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현아가 입을 쌜쭉이며 덥썩 카드를 내밀었다.
우주가 카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건 뭐야?”
“롯데 백화점 스페셜 상품권이야. 집에 뭐가 필요한지 몰라서 그냥 상품권으로 해왔어. 천만원 넣어뒀으니까 필요한거 있으면 백화점에 가서 사. 너도 그게 편하고 좋잖아. 그치?”
현아가 기분 좋은 얼굴로 말을 했지만, 우주는 속으로 불편했다. 이번 집들이를 준비하면서 자신이 경솔했다는 것을 께달았다. 레지스트 쉴드에서 함께 일을 하는 동료들의 선물은 받기가 부담될 정도로 그 액수가 컸다. 이럴줄 알았으면 선물은 절대 해오지 말라고 당부해둘 것을 그랬다.
하지만 각종 경조비라는 게, 자신이 받은 만큼 어차피 남들한테 도로 돌려줘야 한다. 특히 결혼식 축의금이 그렇다. 우주는 현아가 나중에 시집을 가게되면 그때 축의금으로 1천만원쯤 주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카드를 가뿐하게 받았다.
우주는 그녀에게 해맑게 웃어 보였다.
“고맙다. 다음에 너희집 집들이 할때나 무슨 행사 있을때 나도 꼭 불러줘.”
“그건 걱정하지마. 내 생일때도 꼭 부를테니까 매년 오도록 해. 알았지?”
“알았다.”
현아 다음으로는 하나가 왔다. 따뜻해보이는 원피스를 입고 온 그녀는 제 키만한 거대한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왔는데, 그 안에는 아기 기저귀부터 해서 유모차, 신생아 의류, 신생아 완구 같은 각종 유아용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 이게 다 뭐란 말이오?”
가방 안을 들여다 본 우주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에 하나가 기쁜듯이 웃으며 말했다.
“전에 동거하시는 분께서 임신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앗.”
우주는 하나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집 2층으로 후다닥 뛰어올라갔다. 그녀가 가져온 유아용품 가방까지 덩달아 가지고 갔다.
그 광경을 찬우가 파티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정해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질투했다.
‘2층에 올라가서 무엇을 할 생각이지? 그리고 저 가방 안에 있던건 대체 뭐길래 대장님이 저토록 도망치듯 올라간 것일까? 두 사람만의 추억이 깃든 물건? 아니면 섹스용품?’
그는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우주란 인간은 겉으로는 자신과 하나가 잘되기를 바란다면서 속으로는 딴 생각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하나를 갖고 싶으면서 밀어준답시고 좋은 형처럼 굴기는!’
우주가 차라리 솔직하게 나서서 자신과 경쟁을 하려면 하고, 하나가 마음에 안들어서 빠지려면 확실하게 빠지면 모를까, 저런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그가 가식적인 인간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면을 쓴 위선자!’
찬우의 마음속이 부글부글 들끓고 있는 동안, 장내는 저마다 소근대는 소리로 조금 소란스러웠다. 모두가 한결같이 분홍빛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료코를 흘끗흘끗 바라보며 쑥덕거리는 중이었다. 단아하게 음식을 나르는 그녀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저기 저 여자는 누구지? 우주 씨 여동생인가?”
“설마 그럴라구. 그런데 배 보니까 임신한것 같은데?”
“누구 애일까? 신우주?”
“설마 그렇겠냐. 우주 씨 아직 결혼 안했잖아.”
“사고 쳤을수도 있지.”
“연예인들 모르냐? 저 배 나온거 봐봐. 적어도 네 달 이상인데 저렇게 될동안 결혼 안하는 연예인 봤어? 사고친 즉시 임신 첫달에 바로 결혼한다.”
“그럼 역시 여동생이나 누나인가? 먼저 결혼했는갑네.”
“왜 꼭 그렇게만 생각하냐? 뜬금없이 출장뷔페 직원일수도 있어. 우주 씨랑 아무 관련없는 사람일 수도 있지. 출장뷔페 사장 와이프 말이야.”
