구새끼야! 이 성님이 부르는거 못들었어?”

우주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뒤돌아보자 허가네 하인이었다.

순간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화가 울컥하고 치밀어오는 것이 품속에 있는 칼로 냅다 찌르고 싶을 정도였다. 험악해지려는 표정을 애써 참고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이, 형님아. 나 빨리 가봐야 할데가 있는디.”

“니가 갈때가 어디있어 이 호구시키야! 시킨 일은 안하고 놀러 나온거 아니여?”

“아니야. 그러니까 언넝 이거놔.”

“놓긴 뭘 놔? 잔말 말고 따라와! 누가 농땡이 치래 이눔시키!”

순순히 놔줄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고 손을 들어 그의 뒷쪽을 가리켰다.

“형님아. 저기봐라 저기. 우리 아씨보다 예쁜 계집애 지나간다.”

“정말여? 어, 어디?”

그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 순간, 우주가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한대 후려 갈겼다.

딱!

“아얏!”

하인이 반사적으로 제 머리를 감쌌다.

“그걸 속냐 붕신아. 에헤헤.”

우주는 혀를 빼죽 내밀더니 몸을 돌려 냅다 달아났다.

그리고 결국, 마츠다이라는 온데간데 없었다. 시장통을 벗어나자마자 말을 박차고 서둘러 떠난 것 같았다.

“젠장할...!”

그 후로 두 시간 정도 주변을 배회하다가 끝내 허씨 가로 돌아왔다.

대문 앞에는 아까 뒤통수를 처맞았던 하인이 싸리비를 들고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그는 무척 열이 받았는지 귀까지 붉게 물들어서는 마치 청룡언월도를 든 관우처럼 위풍당당해 보였다.

“너 이 빌어먹을 호구 새끼! 이리와 엎드려 뻗쳐!”

우주를 처죽이겠다며 빗자루를 들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우주는 기분도 잡친 마당에 잘됐다며 그를 약올리면서 이리저리 마당을 뛰어다녔다.

“에헤헤, 잡아봐라 이 똥꾸새끼야. 에헤헤!”

“너너! 너 이 썩을놈! 잡히면 가만안나둬! 으윽, 뒷골이야!”

하인은 뒷목을 부여잡고 싸리비를 휘두르며 그를 죽도록 쫓아다녔다.

두 사람을 구경하던 남자 하인과 하녀들은 배꼽을 움켜잡고 낄낄, 까르르 거리며 웃기에 바빴다.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도망만치던 우주는 점점 신이 났다. 누군가를 괴롭히자 꽉 막혔던 속이 확 풀리고 마츠다이라를 보자 발끈했던 이성도 차츰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 더 장난치고 싶어졌다.

그는 돌연 구경하던 계집종들한테 달려들었다.

“이히히! 갓난이 속곳 좀 보자!”

“어머머! 뭐, 뭐하는 거니! 꺄앗!”

우주가 갓난이의 치마를 훌러덩 들춰올렸다. 갓난이의 맨다리와 속옷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동시에 남자 하인들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지며 모두 갓난이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우주는 멈추지 않았다.

“향단이! 꽃님이! 송이! 방산댁! 이씨 아주매!”

우주는 킥킥대며 하녀들의 치마를 차례차례 까뒤집었다.

짐승보다 빠른 그 앞에서 꺅꺅 소리치며 도망쳐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잘여문 엉덩이만 적나라하게 까발려질 뿐이었다.

“매양이는 내꺼니까 넘어가고! 비실이! 풍산댁! 그리고, 어...?”

우주는 바닥에 닿을랑말랑하는 치마 끝자락을 두 손으로 쥔 채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치마가 알록달록하고 화사해보이는 것이 잡것들이나 입는 그런 치마가 아니었다.

우주는 이내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소, 소윤이...”

외출을 나갔던 소윤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연신 눈을 깜빡거리다 얼른 손을 털어내며 뻘쭘하게 섰다.

덩달아 그를 쥐어팰듯이 뒤쫓아오던 하인도 후다닥 싸리비를 등뒤로 숨기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하인들은 죄다 소윤의 눈치를 보며 사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씨의 치맛자락을 붙잡다니 네놈이 드디어 완전히 미쳤구나!”

소윤을 호위하던 무사 하나가 우주를 발로 걷어찼다.

“웃!”

우주는 발라당 뒤로 나자빠졌다.

“어디 천한 노비 새끼가 감히 귀하디 귀한 양반가 따님의 옷자락을 붙잡을 수가 있느냐!”

