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자네는 앞으로도 날 도와줄 수 있는 재능을 갖추고 있고, 강미라는 데바니까 봐준걸세. 이 나라에 데바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거든.”
문득 든 생각이 있어 우주가 물었다.
“혹시 미라 낭자를 909 특임대로 차출하실 생각이십니까?”
“솔직히 잘려나간 두 팔을 5초만에 재생시키는 그녀의 능력은 가히 불사에 가까워. 기업에서 일하게 놔두기에는 아깝고, 국가적 차원에서 욕심을 낼 만한 능력이라네. 하지만 하고 자시고는 그녀에게 달렸지. 어차피 그녀를 고용할 기업도 이젠 없을테고, 만약 하겠다고 하면 909 특임대에 넣을 생각이네.”
“......”
우주는 미라가 909 특임대에 들어가는 것이 꺼림칙했다. 나라의 중대사를 떠맡기보다는 전처럼 일반 기업에서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갈 곳이 없다.
그렇다면 갈 곳 없는 미라를 결국 자신이 거둬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이상 어쩔 수 없이 아내로 맞이해야할 것이었다.
***
레지스트 쉴드 내에서 활동하는 수라에게는 일년에 두 번 휴가기간이 있다.
하나는 8월에 주어지는 하계 휴가이며, 이때는 돌연변이 동식물에게 번식기간을 주기위해서 한국, 중국, 러시아 기업이 모두 3주간 활동을 중단한다.
또 하나는 동계 휴가이다. 이 시기는 번식 기간을 위해서라기보다 강한 바람을 동반한 혹독한 추위와 많은 눈, 미끄러운 얼음 바닥이 수라들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고 기동과 작전을 어렵게 함으로서, 12월부터 이듬해 2월초까지 휴식 기간을 갖는다.
그리고 하계와 달리 동계 휴가기간에는 마냥 손놓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두 달 동안 겨울 이직시장이 열린다.
본래 수라에게는 이직 가능한 주기가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다. 사시사철 아무때나 이직과 영입이 가능하지만 겨울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론에서도 자연스레 겨울 이직시장이 개방됐다고 표현했다.
이 시기에 각 기업들은 전력 보강을 위해 뉴 페이스 영입에 활발하게 나서며, 수라들 역시 자신의 몸값을 여러 기업에 확인해보고 두 달이라는 휴식 기간동안 더 많은 연봉을 주는 일터를 찾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12월.
선고공판이 치뤄진 다음날에는 함박눈이 내렸다.
연예 활동으로 하루 일정을 마치고 철수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차안에서 우주가 문득 아라 이야기를 꺼냈다.
“저녁 먹고 시간도 비는데, 간만에 아라나 한 번 보러갈까 하는데 어떻소?”
“어쩌려구요? 설마, 만나게요?”
“아니오 그냥. 멀리서 볼까해서 그렇소. 얼굴을 본지도 오래됐고.”
우주가 납치된 2주 동안 김아라에게서 5통의 편지가 와있었다. 답장이 없음에도 꼬박꼬박 보내주는 그녀의 정성에 내심 감동을 받고 있었다.
“이번에 수능보고 대학 알아보고 있다 하더이다.”
“내년이면 18살인데 벌써요?”
“대학을 빨리 졸업하고 일하고 싶은가 보오.”
“일하는 것도 좋지만 우선 말리지 그래요. 제 또래들보다 너무 앞서가는 것도 전 별로라고 생각해요. 딱 중간만 하는게 제일 좋은데 말이야.”
종일 내리던 눈은 저녁이되자 멈췄다. 거리에는 온통 눈이 쌓여 있었다.
우주와 철수는 노량진에 차를 세우고 근처 묵은지 식당에 들렸다.
김철수의 말대로라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다는 묵은지김치찌개를 배부르게 먹고, 두 사람은 곧 헤어졌다.
밖으로 나온 우주는 쌀쌀한 추위와 밤의 어두움에 감사했다. 그것이 자신의 모습을 감춰 주었으므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찬바람속에 옷깃을 세우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나아갔다.
현재 시각 7시 10분.
아라가 논술 학원에서 끝나는 시간이 저녁 8시니까 그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저녁 8시.
학원 건물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끼리끼리 서로 뭐라뭐라 수다를 떨며 학원 앞이 단숨에 복잡하고 시끄러워졌다.