료코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파티룸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이목을 끌며 알게 모르게 그들의 부러움과 환심을 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드라마 감독 조현기와 CF 감독 조현상은 '임신만 안했어도...!' 하고 동시에 안타까워 하며 혀를 찼다. 두 사람이 보기에 료코가 연예계 신인으로 데뷔하면 대박을 칠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잠시일뿐, 그녀의 부른 배를 보며 빛처럼 빠르게 포기했다.
***
“이런 선물은 가능하면 조심히 갖고 오시오. 남들이 볼까 두렵소.”
2층으로 올라온 우주는 하나가 가져온 유아용품 가방을 자기 방에 던져놓고는 문을 닫았다.
하나가 자기 머리를 주먹으로 살짝쿵 치면서 베시시 웃었다.
“미안해요. 제가 실수했어요.”
“미안해 할 것 없소이다. 아무도 안봤으니 다행이오. 우린 어서 내려갑시다. 또 손님이 올거요.”
우주가 부랴부랴 서둘러 내려가려고 했다.
하나가 무언가 굉장히 아쉬운 얼굴로 계단에서 그를 뒤따라 내려오면서 물었다.
“저기. 제가 뭐 도와드릴거는 없어요? 저 서빙 같은거 잘해요.”
“괜찮소. 마실 것좀 달래서 1층의 파티장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사람들이 다 오면 얼른 저녁을 준비하겠소이다.”
“전 그, 뭐라도 돕고 싶은데...”
“아니오. 신경쓰지 마시오.”
우주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뒤도 안돌아보고 손만 저었다.
하나에게는 그런 모습이 어쩐지 자신에게 무심해 보였다.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한때 폭스네이크도 같이 잡고, 악어팀에서도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데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면 안되는 것일까?
그녀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오늘 우주의 집을 처음 방문한다고 한껏 들떠있었는데, 막상 와보니 기대와 달라서 조금 슬펐다.
1층으로 내려온 우주는 정원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고, 하나는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홀로 파티룸에 들어섰다. 그녀가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찬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위에서 뭐했어? 둘이?”
그는 둘이란 것을 특히 강조해서 물었다.
가뜩이나 상심해있던 하나는 그를 보자마자 짜증이 울컥 솟구쳤다. 그렇잖아도 자신이 항상 우주와 만나고 나면 늘 버릇처럼 다가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며 자꾸 캐묻는 그에게 싫증이 나려던 참이었다. 찬우에게 마치 애정결핍 증세가 있는 것 같고, 집착도 심한 것 같고, 심지어 그가 찌질이처럼 보일지경이었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알아서 뭐하게?”
“내가 알면 안돼?”
“니가 뭔데? 우리 아버지야?”
찬우는 조금 당황해 하며, 오늘 처음보자 마자 무작정 성을 내는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괜스레 뺨 맞은 것 같아 어안이 벙벙한 그에게 하나가 곧바로 되물었다.
“너야말로 왜? 왜 매일 이것저것 캐묻고 난리인데? 변태야? 스토커야?”
“뭐 변태? 스토커?”
찬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답답하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다. 오늘 유하나 아버지 한 번 해볼란다. 그래서 뭔 얘기했는데? 손님 주제에 네가 거길 왜 올라갔어?”
“손님?”
하나가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찬우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넌 손님이겠지만, 난 손님 따위가 아니야. 이해 못해?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대장님과 특별한 사이니까 이 집에서도 남들과 다른 대우를 받을 수 있단 소리야.”
“아주 귀족나셨네.”
하나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찬우는 실실대며 비아냥 댔다. 아주 못된 말을 해서 그녀를 이 자리에서 울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뭐. 2층에 가서 둘이 키스라도 하셨쎄요?”
“했다면?”
“뭐라고?”
환청이 아닐까 하면서 찬우의 눈이 커졌다. 21년째 여성과 입맞춤도 못해본 그로서는 짝사랑 상대가 다른 남자와 키스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이었다.
그녀를 원망하듯이 노려보았다.
“너 창녀야?”
“너 말조심해.”
“창녀가 아니면 아무 남자하고 키스할 수 있어? 그리고 지금 집들이 하잖아. 분위기 파악도 못해? 왜 이렇게 가볍게 몸을 놀리는데? 너네 사겨? 그것도 아니잖아.”
