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책상에 앉아있던 소영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두소리를 내며 우주에게 다가가더니 뒷짐을 지고 작은 원을 그리듯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당신의 상급자로서 마음대로 못합니까? 악어팀 편성 권한이 팀의 리더인 당신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저희 임원진들에게 있습니까?”
“물론 당신들한테 있는건 아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소! 적어도 나와 상의를 해야할 것이 아니오!”
그녀가 피식 웃었다.
“왜 당신하고 상의를 해야하죠?”
“그걸 말이라고 하오? 내가 이끌던 악어팀이었소! 애써 조직을 다져놨더니 하루아침에 다 자르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더 능력있는 자들로 편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주주들도 모두 동의 했구요.”
“나는 동의 한적이 없소!”
“우주 씨의 지분이 1%가 있긴 하지만 찬반투표에 밀린걸 어쩝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주주총회에서 찬반투표를 왜 했냐는거요! 애당초 하지 말았어야 할것 아니오! 팀장인 내 의견은 완전히 묵살한 채 당신들 경영진끼리만 결정하지 않았소!”
“회사 운영에 불만이 있으신건 이해합니다만, 악어팀이 더 잘되기 위해서라도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군요.”
“빌어먹을 제네틱스!”
우주가 너무 열받은 나머지 소영 앞에서 욕설을 퍼부었다.
소영이 조금 기가 찬 얼굴을 지으며 웃었다.
“회사 그만두시게요?”
“까짓거 때려치우리다! 젠장할!”
“음...”
우주가 성을 내도 소영은 상당히 침착했다. 도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다리를 꼬우며 우주를 지그시 응시했다.
“우주 씨와 우리 제네틱스와의 계약기간이 아직 2개월여가 남았다는건 잘 아시지요? 남은 기간을 다 채워야 1년 경력을 인정받고 FA시장에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 그 전에 회사를 그만두면 앞으로 5년간은 다른 기업에 입사하지 못함과 동시에 우리 회사로 부터 고소까지 당하게 되실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사실 그녀의 말은 우주에게 별로 문제가 되질 못했다. 그런건 신경쓰지 않는 남자였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게 있었으니 신세기 프로젝트만큼은 놓치기가 싫었다.
무슨일이 있어도 마츠다이라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했다. 그가 만약 회사를 그만두거나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면 마츠다이라는 순순히 깨어날 것이고 활개를 치고 다닐것이 뻔했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아니면 악어팀을 그만두고 다른팀으로 가실래요? 원한다면 고려해보겠습니다.”
“......”
우주는 주먹을 불끈 쥐며 침묵했다. 일단 참아야했다. 순식간에 소라가 인사이동을 당하고, 악어팀 대부분이 교체되는 수난을 겪어 상당히 발끈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그저 발톱을 숨기고 평양 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 목적만 달성하면 이따위 제네틱스 언제든지 나가주마!’
우주는 뒤로 돌았다. 그대로 걸어 나가면서 승질을 부렸다. 그에게 있어서 제네틱스와의 관계가 파국에 치달은 것과 다름없었다. 더 이상 정붙일 것도 없고 존중해줄 필요도 없어보였다.
“개판 오분전 같으니라고!”
그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집무실에 앉아있던 소영은 계속 문쪽을 바라보며 그를 괘씸하게 여겼다.
“인성 부족, 교양 부족, 여성을 대하는 매너 부족, 자제력 부족 등등, 우리 기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남자로군. 아버지의 말씀만 아니었어도 당장 책상을 빼버렸을 텐데.”
제네틱스 본사를 나온 우주는 그 길로 자신이 갖고 있던 주식을 전부 처분하기 시작했다. 제네틱스 화학의 주가는 한창 최고조에 올라 있는 시기였으며 전량 처분하고 나면 수중에 대략 1500억원이라는 목돈이 생길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컴퓨터를 붙잡고 한창 주식을 파는 와중에 찬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받아보니 다짜고짜 화를 냈다.
