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하아...”
수연의 입에서 불현듯 한숨이 터져나왔다. 이 길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관한 의문이 그녀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적시는듯 했다.
사실 소형 사탄을 만난 이후 제대로 된 삶을 이어갔더라면, 그 이후 제네틱스에서 우주와 함께 활동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어쩌다 지금 이곳에 있게 된것일까.
답은 나와 있었다. 우주를 만난 기간보다 차영웅과 태평을 알고 지낸 기간이 더 길었고, 그녀는 차마 의리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게 하다못해 복제인간이라 할지라도 결국 옛정에 져버리고 만것이다.
“무슨 생각중이지?”
TV를 보던 차영웅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듯했다. 새롭게 다시 태어난 차영웅의 피부는 20대 나이에 걸맞게 매끄럽고 탄력있었으며 전보다 훨씬 어려보였다.
한편으로는 그게 상당히 낯설다. 40대 얼굴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모습으로 눈앞에서 돌아다니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기존에 알고 지내오던 차영웅이 아닌 다른 사람 같기도 하고 심지어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수연은 티를 내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가 걸리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별로? 아무것도.”
수연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나저나 복제 인간에 관한 법안은 언제 통과된대요? 이선주 그 여자가 정말 할 수 있긴해?”
차영웅은 그대로 냉장고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조만간 이루어질 것 같으니 기다려주게. 다수의 여당 의원들을 포섭하고 대통령님과도 면담을 요청 했다더군.”
“맨날 기다려 달라면서 기다리라고 한게 벌써 3달 지났어요. 그동안 우린 한가하게 놀기만 했고. 돈도 못벌고 이게 뭐야. 나 이제 통장에 남은 잔고가 100만원이라고.”
“그건 니가 인터넷 쇼핑질이나 하니까 그렇지. 맨날 사기나 하고 처입는걸 못봤어.”
태평은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녀에게 핀잔을 줬다.
그 말에 울컥한 수연이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그래서 니가 사줘봤냐? 닥쳐라 넌.”
그녀의 시선은 다시금 냉장고 앞에 서 있던 차영웅에게 꽂혔다.
“지금 보니까 신우주 완전 장난 아닌것 같은데 차 대표님이 이길 수 있겠어요? 이선주 그 여자 대표님한테 엄청 기대하는것 같던데.”
수연은 차영웅을 차 대표라고 불렀다. 그녀가 처음 고릴라 팀에 들어왔을 당시 차영웅은 자기 생각으로는 꽤 혁신적인 까페 사업을 추진하며, 투자자들을 모집하기 위해서 전국을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연도 투자자 중 하나였으나 결국 사업은 진척이 없었고 6개월 만에 정리된 일이 있었다.
차영웅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다 마시고 나서 입술에 묻은 맥주를 손으로 닦으며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우주 군 실력이 상당히 늘었긴 하더군. 정확한건 드롭존에서 붙어봐야 알겠지만, 난 지금 40대 차영웅이 아닌 20대 차영웅이라네.”
자신있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때 3인용 소파에 홀로 앉아서 TV를 보고 있던 태평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영웅 형님이 당연히 이기지 씨발. 그걸 말이라고 해. 하다못해 내가 해도 이기겠다. 영웅 형님은 독보적인 존재. 그리고 난 넘버 투.”
소파 뒤에 서 있던 수연이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쳤다.
“어찌 그리 자신만만하실까. 넌 상대도 안될것 같은데.”
“지랄 말어. 제 아무리 우주가 성장했다지만 설마 날 이길라고. 난 말야.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이거든?”
“언젠 복제란 단어조차 듣기 싫다더니 왠일?”
“단순히 복제만 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이 연구소에 계신 과학자느님들께서 내게 애프터 서비스를 해주고 난뒤 생각이 확 달라졌지. 자, 보라구.”
태평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양팔을 피며 자랑스러운듯 한바퀴 돌았다. 확실히 그는 예전과 많이 변해 있었다. 덩치도, 키도, 골격도. 건장한 체격을 넘어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매우 관리가 잘된 몸이었다.
“내 몸이 이렇게 멋져보인 적이 없어. 전보다 키도 더 커졌고, 게다가.”
