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8권>
데이트는 순조로웠다. 오전 10시에 예매한 영화를 보고,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명동 거리를 돌아다니다 평소 우주가 가보고 싶었던 경복궁에도 가봤다.
그 다음 인사동 거리를 찾았다가 청계천을 쭉 걷고 나서 남산 케이블카를 타보고 어두워질 즈음 술집을 찾는, 마치 서울에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이나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나 할 법한 대표적인 관광 코스를 그대로 밟아나갔다. 두 사람은 중간에 몇 번인가 오가는 행인들에게 변장을 들킬뻔한 위험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차분하게 잘 대처했다.
애당초 우주가 생각해낸게 이런 장소뿐이었다. 그는 데이트가 처음이라 종일 뭘하며 지내야 할지 몰랐고, 하물며 바쁜 일정과 유명세 때문에 한가로이 놀러다녀본적도 없기에 서울에 뭐가 있는지, 지하철은 어떻게 타는지, 또 맛집은 어디어딘지 그런건 전혀 몰랐다. 그저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낸 코스였다.
그에 반해 하나는 학생때 전부 와본 곳이지만 그럼에도 기뻐했다. 그녀는 데이트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우주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즐거웠다.
“오늘 만큼은 하루가 무진장 길었으면 좋겠어요. 24시간이 아닌 2만 4천시간...”
그녀와 나란히 걸어가며 함께 술집을 찾던 우주도 방긋 웃어보였다.
“소생도 간만에 밖에 나오니 즐겁기 그지없소. 아, 잠시 사진 좀 찍어 주시오.”
우주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사진을 찍어달라며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어둠이 깔린 밤.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한 그의 뒤로 저 멀리 남산타워가 드라마틱한 불빛을 내뿜고 우뚝 서 있었다.
찰칵 하고 우주가 찍은 뒤에 이어서 하나도 찍겠다고 나섰다. 그녀의 휴대폰을 받아든 우주는 휴대폰의 배경화면을 보고 문득 눈에 들어오는 희한한 문구를 발견했다.
“남자를 절대 믿어서는 아니된다...?”
어째서인지 자신을 향한 말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우주는 사진을 찍고 나서 휴대폰 배경화면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말이오?”
“아, 이거요. 저희 고조할머니께서 집안의 여자들한테만 가훈으로 남긴 말인데 정말 공감가는 말 같아서요. 그래서 휴대폰에 등록해놨어요.”
“소생도 믿지 못하는 거요?”
하나가 웃었다.
“아니요. 우주 씨는 저한테 특별한 사람이예요. 다른 남자들과 달라요. 제가 성폭행을 당할 위기때 구해주기도 하셨잖아요. 우주 씨만은 철썩같이 믿고 있으니 안심해주세요.”
우주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찬우를 그토록 거부했었던건가?
그는 물었다.
“그, 낭자의 고조할머님은 남자한테 크게 배신이라도 당했었나 보오?”
“음... 맞아요. 제가 듣기로는 사랑했던 남자에게 배신 당하고 많이 슬퍼하셨다고 전해 들었어요.”
하나의 말을 듣고 우주는 웃어보였다.
“그래도 다행이외다. 고조할머님께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셨으니 이렇게 예쁜 하나 낭자가 태어난 것이 아니겠소.”
“원래는 못할뻔 했는데 저희 증조할머니께서 말씀해주시길, 모 양반가의 안방마님께서 강제로 결혼을 시켜주셨데요. 본래 그쪽 양반가에도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어쩌다 일본으로 떠나게 되면서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희 고조할머니가 그 집 수양딸로 들어갔고, 그 집 안방마님이 손자를 봤으면 좋겠다 싶다며 저희 고조할아버지인 윤씨 가문의 둘째 아들분과 억지로 결혼을 시킨거래요.”
“그랬었군...”
우주는 남일처럼 전해 들으며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사진을 찍고나서 곧바로 식당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종일 들뜬 마음으로 데이트를 즐겼던 하나는 오늘이 바로 승부라고 생각했다. 그와 술 한잔을 한 뒤 정식으로 고백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오늘이 오기만을 바라며 많은 고민을 했다. 찬우 때문인지, 우주가 최근 자신에게 차갑게 대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되든 안되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점점 좋아지고있는데, 그는 나와 점점 멀어지는 현실. 그것이 무척 싫고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러나 용기도 없고 자신감도 없다. 연애한적도 한 번 없다. 성격도 소심하고 그 앞에 서면 목소리가 크게 나올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과감하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고깃집에서 우주가 소주 1병 분량을 마실동안 그녀는 3병을 마셨다.
너무나 두근거려서 미칠 것만 같았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이 덜덜 떨려왔다.
그러나 밤이라서 그런지 감성이 풍부해지고 왠지 성공할 것만 같은 괜한 기대감이 밀려왔다. 그런 들뜬 기분이 그녀를 더더욱 부추겼다.
