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170화 (170/285)

170화

그녀의 대답을 듣고나서 이선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고 싶은 생각은 없어보였다.

“어젯밤 길가에 쓰러져 있던 하나 씨를 발견하고 우리집으로 데려왔습니다. 하나 씨의 집이 어딘지도 모르니 데려올 곳이라고는 여기 밖에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아... 그랬었군요. 신세를 졌습니다. 감사해요. 전 이만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나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 그녀를 이선주가 일어나서 말렸다.

“더 있다 가셔도 좋습니다. 마침 하나 씨와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저와 할 얘기요?”

이선주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 씨의 인생에서 큰 기회가 될 수도 있지요.”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웃어보인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장황한 설명을 거쳐 30분동안 계속 되었고, 하나의 실력을 추켜세우거나 신라그룹의 비전 등 이것저것 잔가지를 쳐내고 핵심만 짚으면 요점은 하나였다. 이선주는 높은 액수의 연봉으로 하나를 영입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5년 계약에 첫해 300억원으로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제네틱스에서 100억원을 받는 것을 감안할때 무려 3배나 상승한 커다란 금액이다. 게다가 부장급 직책을 준 뒤 신라그룹 본사에 개인 사무실을 차려주고 전담 비서 2명까지 붙여주겠다고 말했다.

또 업무의 연장선으로 주말 골프장 이용권도 일부 제공해주고, 하나의 가족들이 신라병원에서 건강진단과 치료 등을 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의료서비스도 제공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하나는 레지스트 쉴드에서 일한지 이제 1년차 되는 수라다. 법적으로 신입 수라는 무조건 1년 단기 계약만 맺게 되어있다. 이는 목숨을 담보로 한 직업이니만큼 수라가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시절, 기업이 행하는 노예 계약을 법적으로 막아주고 우대해 주기 위한 정부 차원의 배려였다.

한마디로 말해 1년을 다 채우고 난 뒤 FA시장으로 나와 몸값을 더 올려 받고, 원하는 곳으로 이직할 수 있다는 소리다.

하나는 작년 3월에 제네틱스에 입사했으며 같은해 6월에 활동을 시작한 우주보다 3개월 빨리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2월달인 지금, 그녀는 곧 FA시장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애당초 제네틱스는 그녀가 우주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고 그래서 악어팀으로 차출했다.

재계약을 믿어 의심치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찬우가 꼬이고, 그로인해 마음이 조급했던 그녀가 우주한테 고백하고 차이게 될줄 누가 알았으랴.

“좋습니다. 신라그룹으로 가겠습니다.”

상심이 컸던 하나는 사리분별을 구분못하고 이선주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그녀는 변해야 했고, 달라져서 우주에게 보란듯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동거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언론에는 싱글이라고 속이며 사는 주제에 왜 나는 안돼? 뒤에서는 할것 다하면서 왜 나한테는 그렇게 안해주는 거야? 내가 그 정도로 매력이 없던거야? 그 동거녀보다 못했던거야?’

분했다.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모텔을 가자고 했는데, 그곳에서 차였다. 세상 어느남자가 여자를 모텔에 놔두고 집에 갈수 있겠는가!

‘날 지금까지 여자로 생각 안했던 거야? 나만 매일 끙끙 앓고 한숨을 쉬었던 거야? 그렇게 내가 쉽게 보였어?’

솔직히 회사에 출근해서 우주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아마 그 마음이 더 컸던것 같다. 하나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우주를 죽어라 원망했다. 모든게 우주의 잘못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이렇게 되었다고 원망하고 또 증오했다.

마침 휴가기간이 끝나는 3월초가 그녀와 제네틱스의 계약기간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이대로 출근을 하지않고 신라그룹과 계약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나는 그날 오후 집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우그신 까페(우수에 찬 그 남자 신우주) 회원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까페 폐쇄 신청을 했다.