태평이 바지와 속옷을 동시에 끌어내렸다. 무릎까지 끌어내리더니 힘없이 축 늘어진 고추가 달랑 튀어나왔다.
그가 한 손으로 고추를 움켜쥐며 말했다.
“이거보여?”
손바닥으로 고추를 툭툭 튕겼다.
수연이 절로 인상을 찡그렸다.
“병신.”
“나 원래 발기 안했을때 고추길이가 2cm였어. 근데 과학자느님들의 A/S를 받고 길이가 9cm로 변했지. 난 아주 만족해. 신체 변화중 이게 가장 맘에 들어. 복제 인간도 할만하다고 생각중이야. 솔직히 말해서 예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뭐 있어? 이렇게 멋진데.”
수연이 매우 불쾌하다는듯 짜증을 냈다.
“크든 작든간에 니껀 꼴보기 싫을 정도로 존나 흉물스러우니까 당장 옷이나 처입어 개자식아.”
“너도 우리처럼 신체강화를 받지 그러냐. 젖가슴이 커질 수 있다니까?”
“됐거든요? 난 지금도 충분히 크고, 굳이 신체강화 따위 안받아도 남들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해. 너처럼 신체에 대한 컴플렉스 따위는 없어.”
“음... 아직 복제가 안되서 그러나?”
태평이 무심코 말을 뱉고는 바지를 끌어올렸다.
그는 다시 소파로 돌아가 앉더니 TV를 보기 시작했다.
반면, 태평이 단순히 내뱉은 말은 수연을 내심 발끈하게 만들었다. 마치 너도 죽으란 소리 같았다.
‘죽고, 복제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면 너도 생각이 달라질거야.’
라는 감정없고 잔인한 말로 들려왔다.
상심한 그녀가 중얼거리듯 욕설을 지껄였다.
“씨발놈 좆같은 말만 내뱉네...”
그때 차영웅이 불쑥 다가와서 눈앞에 맥주를 들어보였다.
수연이 무심코 받아들자 그녀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고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 태평이가 한 말에 너무 상처받지 말게. 저 친구의 성격에 관해서는 자네도 잘 알거야. 겉으론 태연한 척 하면서도 사실 속으로는 무척 혼란스러울걸세. 솔직히 나도 그렇고. 부디 이해해주길 바라네. 다시금 말하지만 우린 결코 자네와 다르지 않아. 그저 살기 위해서 신체강화를 했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것 뿐이지. 그리고 자네가 곁에 있기에 우리 둘 다 아주 큰 힘이 되고 있고. 이해하나?”
수연은 차영웅의 눈빛을 바라보며 뜸을 들이다 이윽고 대답했다.
“이해해요.”
***
“대장님이 왔어!”
하나가 찬우를 보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뭐?”
찬우는 그녀를 보며 웃음을 지으려다, 곧 표정이 굳어졌다.
돌연변이 생물의 혈흔이 사방에 튀겨 있고 벽에 균열이 생긴 3층 패스트푸드 건물 앞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그때까지 둘은 함께 사냥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찬우가 줄곧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런 와중에 우주가 드롭존에 참전했다는 소식을 알게된 하나가 부랴부랴 자신의 장비를 챙기고 슈퍼바이크에 탑승하려고 했다.
여태 하나와 즐겁게 사냥을 하고 있었건만, 갑자기 바람 맞은 기분이 들은 찬우가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뭐해? 어디가려고?”
“대장님한테 가볼생각이야.”
“왜? 가서 뭐하게? 거길 니가 왜 가?”
“왜 가다니? 가서 도와줘야지.”
“도와줘? 너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우리 팀장님인데 왜 상관이 없어?”
찬우는 아주 어이가 없었다.
하나의 태도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왜 갑자기 떠난다는 거야? 날 무시하는 거야?’
찬우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하나는 슈퍼바이크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
부릉부릉!
찬우가 그 앞을 가로 막았다.
“니가 콩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구나. 오히려 방해만 될텐데 가서 뭐하려고? 쓸데없는 짓 하지마.”
“쓸데있어. 그러니까 비켜.”
“대장님이 얼마나 대단한줄 알지? 분명 니 도움은 필요없을걸?”
“그래도 가볼거야.”