우주의 차로 향하는 골목길. 그녀는 술에 취한척 우주의 어깨에 살포시 몸을 기댔다.
“근처 모텔에 가서 잠시 쉬었다 가면 안될까요...?”
모텔에 가자는 건 고백할 장소를 갖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순전히 그를 떠보려는 의도였다. 그가 모텔에 가서 자신을 덮쳐주면 그저 감사했다. 심장 떨리는 고백을 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말이다.
“집까지 가는게 많이 힘드오?”
“차 타기가 힘들어요. 술을 많이 마셔서 인지 머리가 무척 아프고 어지러워요. 이런 상태로 차를 탔다간 중간에 멀미가 나서 토할지도 모르겠어요.”
“헛.”
우주는 순간 시트에 묻을 그것들이 상상되었다.
끔찍했다.
“그럼 근처에 호텔이 있나 찾아봅시다. 낭자는 내 직장동료니까 이왕이면 좋은곳에서 쉬게 해주고 싶소.”
하나는 꽤나 힘든척,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말했다.
“아니예요. 전 모텔도 상관없어요.”
“괜찮으니 사양마시오. 여차하면 하룻밤 자야할 수도 있으니 호텔에서 자시오. 모텔에 두고 갈 순 없소. 내 특2급 이상으로 찾아보리다.”
“그런 곳은 신분증을 검사를 할 수도 있어요. 작은 모텔이나 여인숙도 좋으니 글루 가요.”
이때 하나가 참 순진했던게, 우주와 같이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들키면 차라리 더 좋을뻔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약아빠졌던 그녀가 아니였고, 내심 우주를 걱정하다보니 무심코 그런 말을 해버렸다.
우주는 스마트폰으로 주변 호텔을 검색하려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무릎을 탁 치며 옳다커니 말했다.
“어쩔 수 없군. 그럼 모텔이나 여인숙으로 갑시다.”
한편, 그로부터 멀지않은 장소였다.
유흥가가 밀집한 장소에 있던 찬우. 그는 우주의 집들이날 이후로 매일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개처럼 술만 퍼마셔대는 중이었다.
하시도루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였다. 고민은 고뇌가되고 날이 갈수록 그를 병들게 했다.
그러던 차에 찬우는 우연히 유료주차장에 세워져있는 우주의 페라리를 보게 되었다. 며칠 전 우주의 차고에서 봤던 차량인데다, 대한민국에 단 한 대뿐인 차량이었으니 차주가 누구인지는 안봐도 뻔했다.
몸을 비틀거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차창을 통해 차안을 살펴봤다. 곧 그를 당혹케했던 것은 조수석에 놓여진 붉은 목도리였다.
하나를 짝사랑하던 그였으니 목도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머릿속에 즉시 떠올랐다. 게다가 저 목도리를 사준건 바로 자신이었다. 300만원짜리!
그는 눈을 부릅뜨며 주변을 정처없이 뛰어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으슥한 골목에서 허름한 모텔에 들어가는 하나와 우주를 발견해냈다. 두 사람은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 철저히 변장했지만, 찬우의 눈썰미 앞에서는 어림없었다. 특히 하나의 복장만큼은 평소 그녀의 스토커나 다름없었던 그로서는 알아내기 손쉬웠다.
“저 잡것들이 기어코오...! 씨바아알!”
찬우는 두 주먹에 힘을주며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차오르는 분노는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축적되는 분노가 미칠것 같은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다 죽여버리겠어! 발정난 개씨발좆같은 개호구씨발년놈들 다죽여버리겠어!”
찬우는 즉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하시도루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가더니 이내 전화를 받는다.
-생각해봤느냐?
“예, 어르신.”
-할 수 있겠느냐?
찬우는 자못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실성한 것처럼 킥킥 웃었다. 하시도루는 그저 바늘로 콕 하고 풍선을 찔렀을 뿐이다. 풍선이 터지면서 갈데없이 고여있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질 줄이야,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하겠습니다. 신우주건 뭐건 다 죽여버릴랍니다. 조센징들 이거 안되겠어요. 계집이건 놈이건 예의도 없고, 그냥 모조리 잡아다 족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이 빌어먹을 세상, 이제 다 바꾸고 저도 속편히 살렵니다. 갖고 싶은 여자 다 갖으면서요.”
***
하나는 모텔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눈을 감고 피곤한척, 정신이 없는척 신음을 냈다. 이를 틈타 우주가 자신을 덮쳐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몇분이 지나도 그럴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슬쩍 눈을 떠보면 우주는 TV를 보며 따뜻한 커피를 타와 훌쩍 마시고 있었다. 다 마시고 나서는 빈컵을 쓰레기 통에 던져 넣고는 벗었던 목도리와 모자를 쓰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어디 가세요?”
“아, 일어나셨구려. 낭자는 오늘 여기서 쉬시오. 소생은 내일 아침 일찍 오겠소.”
“여기서 안주무실려구요?”