그녀는 변했다. 이제 예전의 유하나가 아니었다. 방안에 붙였던 우주의 브로마이드도 전부 찢어서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다.

하나가 생각할때 우주는 평범한 여자한테는 관심없는것 같았다. 한소라나 료코처럼 재력있고 예쁜 여성들만 좋아하는것 같다고 분통을 터뜨리며 이를 갈았다.

“그럼 나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여자가 되어주겠어!”

그녀는 신라그룹에서 제일 잘나가는 수라가 되어 우주가 후회하게끔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우주를 철저히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가 잘나가는 꼴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다른 여자를 만나 행복을 누릴 수 없도록 방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절박한 순간에 자신을 찾아와 미안해라고 하는 말을 꼭 듣고 싶었다.

며칠 후.

이선주는 하나를 데리고 신라그룹 로봇 연구소를 찾았다.

하나는 그곳에서 남궁철민 박사를 만났다.

남궁철민 박사는 눈을 번뜩이며 그간 궁금해했던 맹수의 핵심 기술을 하나에게 일일이 물어보았다. 그녀는 아는 한도 내에서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심지어 부족한 부분은 제네틱스 로봇공학 연구소의 전지연 박사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는척 기술을 빼내오기도 하고, 맹수 생산 라인을 방문해 몰래 사진을 찍어오기까지했다. 이는 하나가 맹수 정비공 보직을 맡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맹수의 기술 유출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고, 하나는 자신을 가꾸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녀는 변신해야만 했다.

지금까지의 순진하고 바보같은 이미지를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었다. 전과는 다른 새로운 유하나. 자신감 있고 매력넘치는 유하나. 그녀는 그것을 바라고 조직재생공학연구소를 찾았다.

성형수술이긴 하지만 일반인들은 꿈도 꾸지 못할 성형수술이었다. 비용만 100억이 들었다. 가슴을 A컵에서 D컵으로 만들고, 158이던 키를 다리뼈의 성장판을 늘려 170까지 만들었다.

또, 그동안 묶고 다니던 머리도 풀렀다. 허리까지 닿도록 길게 길렀다. 게다가 차영웅과 이태평이 받았던 신체강화 실험까지 받고 말았다.

모든 성형이 끝나고 나자, 하나는 더 이상 예전의 유하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외모와 성격을 비롯해 양심까지 팔아치우며 기존의 모든 것을 버리며 새로 태어났고, 눈빛에는 감정이 없었으며 도도하고 차갑기 그지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버틸 수가 없었다.

스스로 살기 위해서 해버린 몸부림이었다.

***

2011년 2월.

하나가 우주에게서 떠나갈 무렵, 다른쪽에선 우주를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을 진행중이었다.

하시도루는 제네틱스 본사를 찾아 한규만 회장과 만났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신문속 사진에는 우주의 집들이에 찾아온 소라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이었다.

“(회장님의 따님에게 신세기 프로젝트를 맡기기에는 불안해 보입니다. 예전에 신우주와 스캔들이 난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그의 집들이에도 찾아갔었다고 하더군요. 이쯤되다보니 서로 정분을 통하고 있는건 아닌지 심히 우려됩니다.

물론, 신우주가 제네틱스에서 가장 우수한 수라이기에 챙긴다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전 이렇게 생각하는데 회장님께서는 어떠십니까?)”

한규만 회장은 사진을 보고 나더니 웃어보였다.

“(그렇잖아도 이번 임원인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소라를 경영운영본부장에서 해직시키고 다른 부서로 발령낼 생각이었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하시도루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턱을 어루만졌다.

“(그 자리를 메꿀만한 인물이 있습니까?)”

“(제 첫째딸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소영 양은 현재 미국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일부로 귀국할것입니다. 그간 나도 소라와 신우주의 관계를 우려했기에 특단의 조치를 취했지요. 신세기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

하시도루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소영 양이 온다면 악어팀의 구조조정은 필연이겠군요.)”

한규만 회장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대답한다.