찬우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보내주기가 싫었다.
하나가 팔을 흔들었다.
“이거 놔.”
찬우는 가능한 침착하게 말했다.
“개인 포인트는 쌓아야 될거 아냐. 남 도와주다가 언제 쌓게?”
“난 그런거 필요없어. 대장님이 늦게 왔으니 빨리 가서 도와주고 싶어.”
“넌 자존심도 없냐?”
“자존심도 없다니? 그게 무슨말이야?”
“까고 말해서 대장님 좋아서 그러는거잖아. 그런다고 대장님이 받아줄것 같아? 니 얼굴을 생각해. 너 같은 스타일을 대장님이 좋아하겠냐? 가뜩이나 울고불고 매달리는 여자들도 많을텐데? 내가 보장한다. 넌 아마 어장관리만 당하다 끝날거야. 그리고 또 혹시 모르지. 널 우습게 여기고 이용해먹을지도.”
하나가 상처받건 아파하건 상관없이 모질게 말했다. 그렇게해서라도 그녀를 설득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났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 신우주보다 애 같고, 타인을 험담하는 남자라는 인상만 각인시켜준것 같았다.
하나가 미간을 좁히며 박찬우를 물끄러미 쏘아보았다.
“대장님은 그런 사람 아니라고 전에도 몇번 말했지? 넌 모르겠지만 우린 대화도 많이 나눴어. 니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달라. 빨리 이거 놔. 대장님에 대한 험담은 더 듣기 싫어.”
“남자는 다 짐승이라고!”
찬우가 윽박지르는 순간, 하나가 그의 가슴을 두 손으로 힘껏 밀쳤다.
그러자 그가 힘없이 뒤로 두 발자국 밀려났다.
하나가 두 손으로 핸들을 잡으며 차갑게 말했다.
“그럼 너도 남자니까 짐승이겠네. 니 말도 믿으면 안될것 같아.”
부우웅!
그녀는 미련없이 떠나버렸다.
“야! 유하나!”
그 뒤에 대고 소리를 쳐봤지만 소용없었다. 슈퍼바이크의 기운찬 소리가 점점 사라져 갔고, 이윽고 휑한 거리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하나가 사라진 방향을 넋놓고 바라보던 찬우에게 문득 바람에 실려온 종이 쪼가리가 뺨에 철썩 달라붙었다.
“이건 뭐야 씨팔!”
뺨에 붙은 종이 쪼가리를 쥐고 바닥에 내팽게치면서 있는대로 성질을 부렸다.
“뭔짓을 해도 안된다. 뭔짓을!”
참으로 답답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돌리기란 이토록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도무지 기회를 안준다. 파고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마치 철벽 같았다. 그러면서 지가 아쉬울땐 실컷 이용해먹고 필요없을땐 무참히 버림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쁜년!”
이 순간 하나가 밉고, 괜스레 우주도 미웠다.
우주에게 딱히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그가 그동안 자신에게 무척이나 잘해주었고, 불만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여자 문제가 꼬여버리니 어쩔 수 없었다. 가장 조급한 사람이 먼저 비겁해질 뿐이다.
그러니 우주가 좋더라도 싫었다. 그의 평소 성품이 존경할만하고 올바르더라도 가면 갈수록, 그 행동 하나하나를 속으로 트집 잡으며 얄밉고 꼴보기 싫어지기만 했다.
“차라리 죽었으면!”
터져나오는 괴수의 비명과 핏자국.
그리고 사방으로 날리는 마크.
도망치려고 애를 쓰는 돌연변이 생물을 노리고 우주가 빔 라이플을 쏜다.
빔을 맞은 녀석들은 차례로 숨이 끊기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줄리엣, 사냥 통계 수치를 보여줘.”
<알겠습니다.>
1위 오성그룹: 임현주 70 / 문주희 40 / ......
2위 제네틱스: 신우주 50 / ......
3위 .......
제네틱스 내에서는 어느새 1위로 올랐지만 아직 임현주를 따라잡지 못했다. 또한 오성그룹이 여전히 1위라는 건, 수라들의 포인트를 모두 더한 수치인 기업 포인트 역시 뒤쳐지고 있었다.
“누님 실력이 정말 장난 아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