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그럴까?”
소민이 밝게 화답하고 이어 말했다.
“아, 그리고 말야.”
“응?”
“신라그룹에서 널 놔주는것 말이야. 내 생각에는 어머니가 너무 쉽게 받아준것 같아.”
“너도 그런것 같지? 의외로 일이 잘풀려서 좀 찜찜하긴 해.”
“응. 원래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선 손해를 보면 안돼. 고객들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도 어떻게든 이익을 남기려고 하는게 기업이거든. 우리 어머니의 성격으로 볼때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로 안하는 타입이야. 그런데도 순순히 받아줬다는건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아.”
“다른 생각이라..."”
수희가 생각에 잠기는 얼굴을 했다.
소민이 말했다.
“내 생각이지만, 어머니는 아마 포스트 우연진을 영입한걸 수도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널 이리도 쉽게 내보낼리가 없거든. 신라그룹을 대표하던 사막여우팀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한데다가 팬과 투자자들이 아우성을 칠테니까.”
“포스트 우연진이라면 누구? 신우주?”
“신우주는 가망성이 없다고 봐.”
“어떻게 그리 쉽게 단정지을 수 있어?”
소민이 용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내가 영입하려고 그토록 애를 썼는데도 한사코 거절했던 전적이 있거든.”
수희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누가 있을까...?”
“그건 아직 모르지만, 조만간 나타나겠지. 그리고 그건 우리가 신경쓸게 아니야. 이 시점에서 수희 네가 가장 신경써야 할것은 현아 씨랑 같이 트집 잡힐 일은 만들지 말고 당분간 행동거지를 조심하도록 해.”
“그렇게까지 해야해?”
“네가 신라그룹을 나오게 되면 우리 어머니에게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을거야. 그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신라그룹은 네 가치를 떨어뜨릴 생각에 각종 음해와 악의적인 기사를 내보낼지도 몰라. 김수희는 원래 사생활이 문란한 사람이었고, 기량도 전보다 떨어졌다는 식으로 말야. 팬들이 나중에 잘 내보냈구나 하고 생각하게끔 널 폄하하는거지.”
“아...”
수희는 소민의 조언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녀의 차분한 설명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역시 기업인은 다르구나. 넓게 보는 안목이 있어.”
“다르기는. 이런 일은 연예계도 똑같지 않니? 소속사에서 연예인이 나가면 서로 좋게 끝나는 모습을 본적이 없는것 같아. 법정 다툼을 벌이거나 방송사에 대고 출연시키지 말라고 압력 넣거나.”
“뭐 비일비재하지.”
소민이 홍차를 입에 대고 한모금 마셨다.
수희가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손을 좀 떠는것 같아. 전엔 안그러더니 수전증이라도 생겼니?”
“아, 이거.”
소민이 손을 감추듯 테이블 밑으로 내려놓았다.
“요즘 마음이 불안한데가 있어서 그런지 몸이 허약해진것 같기도 해.”
“혹시 우리 때문이니?”
소민의 실수로 인한 우연진의 사망과 사막여우팀의 해체.
수희는 어딘가 망가진 것 같은 친구의 모습에 안타까웠다.
그녀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나한테 연락을 왜 안했어? 그동안 어디에 있었니?”
“비밀.”
“말해주면 안돼?”
“나중에.”
소민은 갑자기 딴청을 피우듯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둘러봤다.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이 많다보니 불안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 밑에서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다시 눈을 마주치며 말을 돌렸다.
“회사에서 나오면 현아 씨는 어디로 간데? 들은거라도 있어?”
수희는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듯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대답했다.
“대충 듣기로는 신우주가 있는 제네틱스로 가고 싶은 모양이야. 요즘 제네틱스가 잘나가다 보니까 들어가기만 하면 떡고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서 아주 신나 있더라구. 그런데 왜? 너희 회사로 데려가고 싶어?”
“그러면 좋겠지만 현아 씨가 선택하는 거니까.”
“하긴.”
수희는 말을 마친 뒤 옆자리에 놓인 가방을 챙기며 일어섰다.
“머리 아픈 얘기는 이제 됐다. 차는 그만 마시고 술이나 마시러 가자. 널보니 술고파지네.”