한쪽 구석에서 진을 치고 서 있던 우주는 힐끔 힐끔 곁눈질을 해가며 김아라를 찾기에 바빴다. 자신의 얼굴이 드러날 위험은 없다고 생각했다. 야구모자를 푹 눌러 쓰고, 검은 뿔테에 마스크도 했고, 두꺼운 실목도리를 코까지 칭칭 둘러감아놨다.
“많이 변했을지도 모르겠군.”
아라의 실물을 본게 5개월 전이다.
보고도 몰라보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을 하다가, 그는 그만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학원 입구에서 친구와 함께 걸어나온 그녀는 바로 곁을 스쳐지나갔다. 막 스치려는 순간 눈이 잠깐 마주쳤던가 그랬다. 하지만 우주는 무의식적으로 눈길을 피했다. 행인에게 자신이 신우주라는 사실을 들킬까봐 그랬다.
“가만. 혹시 방금 그 처자인가?”
안쪽에서 더는 사람이 나오질 않자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할일 없이 수다를 떨며 서 있는 무리, 지나가는 행인, 학원 앞에서 떡볶이를 팔고 있는 노점.
“떡볶이를 팔고있는 노점? 그래 맞다!”
그 노점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던 아라를 드디어 발견해냈다.
등에 백팩을 메고, 두꺼운 점퍼를 입고, 캐주얼한 복장에,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모습. 옆에 있는 친구는 누군지 몰라도 단짝처럼 보였다.
머리스타일도 많이 변해 있었다. 전에는 단발이더니 머리를 많이 길렀다. 그리고 긴 머리를 한쪽으로 모아 낮게 묶어서 그런지 또래에 안맞게 차분하고 성숙한 분위기가 있었다.
우주는 떡볶이를 먹고 있던 아라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주머니, 떡볶이 1인분만 주시오. 크흠.”
일부러 목소리를 걸걸하게 하고 주문을 했다.
“싸가실 거유?”
아주머니의 물음에 우주는 대답없이 아래를 가리키는 손짓만 했다. 여기서 먹고 가겠다는 뜻이다.
“얼른 줄텡게 조금만 기다리시유.”
우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란히 선 아라에게서 살짝 등을 돌린 채 떡볶이를 기다렸다.
화물차의 뒷칸을 개조하여 만든 분식차. 투명한 비닐에 가려진 순대와 오뎅국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여깃슈.”
아주머니가 흰 접시에 담긴 떡볶이를 건넸다.
우주는 그것을 받아들고 탁자에 내려놓았다.
슬쩍 목도리를 내리고 포크로 하나 집어 먹었다.
천천히 씹어가며 귀를 기울였다.
“울반 성준쌤 진짜 웃겨. 국어쌤인데 욕한다. 이 씨베리아야, 구원못할 씹장생 같으니. 막 이러면서.”
단짝 친구로 보이는 소녀가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라는 덩달아 웃으면서도 떡볶이가 매운지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렇게 한 5분 정도를 학원 이야기로 떠드는 와중에 문득 소녀들에게 어떤 남학생들이 다가왔다.
우주는 무언가 불길한 느낌에 가까이 다가온 그들을 흘끔 쳐다봤다. 사복을 입은 세 명의 청소년들은 딱 보기에도 껄렁껄렁해 보였다.
그중에서 가운데 서있는 남자가 히죽대며 아라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라야, 생각해 봤냐?”
아라가 포크를 내려놓고 가운데 있는 남자를 야무지게 노려보았다.
“뭘?”
“뭐라니? 일부러 그러는 거냐? 내 꺼 할 거냐고.”
“내가 미쳤냐? 니 여친을 하게?”
우주는 저도 모르게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묵묵히 떡볶이를 집어먹으며, 아라의 앙칼진 목소리가 비록 그녀보다 연상인 한소라에 견줄 바는 못 되지만, 그럭저럭 또래 남자 정도는 활기차게 꾸짖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와와와, 너 거부했다간 학원 못 다니게 될 텐데?”
“여기 노량진 일대는 창석이네 형이 주름 잡고 있는 거 알지? 창석이 열 받았다간 니네 집 불나는 수가 있다. 키키.”
창석이라는 녀석 좌우에 서있던 똘마니로 보이는 친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우주는 그만 아라의 집에 불이 난다는 소리에 발끈할 뻔했지만, 일단 참았다. 참고, 저놈들을 어찌 혼내줘야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하라고 해라, 마! 하나도 겁 안 나니까!”
아라가 꿋꿋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단짝이 서둘러 계산을 하고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라야, 가자.”
자리를 떠나려는데 갑자기 가운데 있던 창석이 아라 단짝의 젖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가긴 어딜 가.”
“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