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순간 복도를 울리던 구두소리가 멈췄다.
이선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소? 지금 고소라고 했습니까?”
-예.
“무슨 일로 고소를 하겠다는 거죠?"
-그건 회장님이 잘 아실텐데요.
“또 그날 일입니까? 샥스핀의 오작동으로 인한 쇼크 증상이라는 검진 결과가 3주 전에 나왔는데도 계속 그럴 생각이에요?”
-하지만 라이더스 프로그램의 사용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듣지 못했습니다. 회사는 우리에게 뭘 숨기고 있는거죠?
“숨길것도 없습니다.”
-샥스핀의 실험을 위해 저와 현아가 이용된것이 아니고요?
“그래서 고소를 하겠다는 겁니까?”
-사람을 마치 모르모트처럼 다룬 죄를 묻겠습니다.
“우리가 생체 실험을 했을 리는 없겠죠.”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아본 결과 생체 실험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대체 무엇을 꾸미신거죠? 사고 이후 샥스핀에 탑재된 블랙박스 영상을 한사코 보여주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고 싶습니다.
“블랙박스 영상은 관계자 외 일반 직원이 볼 수 없습니다. 회사 규정을 상기하십시오.”
-작전에 투입되기 불과 3일 전에 급히 수정된 그 규정을 말인가요?
이선주는 눈을 감았다. 귀찮은 일에 기력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고, 신우주 구출작전이 이뤄지던 당일 사건에 관해서 언론에 알려지는 것도 피하고 싶었고, 어차피 내치려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뒤 침착하게 입술을 열었다.
“수희 씨. 우리와 계약기간이 아직 1년이 남았던가요? 그리고 현아 씨는 3년이 남았고요.”
-그래서요?
“솔직히 우연진 씨가 이끌던 사막여우팀이 해체된지 겨우 3달이 지났을 뿐인데 또다시 세간에 구설수를 낳고 싶진 않네요. 회사 이미지를 생각해야죠. 그래서 말인데, 만약 이직을 원하신다면 서로 윈윈하는 조건으로 통크게 놓아 드리죠. 당신의 현재 몸값에 해당하는 이직료 1200억원과 박현아의 이직료 350억원을 받지 않겠습니다. 우리쪽에서 그 어떤 권리도 내세우지 않고 무조건 내보내주겠단 겁니다.
어때요? 이 정도선에서 적당히 마무리 짓죠.”
침묵이 흘렀다.
조금은 길었다.
그동안 이선주는 수화기 건너편에서 김수희가 누군가와 속삭이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미간을 좁히며 속으로 생각했다.
‘변호사인가?’
어쨌든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김수희가 입을 열며 당돌하게 제안을 해왔다.
-다른 기업으로 가더라도 연봉은 그쪽에서 지불해주시죠.
“연봉이라, 둘 다?”
-예, 둘 다.
이선주는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렸다. 김수희 300억, 박현아 90억. 이직료를 포기하면서까지 이 둘의 연봉을 챙겨줘야할 이유가 굳이 있을까?
있다.
샥스핀이 맹수를 도촬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대가라면 무척이나 싸다. 적어도 제네틱스측으로부터 고소당하는 것보다야 낫다. 만일 그들이 진실을 깨닫고 고소를 한다면 1조원이 우스울정도로 천문학적인 보상금액을 요구할 것이다.
“좋습니다. 하지만 연봉 지급은 내년까지만 입니다. 그 이상은 양보 못합니다.”
-예.
한 번 더 흥정해올것이라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김수희는 순순히 수락했다.
이선주가 살짝 미소를 짓고 말했다.
“이걸로 서로 OK입니다. 이제 끝난거니 두 말 하지 않았으면 하는군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빨라서 좋네요. 진작에 이렇게 할걸 그랬나. 아무튼 내일 오전에 사인하러 오십시오. 고소하지 않겠다는 각서와 계약 중도 해지 서류등을 준비해놓겠습니다.”
그 뒤 전화를 끊었다.
옆에 내내 서 있던 비서에게 휴대폰을 건네자 그는 공손히 받아들며 눈치를 살폈다.
“저... 회장님. 김수희가 나간다면 분명 회사주식에 큰영향을 끼칠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주식이 곤두박질 쳐봐야 당분간 입니다. 그리고 소민이에 대한 처우로 불만을 품고 있는 김수희를 데리고 있어봤자 제대로 일도 안했을겁니다.
그게 더 회사에 도움이 안되지 않을까요? 게다가 인사팀 내사에 의하면 재계약할 가망성도 없어보였고, 어차피 떨어져 나갈 혹을 미리 떼어버린것 뿐입니다.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그녀가 말을 마치고 뒤를 돌아봤다.
제일 앞줄에 서 있는 중년 남성을 쳐다봤다.
“박전무님.”
호명된 그가 점잖게 허리를 숙였다.
“예, 회장님.”
“방송사나 언론사 국장급들 하고 친분이 있으시죠?”
“네 적당히 알고 지내고는 있습니다.”
“김수희에게 스폰이 붙었는지 알아보십시오.”
그가 입술을 주저하다 이내 대꾸했다.
“회장님. 김수희는 스폰서가 없기로 소문나 있습니다. 심지어 방송을 통해 혼전순결을 하겠다고 선언까지 했었습니다.”
