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
매양이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은 소윤이 한양에서 돌아왔을때부터였다.
함께 떠났던 노비들 가운데 우주만 유독 보이질 않았다.
그것을 의아하게 여긴 매양이가 소윤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씨, 칠복이는요?”
“칠복이는 사정이 있어 이 집을 떠났다. 이제 볼 수가 없을 게야.”
“떠났다구요? 그, 그럴 리가!”
매양이는 적잖이 서운하고 많이 당황했다. 이런 식으로 훌쩍 떠나 버린 그가 야속하기도 했다.
한양에서 가져온 짐을 안채로 옮기던 노비들에게 철썩 달라붙어 우주가 어디 갔는지 울먹이며 캐물었다. 그러나 소윤이 이미 어느 누구도 발설하지 말라고 엄하게 주의를 해둔 상태였다. 매양이는 그저 우주가 무작정 떠났다는 이야기 밖에 듣질 못하였다.
비록 짧은 인연이었으나 매양이는 충격이 컸고, 오랫동안 괴로워하며 밥도 제대로 입에 담지 못하였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지냈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고, 모습도 초췌해져만 갔다.
그러던 와중에 소윤이 한양을 다녀온 이후로 집을 자주 비운다는 것을 문득 깨달은 것은 석달을 넘겨 이듬해 봄이 올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주로 당일치기로 외출을 하더니 날이 갈수록 다음날 아침에 귀가를 하는 것이다. 양반집 규수로써 자주 외박을 한다는 것은 보통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가마꾼을 붙잡고 물어보니 상록사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올린단다. 하지만 그녀는 전에 없던 일이라서 무언가 수상해 보였다. 여자의 감은 무섭다고 허소윤의 옷에서 사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익숙한 사내의 냄새.
그래서 날을 잡아 소윤을 몰래 미행했다.
한밤중에 홀로 산에 올라 도착한 곳은 상록사였다. 오는 동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가시에 긁혀 옷이 찢기고, 행여나 맹수라도 만날까 덜컥 겁이나고 두려웠던 매양이지만 그보다 더욱 무서웠던 것은 그녀가 믿기 싫은 일이 현실이 되는 것이었다.
숨죽이며 절안으로 들어왔다. 매양이의 발길은 전향각(사찰을 방문한 손님의 숙소)으로 향했다.
불켜진 방문 앞에는 신발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색깔이 고운 꽃고무신이요 다른 하나는 미투리(삼으로 짚신처럼 만든 신발)였다.
둘 다 매양이의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여, 역시나......!”
그녀는 밀려오는 절망감에 두 다리가 움직여지질 않았다. 분한 까닭에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머릿속은 휭휭 돌며 어지러웠다.
방안에서는 젊은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쉴새없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우주와 소윤의 낯 뜨거운 정사가 끝난 뒤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내내 엿듣고 있던 매양이는 우연히 그가 애국 청년이자 도망자 신우주란 사실을 알아냈다.
순간 그녀의 몸속에서 타올랐던 격렬한 분노가 마침내 출구를 찾은듯 아우성쳤다.
매양이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불현듯 떠오른 복수의 방법.
철썩같이 믿었던 그의 배신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산을 내려가 그 길로 관가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남자를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건 칠복이 니가 자초한 일이다! 날 절대 원망하지마러! 다 니탓이니께!”
***
방안에서 점점 시들어가던 촛불이 다시 타올랐다.
우주가 불을 밝힌 후 뒤돌아보니 자신과 소윤 사이에 왠 고급 상자 하나가 떡하니 내밀어져 있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허낭자, 이건 뭐요?”
양반다리를 한 우주의 앞에 어느새 한복 차림으로 다소곳이 앉아있던 소윤이 차분하게 말했다.
“필요한 곳에 써주시지요.”
기름칠된 나무에 화려한 금속장식이 달려 있는 상자였다.
곧바로 뚜껑을 열자 우주가 놀라며 탄성을 자아냈다.
“아니 이 비싼걸!”
각종 귀금속과 보석으로된 장신구가 상자 안에 한가득 채워져있었다.
놀란 우주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이런건 됐소. 이렇게까지 안해도 된다오.”
“아닙니다. 꼭 받아주시지요.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부디 요긴하게 써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받기에 이건 너무 크다오. 낭자의 집안도 생각해야되지 않겠소.”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령. 집안의 소중한 것을 드리는게 아니옵니다. 제가 그동안 켄신상에게서 받은 선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소윤의 말에 우주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켄신이란 자는 지난번 중년의 일본 남성이었다.
그에게서 받았다는 말을 듣자 부담감이 덜어졌다.
“고맙소. 그렇다면 잘 받아가리다.”
이로써 우주는 일본에 저항하는 단체를 운영하기 위한 자금을 얻었다.
반면에 한층더 그녀가 걱정되었다. 그의 얼굴에 이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정말로 3월에 일본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오?”