“그만하세요.”

소윤이 나서서 무사를 제지했다.

“더는 소란을 원치않습니다.”

“예? 아가씨 하지만...”

“괜찮으니 들어가세요.”

무사는 고개를 숙인 뒤 소윤의 뒤로 가서 제자리에 섰다.

소윤은 무표정으로 땅바닥에 주저앉은 우주를 내려다 보았다.

그 눈빛은 어째서인지 기분이 무척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우주 때문이 아닌 어떤 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여인의 치마를 들추는건 못배운 불량배들이나 하는 짓거리입니다. 진정한 사내라면 절대 해서는 아니되는 일이니 앞으로 꼭 명심하세요.”

소윤이 조용히 타이르자 우주는 대답을 조금 주저하다가 이내 덜떨어진 웃음을 지었다.

“싫어. 재밌는데 안하면 어쩌라구. 에헤헤.”

바보 연기는 계속 유지되어야만 했다. 신분을 가려서는 안된다.

“아니, 저런 발칙한놈을 보았나!”

우주의 대답에 무사들이 발끈 성을냈다.

이에 매양이가 황급히 나서며 소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아씨! 용서해주시옵소서! 칠복이가 멍청해서 아씨께 무례를 범했습니다요! 제가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을테니 한번만 용서해주시라요!”

소윤은 땅만 쳐다보는 매양이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묵묵히 바라보다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숨죽이며 눈치보던 하인들에게 말했다.

“한양으로 떠날 준비를 속히 서두르거라.”

그 한마디만 남겨놓고 소윤은 안으로 들어갔다.

마츠다이라가 왔다간 이후로 허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것만은 분명했다.

우주는 묵묵히 일만 하는 척 하며 그러한 낌새를 눈여겨 보았다.

‘허소윤은 왜 갑자기 한양을 가고자 하는 것인가?’

허씨 집안은 한양으로 떠날 준비를 하느라 부산스러웠고, 소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주는 가마꾼으로 뽑혔다. 비록 멍청하다지만 힘이 워낙에 천하장사라서 뽑히고 말았다.

가마꾼 차림을 하고, 선배 노비들에게 열심히 배우며(양반이 탑승시 너무 흔들리거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편안하도록) 한창 가마 연습을 하고 있던 차에 매양이가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이거 주먹밥이다. 배고플때 먹도록혀라. 다른 사람들한테 빼앗기지 말고 너만 먹도록혀. 어디 안보이는데다가 꼭꼭 숨겨놓고 가그라.”

“매양이 너... 나 호구인디... 왜 이리 잘해주는거니?”

“시끄러 이눔아. 니가 아무리 호구라도 이제 난 니 밖에 엄다. 내도 내 몸 간수 잘하고 있을테니 니도 헛짓 할 생각일랑 말고 조용히 잘갔다 와야헌다. 한양 계집이 남자 알기를 호구로 안다던디, 괜히 그런 년한테 빠져서 바람폈다간 그날부로 니 죽고 내 죽는 기라.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댕겨온나. 알았나?”

“고, 고마워.”

우주는 매양이의 마음 씀씀이에 살짝 감동 받았다.

해가 질 기미가 보일 무렵 소윤은 한양으로 떠났다.

우주를 포함한 남자 하인 6명과 호위 무사 3명, 하녀 1명, 그들을 통솔할 청지기 1명을 데리고 가는 비교적 초라한 행렬이었다. 부랴부랴 준비한 티가 났다. 예정되어 있었다기 보다는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긴 것이다. 누군가를 잠깐 만나기 위한 외출처럼 말이다.

그렇게 우주가 떠난 뒤,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며 홀로 외로움을 삭히던 매양이에게 중년의 하녀가 다가왔다.

“이번에 칠복이 돌아오면 반드시 시집가거라잉. 내가 마님께 말씀드려서 혼례를 치르게 해줄테니 걱정말고. 밤일도 치뤘겠다 뭐가 문제겄어. 안그려?”

“물론이요. 나도 얼른 시집가고 싶소. 매일 칠복이만 생각하면 절로 신이 나서 춤을 춘다니께.”

매양이는 한껏 들떠 있었다. 나만 생각해주는 신랑이 생긴다는 기쁨에 몸둘바를 몰랐다.

우주를 얼른 잡아먹으라고 충고 해준 중년의 하녀에게 고맙다며 수라상이라도 차려줄 기세였다.

하지만 늘상 그렇듯, 인생은 항상 어렵고 매정하다.