***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이 출동한 것 같았다.
땀에 젖은 우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골목길에는 무려 40명에 달하는 사내들이 나뒹굴며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쇠파이프와 횟칼을 보니 더 열이 받쳤다.
“저런 흉기로 무고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던것이냐!”
무섭도록 엄포를 놓았다.
“다시는 깡패짓 하지말거라! 너희끼리 또 몰려다녔다가는 그때는 진짜 작정하고 반병신으로 만들어줄테니 꼭 명심하거라! 알겠느냐!”
그 뒤 서둘러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입구 바닥에 던져놓았던 목도리와 패딩을 걸치고 밤거리를 내달렸다.
문득 어느 정도 멀어졌다 싶을때 뒤돌아봤다. 자신이 빠져나온 골목길로 경찰 여럿이 뛰쳐들어가는 광경이 보였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부챗살처럼 퍼져 한강물이 번쩍이고 있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우주는 노량진에서 내렸다. 자신의 차를 타고 오면 좋았겠지만, 지금 그는 마이바흐하고 페라리밖에 없다. 비싼 차를 끌고 오면 이목이 집중될 것 같아서 일부러 버스를 타고 온 것이었다.
오전 날씨가 워낙 추워 폴폴 입김이 새어나왔다.
어젯밤 철수를 시켜 아라가 집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도 했으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째서인지 발길이 멈추질 않았다.
그렇게 얼굴만 잠깐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오피스텔 뒤편 쓰레기장에서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아라는 학원에 갈 생각에 어깨에 가방을 메고 한 손에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와 있었다.
우주는 무척 놀랐으나 겉으로는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속으로 뜨끔했다. 어젯밤에 썼던 모자와 목도리를 오늘도 똑같이 하고 온 게 실수였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뿔테 안경도 그대로였다.
그렇다 보니 아라가 먼저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우주는 목도리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고 최대한 담담하게 마주 대했다. 일단은 그저 묵묵히 그녀가 왼손에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빼앗아 쓰레기장 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다쳤으면 우짜노 했는데, 무사했네예. 다행이라예. 어제는 참말로 고마웠습니더.”
화장도 안 한, 앳되 보이는 소녀가 밝게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꾸벅 숙였다.
우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끄덕, 눈도 마주치질 않았다. 시선은 그녀의 발끝에만 고정.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아라가 손을 이마에 대고 해를 가리며 물었다.
“어제 경찰 아저씨랑 한참 찾았다 아입니꺼. 나중에 창석이 패거리를 찾았는데, 누군가한테 심하게 얻어맞았대예. 아저씨가 팬 거라예?”
우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저씨는 떡볶이집에서 바로 도망갔어예?”
끄덕끄덕.
“이상하다. 그럼 창석이 패거리는 누가 팬 거제.”
“…….”
아라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봤다.
“혹시 밥 묵었으예? 지가 학원 가기 전에 밥 묵으러 가야 하거든예. 어제 구해주신 보답으로 사 주께예. 같이 가실래예?”
그래서 두 사람은 가까운 편의점에 갔다.
가게 안에는 알바생을 포함해 우주와 아라뿐이었다.
두 사람은 구석 한쪽에 나란히 자리 잡고 앉아서 컵라면에 물을 붓고 삼각 김밥을 뜯었다.
우주는 삼각 김밥을 먹는 동안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게 고문을 견디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입술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만 목도리를 내리고 야금야금 씹어 먹느라 애를 썼다.
밥을 씹고 있던 아라가 물었다.
“원래 말수가 그리 없어예?”
끄덕끄덕.
“과묵한 성격인가 보네예. 왠지 신비스럽습니더.”
수상할 법도 한데,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몇 살이라예?”
우주는 삼각 김밥을 내려놓고 양손을 쥐었다 폈다 두 번을 하고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렸다.
“스물두 살?”
고개를 끄덕끄덕.
“저보다 다섯 살 많네예. 아저씨라고 하면 안 되겠다. 기분 안 나빠습니꺼?”
머리를 흔들었다.
“괜찮다고예?”
머리를 또 흔들었다.
아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어떻게 하믄 되는데예? 아!”
그녀가 손뼉을 마주쳤다.
“오빠라고 부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