-왜 하나를 놔준것입니까! 하나는 대장님을 좋아했다구요! 대장님만 붙잡았어도 제네틱스를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
우주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하나가 제네틱스를 떠난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굳이 말리지 않았던 것은 자신도 머지 않아 제네틱스를 떠날 것이기에 차마 말릴 수 없었다. 그저 새로운 곳에 가서 적응 잘하고 잘지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우주는 되도록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말했잖소. 난 하나 낭자와 아무런 관계가 아니오.”
-거짓말! 며칠 전에 두 사람이 모텔에 들어가는 것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시죠!
우주가 뜨끔했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쉬다갈 생각에 잠시 들른 것 뿐이오. 오해 마시오.”
-그걸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툭 까놓고 말해서 실컷 따먹고 버린 거잖습니까!
찬우의 집.
찬우는 씩씩대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하나를 떠나보낸 우주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다른 기업으로 가게되면 이제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든다. 찬우는 그게 너무 아쉬웠다. 그녀가 아무리 자신을 싫어한다지만 항상 곁에서 지켜보고 싶은 미련이 남아 있었다. 또 자신의 활약을 지켜봐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제 아무것도 못하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수백번 전화해봤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건 수신거부 메세지일 뿐이고, 집까지 찾아가봤지만 그녀는 이미 서울 내 모오피스텔을 얻어 집에서 독립했다는 말을 그녀의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
그는 죽도록 답답했다.
“이제 정말 그 길뿐이네. 하나를 곁에 두려면...”
***
3월 초.
우주가 수희가 함께 주연을 맡은 드라마는 대박을 쳤고, 매회 시청율이 30%에 육박할 정도로 연일 고공행진을 이어나갔다.
우주는 주식을 내다 판 돈과 드라마와 관련된 활동으로 버는 수입을 족족 소민에게 갖다주었고, 소민은 회사 설립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2주 뒤였다. 2주 뒤면 우주와 소민의 공동회사가 설립되는 날이다.
우주는 새롭게 탈바꿈한 악어팀의 첫임무를 며칠 앞두고 소라와 집에서 만났다. 이제 호텔 사장님이 된 소라는 전보다 더욱 기품있어보이고 성격도 차분해진 느낌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우주를 걱정하며 악어팀에서 빠지기를 권했다. 하시도루의 술책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에 우주가 대답했다.
“소생도 알고 있소. 낭자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것과 악어팀원들을 교체한 것 등 전부 그놈의 수작이라 여기고 있소.”
“알면서 왜 하려는 거예요?”
“평양에 가려면 맹수가 필요하고 맹수를 보유한 기업은 제네틱스 뿐이오. 게다가 신세기 프로젝트를 막기 위해선 꼭 악어팀에 남아있어야만 하지 않겠소.”
“우주 씨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더구나 이번 악어팀원으로 편성된 인물들의 신원을 살펴봤어요?”
“봤소이다. 거진 대부분이 하시도루와 학연지연으로 엮인 사람들의 자제가 많더군.”
“당신에게 해를 입힐지도 몰라요.”
우주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레지스트 쉴드 내에서 만큼은 그 누구도 내게 해를 입히지 못하오.”
“여동생 때문이에요?”
“그렇소이다. 우리 막내는 소생이 곤경에 빠질라치면 항상 날 구해주었소.”
우주는 자신과 세이비어의 관계를 소라에게 모두 말해준 적이 있다.
그는 이어서 화제를 돌렸다. 사면초가 같은 시점에 이르러서야 이젠 말할때가 된것 같았다. 지금 말하면 소라에게 통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설립할 생각이요.”
“회사라니?”
“이번 일이 끝나면 제네틱스에서 나와 회사를 차릴 생각이오. 당신도 이제 없고.”
“전에 말했던 걸 정말로 하려고요?”
“그렇소.”
우주는 일찍이 소라에게 함께 회사를 차리자고 제안했지만, 소라가 거절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다툰적이 있다.
“......”