소윤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 제 운명을 탓할 생각은 없사옵니다. 그러나 굴복할 생각도 없사옵니다. 지금 제 자신은 비록 팔려가는 처지이오나 일본에 가서도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세상 어느곳에 있더라도 내 나라를 위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분명 최선을 다할것이니 안심하여 주십시오.”
“난 보내고 싶지 않소만.”
“그러시면 안되옵니다. 저 또한 도령님께 깊은 정이 들었으나 그 원대한 포부에 짐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도령께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시는 것처럼 저도 제 나름의 방법으로 조국에 보탬이 되고 싶사옵니다. 그리고 그럴러면 우리의 만남은 바람보다 자유로운 혼이 있어야 되겠지요. 이 시대에 걸맞지 않는 저라고 생각되지만 보호만 받는 연약한 여자는 되기 싫사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우주가 생각하기에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여느 사내대장부 못지않았다.
사실 그랬다.
일정한 거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자 같은 삶을 사는 그로서는 한 여자를 책임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와의 아이? 아이를 낳겠다는 것은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다. 쫓기는 인생을 사는 그에게 어딘가에 안착한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때 우주가 하나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소윤은 얼핏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뱃속에 그의 아이가 태동하고 있다는 것을!
좌우지간 우주는 그녀를 꼭 방해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녀가 절대 켄신을 만날 수 없도록 붙잡아둘 생각이었다.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같은 그녀를 어떻게든 책임지고 싶다며, 다가오는 춘삼월에 절대 한양에는 못가게 할 작정이었다.
그런 속마음을 감추던 때였다.
운명은 얄궂은 미소를 그에게 던졌다.
사랑에 빠진 새가 지적이듯 밤새도록 달콤한 말을 서로의 귓가에 속삭이던 두 사람은 날이 밝자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어야만 했다.
소윤은 아침 일찍 집으로 떠났다.
그날도 우주는 열심히 검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정오.
일본군과 섞인 관군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주지스님인 수경의 목에 총칼을 들이밀며 우주를 내놓으라 엄포를 놓았다.
선봉장은 쿠로가네 료코였다.
“오냐, 잘됐구나!”
우주는 폭풍처럼 나타나며 수십명에 이르는 병사들을 일순간 때려눕혔다.
이어서 그토록 바라던 료코와 검대결을 벌였다.
그동안 갈고 닦은 솜씨를 마음껏 부렸다.
“(실력이 전보다 많이 늘었구나, 신진루이!)”
“(닥쳐라 이년아! 오늘이 네년 제삿날인줄 알거라!)”
“(크윽, 이놈이!)”
료코가 분한듯 이를 갈았다.
도대체 이놈이 어디서 칼을 배운것인가!
칼질 하나하나가 명쾌하기 짝이 없었다.
주변에서 두 사람의 싸움을 가만히 지켜보던 수경스님은 그저 흐뭇한 눈빛으로 닳고 해진 쇠좆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주를 향해 나직히 말했다.
“니놈이 결국 해낼줄 알았다.”
이윽고 료코는 칼날이 파고드는 쓴맛을 난생처음 생생하게 느껴야만 했다.
우주의 칼끝이 마침내 그녀의 어깨를 관통했다.
“크윽!”
그녀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기회를 틈타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료코는 늦겨울이 만들어낸 앙상한 숲에서 한없이 달아났다.
사라진 그녀의 목소리가 숲속에 메아리쳤다.
“(어줍잖은 실력으로 오늘 이겼다고 좋아하지 말거라! 나와 악연을 맺은 이상 네놈은 평생 두 다리 뻗고 잘 수 없을 것이야! 하물며 가족이나 친구를 만들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거라! 처가 생기면 찾아가 죽여버릴것이고 애새끼가 있다면 산짐승의 먹이로 내던져 주겠다! 네 친구 역시 그 가족과 일가친척까지 싸그리 몰살시켜주지! 명심하거라! 너와 관련된 모든이들을 끝까지 추적해 네놈의 대와 인맥을 완전히 끊어버릴 것이며 우연히 내 칼을 피해 달아났다하더라도 평생 혈혈단신으로 외로이 지내야 할것이니라!)”
한이 서린 료코의 목소리는 대단히 날카로웠다.
“저 빌어먹을 년이...!”
우주는 료코를 놓쳤다는 것이 크게 아쉬웠고, 아울러 조금 오싹함을 느끼면서 급히 절로 뛰어갔다.
절안으로 돌아와 일본군의 시체를 밟아다니며 급히 수경스님을 찾았다.
이윽고 대웅전 앞에 있던 수경스님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무슨 일인지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당장 하산하거라! 허가네가 위험하다!”
수경스님이 그나마 숨이 붙어있던 일본 병사에게서 알아낸 바로는 료코가 상록사를 습격하는 동안 마츠다이라는 허씨 가를 찾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제기랄!”