이선주가 무심코 코웃음을 쳤다.
“그럼 탈세와 탈루 혐의가 있는지 조사해보십시오. 그리고 박현아 또한 남자관계를 포함해 알아보시고.”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쩌긴요.”
이선주는 그렇게만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앞을 보고 걸어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두 년 이미지 망가 뜨리고 다시는 재기를 못하도록 밟아놔야죠.”
***
초저녁 팝송이 흐르는 어느 까페.
남들 눈에 안띄는 구석진 자리에는 세련된 차림의 두 여성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통화를 마친 수희가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올려두며 정면을 쳐다봤다.
그 즉시 눈앞의 소민이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통화가 끝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초조한 빛이 역력했던 그녀였다.
“어떻게 됐어?”
“해주겠대.”
“정말? 어머니가 연봉 준다니?”
“응. 챙겨준대.”
“다행이다.”
소민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희는 커피잔을 들면서 씩 웃었다.
“나 이제 너희 회사로 가도되지?”
“응. 한 자리 챙겨줄테니까 나만 믿어.”
소민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수희를 영입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단히 기분이 좋아졌다. 우주에게 빨리 가서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연봉이 300억이나 하는 수희를 공짜로 영입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가 얼마나 놀랄까?
참고로 지난 11월 한 달 동안, 우주와 소민은 은밀하게 만나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동안 구상만 해오던 회사 설립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하며 자본금 마련 및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던 것이다.
우선 소민은 회사설립을 위해 자본금 7천억원을 마련했고, 우주는 그간 CF찍은것 하며 주급으로 받은 돈까지 다 쥐어짜내서 320억원을 마련했다. 하지만 총 7320억원을 가지고 레지스트 쉴드 내에서 생산활동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랐다. 일단 인건비를 제쳐두고서라도 최첨단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따라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낸 결과, 최대한 적은 자본으로 최고의 효율을 낼수 있는 방안으로 회사의 기본 골격을 세웠다.
예를 들면 이렇다. 본사는 서울 외곽 땅값이 저렴한 곳으로, 사원수는 95명. 그 중 수라는 1팀 25명만 두기, 연봉 10억원 이하의 하급 수라만 영입하기, 무기는 칼, 총 같은 휴대용 개인화기만 구입하기, 파워드 슈트 없음, 백공트럭 1대를 제외하고는 작전지휘차량 같은 특수 차량 지원 없음, 전투 식량은 제일 저렴한 곳과 거래, 회사 규모가 커질때까지 당분간 토끼급 돌연변이 생물만 잡기, 서울시내 한 대형병원과 업무협약 맺기, 기무팀이나 화랑팀 같은 보안팀 창설 등등.
이런 와중에 수희가 불쑥 소민과 연락이 되면서 신라그룹을 나오겠다는 의중을 언뜻 내비쳤다.
그에 소민이 아주 좋은 기회다 싶어 자신의 생각을 돌려서 전했다. 되든 안되든 여자들끼리의 수다에서 나온 이야기, 듣고 흘릴 잡담 같은 딱 그런 수준이었다.
하지만 수희가 덥썩 물면서 수민이 앞으로 꾸릴 회사로 무척이나 들어오고 싶어했고, 나중에는 어떻게 안되겠느냐며 떼를 쓰는 상황까지 이르렀었다.
이에 소민이 미래에 차릴 회사의 재정상태를 그녀에게 소상히 밝혔다. 이직료만 1200억원에 달하는 수희를 바로 영입하기에는 돈이 부족했고, 하다못해 연봉 300억원을 주기에도 등골이 휠 정도로 규모가 작은 회사라고 말이다.
소민은 일단 재정 상황이 이러하니 계약이 끝나는 1년만이라도 기다리자고 했으나 수희는 울상을 지으며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니가 없으니 회사 다니기가 정말 죽을 맛이라구.”
한참을 투정 부리더니 그녀는 이내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이선주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좋은 조건으로 신라그룹을 나올 수 있었고, 소민의 회사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조금 전의 상황이었다.
“동업자는 언제 만나볼 수 있어? 앞으로 그 밑에서 일할텐데 나도 얼굴 한 번 봐야지.”
수희가 차분하게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녀는 소민의 동업자가 우주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애당초 소민이 그의 이름만 쏙 빼놓고 수희에게 사정을 설명 했었다.
수희의 말에 소민이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응, 그 사람은 말야... 나중에 회사 설립하면 보여줄게.”
수희가 혀를 빼죽 내밀었다.
“뭐야 너.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고 그래? 사실 니가 동업을 한다는 것도 안 믿기고 혹시 그 동업자라는 사람 니 남자친구 아니니? 왠지 수상하다. 너 예전에 우리 약속한거 기억해? 남자친구 사귀면 제일 먼저 보여주기로 했던거 말야.”
소민은 홍차 티백을 매단 실을 잡아당기며 머릿속으로 잠깐 우주를 떠올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런거 아니야. 정말로 사업 때문에 의기투합한거야.”
“믿어도 돼?”
“응.”
수희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술 한잔 할까?”
“별일이네. 네 입에서 술 마시자는 소리가 다 나오구. 당분간 촬영없나봐.”
“오늘 기쁜날이잖아. 이런날 안마시면 어떡해?”
그녀가 부추기자 소민도 느닷없이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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