우주가 손목시계를 보더니 대답했다.
“집에 가서 할일도 있고, 외박은 잘 안하는 편이오.”
“아무리 그래도 술드셨는데 주무시고 가시는게 나을텐데... 음주운전은 위험해요.”
“염려 놓으시오. 대리운전 불러서 갈 생각이니.”
우주는 미소를 지어보인뒤 곧바로 현관으로 걸어나가려고 했다.
“잠시만요!”
하나가 서둘러 침대에서 걸어나왔다. 신발을 신으려던 우주가 뒤를 돌아봤다.
“음? 더 필요한거 있으시오?”
“그...”
하나가 우물쭈물 거렸다. 초조하고 떨렸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말했다.
“오늘 같이 있어주시면 좋겠는데...”
“......?”
우주는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쓰고 있던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는 뒤돌아 서서 대답했다.
“미안하오. 집에 일이 있어서...”
“좋아한다구요!”
결국, 고백해버렸다. 오늘이 아니면 안될것 같았고, 단 둘이 있게된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 흥분해버렸다.
“저 사실, 우주 씨를 전부터 좋아했어요. 진심 죽을만큼 사랑해요. 그러니 오늘 제발 같이 있어주세요. 네? 저한테 무슨짓을 해도 좋아요. 여기 있어주세요. 네?”
애원하듯이 그에게 매달려보지만 정작 돌아오는 것은 냉담한 반응이었다.
우주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나직하게 대답했다.
“고맙소. 나 같은 호구를 좋아해줘서 정말로 고맙소. 하지만 소생은 낭자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소이다. 미안하오.”
“제가 예쁘지 않아서 그래요?”
“그게 아니오. 낭자는 충분히 예쁘다오. 다만, 직장동료 그 이상으로 마음이 가지 않았을 뿐이외다.”
“......!”
우주는 차갑게 문을 열고 나갔다.
홀로 남겨진 하나는 멍하니 굳어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좌절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회사에서 어떻게 보지 하는 생각도 덩달아 들었다.
그 후 하나는 모텔을 나섰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하늘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밤은 평소보다 더 추웠다. 바람에 피부가 베이는 것 같고, 따뜻하게 입은 옷속 깊숙이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녀는 하염없이 길을 걸었다. 마음은 만신창이처럼 찢어진 상태였다. 그나마 제대로 하는 일이라고는 정처없이 걷는 일뿐이었다. 그러다 길바닥에 풀썩 쓰러졌는데, 대체 언제부터 쓰러져 있었는지 자신도 알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넋이 나가있었다.
눈이 하늘하늘 내려와 그녀를 덮었다.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은 그녀를 취객으로 알고 말을 걸어보기도 했고, 그녀가 눈만 멍하니 뜬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모피코트를 입은 어떤 중년여인이 불쑥 나타나 씨익 웃으며 처량한 몰골의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여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찾고 있었습니다 유하나 씨.”
중년여인은 수행원을 시켜 자신의 차에 하나를 태웠다.
눈내리는 도로를 달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화려한 주택이었다.
어느새 정신을 잃은 하나를 수행원이 업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중년여인은 가정부들을 시켜 그녀를 대충 씻기고 침대에 눕혀 밤새 돌보게 했다.
다음날 아침.
마침내 눈을 뜬 하나는 신라그룹 이선주 회장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눈을 껌벅이면서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 제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거죠?”
이선주는 다리를 꼬며 웃었다.
“그 전에 어젯밤 무슨일이라도 있었나요?”
“어젯밤이요? 어젯밤이라면...”
순간 하나의 머릿속에 우주가 떠올랐다. 그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던 그 광경이 생각나면서 그녀는 괴로운듯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일도... 없었습니다.”
============================ 작품 후기 ============================
킵=ㅗ드는 전에 쓰던 것이 ㅈ=ㅗㅎ아서 인터넷을=ㅗ ㄸ=ㅗ 구5매했습니다. 내일 ㅇ=ㅗㄹ것 같아요[.
그릭=ㅗ ㅇ=ㅗ늘 연재부5ㄴ은 친구5에게 킵=ㅗ드 빌려서 쓰력=ㅗ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피씨방을 갔당=ㅘㅆ습니다. ㅎ 3년만에 피씨방 갔당=ㅘㅆ어요[.
역시 피씨방 커피가 제일 맛있더구5ㄴ요[.
그릭=ㅗ 찬우5오=ㅏ 하싣=ㅗ루5의 ㄱ=ㅘㄴ계는 뜬금없닥=ㅗ 생각하실 수5ㄷ=ㅗ 있으시겠습니다.
제가 124편 4page에 슬쩍 내비치기는 했는데, ㅂ=ㅗㄱ선을 더 깔아두5었으면 ㅈ=ㅗㅎ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갑자기 나오=ㄴ건 아닉=ㅗ 몇달전부5터 생각해두었으니 안심해주5셨으면 합니다.
언제나 해피엔딩을=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