소라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전과 많이 달랐다. 경영운영본부장 자리에 있었다면 펄쩍 뛰었을 일이지만, 실세에서 물러난 상황에서는 제네틱스에 관한 일이 남일처럼 들렸다. 더구나 믿었던 아버지에게 크게 실망하고 자신의 자리를 꿰찬 언니가 미운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우주는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며 말을 이었다.
“이 기회에 당신도 호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소? 내 회사로 들어와 아버지와 언니를 상대로 당신의 본실력을 보여주란 말이오.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기만 할 생각이오?”
“하지만...”
“하지만이 뭐요 하지만이. 이건 고민할 것도 없소이다. 당장 때려치우시오.”
소라는 막연히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한참동안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결심을 굳힌듯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좋아요. 저도 함께 가겠어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
소라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우주가 미소를 짓고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며 따뜻하게 포옹을 해주었다.
“지금 소개해줄 사람이 있소.”
“소개해줄 사람이요?”
“보고 놀라거나 화내지 마시오.”
“누군데요? 료코?”
우주가 뒤를 돌아보더니 방쪽을 쳐다본다.
“이제 됐소!”
소라의 시선이 방쪽을 향했다.
방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료코와 함께 난데없이 소민이 나타났다.
살짝 웃고 있는 소민을 바라본 소라는 우주를 쳐다보며 어이 없어 하다가도 곧바로 화를냈다.
“대체 이게 무슨일이죠?”
“우리의 동업자요.”
“동업자? 우주 씨의 회사에 소민이도 참여한다는 건가요?”
“그렇소이다.”
“말도 안돼. 절대 용납 못해요.”
소라는 핸드백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우주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소민 낭자도 당신과 같은 처지요! 다니던 회사에서 내몰렸고, 다시금 재기를 노리고 있소! 게다가 이젠 서로 적도 아니잖소!”
“내가 아무리 좌천됐다지만 이렇게까지 비굴하고 구차하게 다시 일어설것 같아요?”
“비굴하지도 않고 구차하지도 않소!”
소라가 손으로 소민을 가리켰다.
“저년은 대체 언제 만나고 다닌거예요!”
“말해줄테니 가만히 앉아서 들어보시오!”
“듣긴 뭘 들어요! 보나마나 거짓말로 일관하겠지!”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들어봐야 아는것 아니야? 평소에 너 답지 않게 신중하지가 않네.”
소민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소라에 비해 무척이나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덧붙였다.
“서로 쫓겨난 사람들끼리.”
소라가 소민을 쳐다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쫓겨난 사람들?”
“둘 다 쫓겨났으니 맞는 말이잖아? 설마 사장 같지도 않은 사장으로 승진했다고 부정할 생각이니?”
소라가 코웃음을 쳤다.
“너 아주 기가 살았구나?”
“우주 씨 덕분에 기 좀 살았어. 그동안 꼭꼭 숨겨오느라 애 좀 먹었지만.”
“숨겨와...?”
소라는 우주와 소민을 번갈아 노려보며 인상을 썼다.
그러면서 속으로 화를 가라앉히고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이윽고 소민에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일인지 이야기 좀 한 번 들어봐야겠네.”
우주와 료코는 자리를 피해주었다. 소라와 소민 사이의 이야기는 길었다. 대화는 집안사에서부터 자신들이 경영운영본부장이었을때의 일, 서로에 대한 솔직한 생각까지 속시원히 털어놓았다.
중간에 료코가 술과 안주를 갖다주니 이야기는 더욱 길어졌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소라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소민과는 한때 서로 경쟁자의 위치에 서 있었지만 지금은 둘 다 발톱 잃은 호랑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로 인해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소민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였다.
더욱이 그녀는 레지스트 쉴드 사업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보란듯이 회사를 키울 욕심도 조금씩 솟구쳤다.
============================ 작품 후기 ============================
12월 23~26일은 제가 소설을 못쓸것 같아서 지금 비축분을 열심히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그때 예약 걸어놓고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화 군인 200명 문제는... '지켜봐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