하나는 표정이 잔뜩 굳은 채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쳤다.
퍽.
찬우는 힘없이 뒷걸음질 쳤다. 그래도 계속 말했다. 그는 부릅뜬 눈으로 서빙 중인 료코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사람 보이지? 저 배 보여? 저 뱃속에 누구의 아기가 들어있는줄 알아?”
하나가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료코를 바라보았다. 료코는 정신없이 흰 테이블에 음식을 갖다놓는 중이었다.
“신우주의 애야. 저 여자가 대장님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알아 들어?”
진실 여부는 상관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사람들끼리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고, 료코가 우주의 애를 임신했는지, 그의 여동생인지 누나인지, 아니면 출장뷔페 직원인지, 그런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 우주의 가치를 떨어뜨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의 말을 듣고 그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녀는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을 했다.
“저 뱃속의 아기가 대장님의 아기라도 좋아. 난 그래도 그를 사랑해.”
“허......”
찬우는 어이가 없었다.
‘씨발! 요즘 젊은 여자들은 하나 같이 돈 많은 유부남만 좋아한다더니!’
온몸에서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여자가 그의 아기를 임신했는데도 좋다고...?”
“좋아해. 아니 사랑해.”
“미친년.”
찬우는 중얼거리듯이 그런 말을 내뱉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파티룸을 빠져나갔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 하나의 입에서 나온 참담한 말이 자꾸만 귀에 아른거려 그를 더욱 화나게 만들고 절망에 빠뜨리게 했다.
‘애가 있는 유부남도 괜찮다고? 미쳤어. 진짜 미친거야. 하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그때까지 손님을 마중하던 우주가 문득 대문쪽으로 걸어나가는 그를 발견하고는 다가가 붙잡고 물었다.
“어디 가시오?”
찬우는 쳐다보지도 않고 앞만보고 대답했다. 그 눈빛은 얼음장 처럼 차가웠고, 또 슬펐고, 그리고 독기가 서려있었다.
“잠시 집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놓고 온게 있어서요.”
“아하 중요한건가 보군. 그렇다면 얼른 다녀오시오. 이제 더 올 손님도 없고, 모두와 함께 집안을 둘러본 뒤 곧 식사 시간을 가질 예정이니까.”
“예, 그러죠.”
***
찬우는 인근 도로로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 타고 왕십리에 도착했다.
양쪽으로 차들이 즐비하게 주차되어 있는 주택가 골목길. 택시에서 내렸더니 검정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집앞에 몰려있었다.
찬우는 그들이 누군지 안다. 그들을 개의치 않고 지나쳐 대문 앞에 서자 문을 가로막고 있던 사내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대문을 열었다.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왔다.
널따란 거실에는 두 사람의 경호원이 서 있었고, 유카타를 입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 소파에 앉아 찬우의 아버지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노인은 바로 다코오 하시도루.
이 집에는 몇 달만의 방문이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찬우에게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왔느냐. 하시도루 어른께서 네게 할 말이 있어 찾아오셨다는구나. 한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다.”
찬우의 성은 본래 박 씨가 아니라 이 씨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일제강점기시대 매국노였던 이완구의 대를 잇는 가문이었다.
100년 전 이완구는 다코오 마츠다이라와 긴밀한 공생관계를 구축했었고, 그것은 광복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그 후손 간에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매국노 이완구의 혈통임을 극도로 혐오했던 찬우는 집에서는 이 씨로 불렸지만 밖에서는 일부러 자신을 박 씨라 알리고 다녔었다.
찬우는 서재로 이동해서 하시도루와 면담을 가졌다.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불쑥 찾아오게 되었다.)”
하시도루는 온화한 표정을 지었지만, 찬우는 옅은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찬우에게는 반일 감정이 피어올라 있었고, 한때 조선 침략의 정점에 섰던 다코오 가문과 가깝게 지내는 가문의 현실이 그를 괴롭게했다.
“(제가 할일이요? 아무것도 없는 제게 어르신께서 부탁할일이 있으십니까?)”
“(있다.)”
하시도루는 여유롭게 찻잔을 집어 입가로 가져다댔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 작품 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