우주는 황급히 말에 오르며 그 길로 산을 내려갔다.
허무함.
허씨 가에 도착했을땐 소윤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예상했던대로 마츠다이라가 데리고 갔단다.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그 어미인 유씨부인은 환영하다시피 떠나보냈고, 소윤도 순순히 따랐다고 한다.
“이런게 어딨소!”
우주는 속에서 터져나오는 울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마루에 나와 있던 유씨부인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몸소 낳은 딸이잖소! 딸을 왜놈에게 팔다니 당신은 미쳤소!”
유씨부인은 그를 보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혀를차며 말했다.
“망해가는 조선에서 여자들만 있는 집안에서 할 수 있는게 뭐가 있겠느냐?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게 최선이었다. 내, 남편을 여위고 이 집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해왔다.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그것이 힘들더구나. 하물며 왜놈에게 지배당한 시국에 조선놈을 믿어서 뭘할까?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 조선놈에게 시집보내도 평생 볼 수 없는 마당에 차라리 왜놈에게 시집보내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함으로써 딸의 인생이 펴졌거니와 우리 허씨 집안도 앞으로 일본군에게 보호 받을 수 있게 되었지. 한마디로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이 말이다 이 어리석은 놈.”
“빌어먹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주는 발악했다. 소윤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 말을 타고 정신없이 한양으로 떠났다.
가는 길목마다 매복해있던 관군이 그를 막아세웠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주를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악귀란 칭호는 이때 태어났다.
한양까지 가는 동안 일본군을 포함해 수백명의 관군을 쓰러뜨렸고, 그가 한양에 입성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당시 조선의 통치자였던 임금은 예정돼있던 산책을 취소하고 궁으로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 못할 정도였다.
“여기 있을줄 알았네! 지금 한양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달려왔지! 날 따라 오게나!”
한양 곳곳에 미리 대기하던 왜놈과 관군으로 인해 뚫고 나가기가 어려웠지만, 예전에 안면을 익힌 안중근의 도움을 받아 이윽고 도착한 한강의 어느 나루터.
저녁 해가 넘어갈 무렵 일본을 향해 떠나가는 배가 저멀리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우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속만 태우며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다. 그의 일생에서 처음 만난 여자, 그녀가 떠나가는 광경을 그저 처량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왜, 왜 낭자는 이 길을 선택한거요? 대체 무엇을 보고...? 어째서...”
그는 도무지 그녀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가지고 돌아오는 길은 쓸쓸했다. 그리고 그를 뒤쫓던 병사들을 피한답시고 들린 어느 골목길에서 문득 갓난 아기를 안고 있던 한 아낙네와 마주쳤다.
“지, 지나가게만 해주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못보았습니다!”
칼을 든 자신을 보고 놀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품속에 안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물었다.
“아이의 이름이 뭐요?”
“과, 관순이라고 합니다.”
우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관순이를 잘키워주시오. 이 아이는 장차 커서 나라의 큰 희망이 될거외다.”
다시 양주골로 돌아온 우주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소윤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게 해준 관리들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애당초 양주골 수령은 일본인들과 결탁하고 있었고,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던 탐관오리였다. 소윤의 아버지도 그들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우주는 관가로 쳐들어가 다 때려부수고 고을 수령을 마당으로 끌고나와 무릎꿇게 만들었다.
그리고 넓적한 칼을 들고 목을 내리치기전 물었다.
“왜 그랬느냐. 왜놈들에게 핍박 받는 백성들에게 기운을 실어주지는 못할 망정 어째서 니놈만 잘먹고 잘살겠다고 그들을 착취하고 괴롭혔느냐!”
“바, 반성하고 있습니다요! 앞으로 열심히 살테니 제발 한번만...!”
“시끄럽다!”
싹둑!
이후 우주는 양주골을 떠났다.
미련이 많이 남는 곳이지만 그에게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사명이 있었다. 소윤이 마지막으로 남기고간 귀중품을 팔아 새로운 동지들을 찾고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음...”
우주는 불쑥 눈을 떴다.
절대 잊을 수 없는 100여년 전의 기억.
그것이 꿈에 나왔다.
몸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모두 끝난 일.
돌이켜도 소용없는 일.
천천히 한숨을 내쉬고 창문을 바라봤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도 않은 한밤이었고, 조용히 옆을 돌아보니 료코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는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료코의 흐트러진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다행이다. 이렇게 돼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길을 느낀 료코가 잠에서 깨어났다.
졸린 눈을 살살 비비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흰 망사속옷에 가려진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료코는 한껏 잠긴 톤으로 그에게 말했다.
“서방님...”
목소리에 애교가 껴 있었지만, 그녀가 한 말은 듣기에 조금 무거웠다.
“(오늘, 강미라의 재판날이라서 일찍 일어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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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구에구 마츠다이라를 염두해두고 쓴 에피소드인데 하나도 안나왔네요.
슬프다.
좋은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