당연하듯이 오는 불행이 싫고 인정머리 없는 인생에 화가 날정도로 말이다.

***

우주가 마을을 빠져나갈 즈음,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인 다섯이 말을 타고 합류했다.

총칼로 무장한 그들은 소윤이 탄 가마를 호위하며 함께 길을 나섰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며 가마꾼 우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대체 뭐지...? 왜놈들이 대체 무슨 연유로 허소윤을 호위하는 것일까?’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그는 왠지 이 길을 쭈욱 따라가다보면 마츠다이라를 만날 수 있을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까닭에 얌전히 있으며 가마만 열심히 들었다.

가마 뒤에 두 사람이 붙들고 있으면 우주는 앞에서 혼자 가마를 들고 있었다.

그는 헐떡이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렇게 마을을 떠난지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돌연 허공에서 왠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들! 죽고 싶지 않거든 당장 멈춰서거라!”

도중에 이게 어찌된 일인가.

산길을 뛰어가던 가마는 갑자기 산적떼를 만났다.

수풀과 나무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산적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일본군인을 비롯해 호위무사까지 단칼에 목을 자르며 청지기와 하인들만 남겨놓았다.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가마 앞에 서서 우렁차게 소리쳤다.

“안에 있는 계집은 썩 나와보거라! 얼마나 반반한 계집인지 얼굴 한번 보자꾸나!”

가마 안.

산적 두목의 목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윤은 두렵고 무서운 까닭에 가마 안에서 나올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순간, 뜬금없이 윽, 엑! 악! 커억! 헉! 껙! 하는 비명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곧이어 가마 문이 열리고 사내 하나가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꺄악! 사, 살려주십시오!”

“산적들은 다 죽었으니 진정하고 눈을뜨시오.”

“예?”

“괜찮으시오?”

소윤은 그자를 보고 크게 놀랐다.

가마를 들여다보는 이는 다름 아닌 우주였다.

소윤은 요동치는 가슴을 손으로 진정시키며 간신히 대꾸했다.

“도,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옵니까?”

그때 살아남은 하녀가 우주를 밀치고 고개를 쑥 내밀었다.

“아씨! 걱정마십시오! 산적은 다 죽었습니다!”

현장을 직접 목격한 하인들이 가마 밖으로 나온 소윤에게 상황을 설명하였다.

일본군인과 호위무사가 전부 목숨을 잃자, 우주가 갑자기 나섰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서서, 눈 깜짝할 사이에 번개 같은 솜씨로 수십명의 산적떼들을 순식간에 때려눕혔단다. 그 실력은 너무도 고수같아서 저놈이 진정 호구인지 달인인지 두 눈을 의심케 할 정도였다고.

“그것이 정말이냐?”

“예, 그렇사옵니다.”

소윤은 깜짝 놀랐다.

호구라 불리던 그가, 정말로 그런 놀라운 실력을 갖고 있다고?

***

소윤에겐 집안의 존망여부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약속이 있어, 수난에도 불구하고 계속 한양으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가마를 이끌던 행렬이 잠시 개울가에 들려 쉬고 있을때였다.

우주는 홀로 차가운 개울가에 발을 담그며 료코를 어찌 죽여야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서 불현듯 작고 하얀손이 귤을 내밀었다.

우주는 흘끗 귤을 쳐다보았다.

그것을 집더니 껍질도 벗기지 않은채 그대로 입속에 던져넣었다.

우물우물 씹으며 덜떨어지게 말했다.

“으음, 맛있다. 이건 사과인가?”

소윤은 그의 뒤에서 그가 돌아봐주길 한참 기다렸으나 우주는 그저 귤만 먹고나서 계속 개울물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소윤이 먼저 안달나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바보처럼 보이고 싶어서.”

“틀렸어. 난 바보가 아니라 호구야.”

우주는 괜스레 말 섞기 싫어서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는 매양이도, 허소윤도, 허씨 일가에 관련된 모든 것이 자신과 상관없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허씨 일가는 그저 재기를 위한 도구 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한양까지만 잘 데려다 주면 되지 뭘. 나한테 말걸어서 어쩌겠다고? 할말 없으니 저리가.”

소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왜 벽을 쌓고 있는거에요?”

정곡을 찌른것 같다.

우주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윤의 눈동자는 실로 초롱초롱 빛이 나고 아름다웠다.

그녀가 분홍빛 입술을 열며 덧붙였다.

“일부러 호구행세하는거 다 알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