“(악어팀은 곧 신우주 빼고 다 바뀔겝니다. 그러니 하시도루님께서는 편한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하시지요.)”

***

그날 오후.

제네틱스는 2011년 정기 임원 인사를 발표했다. 그 중 가장 눈에 띈것은 소라의 인사이동이었다. 그녀는 제네틱스 경영운영본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제네스 호텔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겉으로만 보면 그녀는 승진했다. 부사장을 건너뛰고 곧바로 사장 자리로 승진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인사이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론은 그녀의 인사이동에 관해서 몇달 전 신우주 납치 사건을 미연에 방지 못한 문책성 인사라고 꼬집었다. 한 기업의 수라 집단을 관리, 운영하는 경영운영본부장이란 자리는 비록 직책은 낮으나 사장급과 맞먹을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기업의 레지스트 쉴드 생산활동은 무척이나 중요했고, 그러한 연유로 뛰어나고 영리한 사람만을 자리에 앉히거나 해당 기업의 실세만이 맡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경영운영본부장직에서 물러났다는 것은 사실상 실세에서 멀어졌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소라는 하루 아침에 제네틱스의 경영에 간섭할 수 없고, 그 계열사인 제네스 호텔이나 잘 꾸려나가야할 처지가 되었다.

이는 한규만 회장과 하시도루, 두 세력이 연합하여 그녀를 일방적으로 밀어낸 결과였다. 소라를 지지하는 경영진들은 이렇다할 힘을 쓸수가 없었다.

소라는 분개했지만 참담한 심정으로 결과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인정 받지 못한 분노, 경영진들에게 무시받은 분노, 모든 원흉인 하시도루에 대한 분노가 가슴속 깊이 자리했지만, 자신의 뒤를 이을 경영운영본부장의 이름을 듣고는 순간 힘이 빠지며 저항없이 물러났다.

다음날 오전 인천공항.

햇빛이 눈부실 정도로 맑았지만 날씨가 쌀쌀했다.

소라의 친언니인 한소영이 미국에서 귀국했다.

제네틱스에서 마중나온 다수의 직원과 경호원들이 입국장에서 그녀를 에두르며 반갑게 환영해주었다.

“귀국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본부장님!”

“잘오셨습니다!”

“제네틱스의 미래를 이끌어 주십시오!”

한 남성 직원이 나서서 꽃목걸이를 목에 걸어주려고 했다.

“......?”

넓은 챙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낀 소영이 손바닥을 펴보이며 다가오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이 이벤트 기획자 누구죠?”

“예?”

“누가 공항에서 이렇게 소란스럽게 굴라고 했나요. 책임자 나오세요.”

정장차림의 중년남성이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직원중에서 제일 상급자였다.

“접니다 본부장님...”

“시간 낭비, 인력 낭비, 꽃목걸이는 회사돈으로 구입한거겠죠? 당신은 낭비벽이 심하군요. 기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부로 책상 빼세요.”

소영은 그렇게 말하고나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후에 부장직을 맡고 있던 중년남성의 책상은 사무실에서 곧장 사라졌고, 그는 매일 회사 내 직원휴게실로 출근하며 동료들의 동정어린 시선과 회사측의 퇴직압박을 감내하다 못해 한달만에 그만두었다.

소영이 경영운영본부장직을 맡게되면서 악어팀의 구조조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제네틱스를 떠나 신라그룹으로 이직했고, 신우주, 박찬우, 리영애를 제외한 한성일을 비롯해 기존 악어팀원들은 전원 다른팀으로 편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주의 반발을 산것은 당연했다. 그는 당장 제네틱스 본사를 찾아 소영의 집무실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오!”

“뭐하는 짓이라니요?”

“악어팀원을 왜 멋대로 교체한거요!”

“그야 회사의 미래를 위해서였지요.”

“미래? 미래는 개뿔 웃기지 마시오! 도대체 뭐가 마음에 안들었던 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