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173화 (173/285)

173화

눈이 부셨다. 코앞에는 밝은 빛에 둘러 싸인 막내가 생긋 웃으며 서 있었다. 알몸인 그녀는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

우주는 얼굴을 찡그리고 손으로 눈을 가리고 싶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자신의 몸에 수많은 애벌레가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각이 둔해지고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곧게 누운 채로 눈동자만 움직여 막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항상 꿈속에서만 만났던 막내이건만,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우주는 힘없이 입술을 열었다.

“와줄줄 알았다...”

“뭐야, 이젠 놀라지도 않는거야?”

막내가 웃으면서 핀잔을 주었다.

“이번에는 완전히 죽는다고 생각했어.”

“오라버니가 죽긴 왜 죽어. 어머니와 같은 지구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라구.”

“어머니와 같은 지구...”

우주는 지난날의 기억을 곱씹었다. 그가 여태껏 막내와 나누었던 이야기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데바가 되어버린 료코와 미라, 일전에 소민과의 만남에서 그녀가 말해주었던 레지스트 쉴드의 자원을 발판 삼아 나아가려는 인류의 우주를 향한 도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붕괴에 관한 이야기들이 짧게 스쳐지나갔다.

“지구는 어째서 날 선택한거지...?”

“아마도 나 때문이 아닐까?”

막내는 자신을 가리켰다.

우주가 되물었다.

“그렇게 말해주었어?”

“아니. 나와 지구는 정신적인 교감만 할뿐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 해본적은 없어.”

“하지만 나는...”

우주는 밤하늘을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이어 말했다.

“혼자서는 전세계에 나타날 사탄들을 모두 막아낼 수 없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이라도 있는게냐?”

막내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없어.”

“없으면 어쩌려구.”

“어머니와 같은 지구가 오라버니에게 맡긴 역할은 인류의 인도자야. 혼자서 사탄과 맞서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 그저 인류가 생존할 방향만 제시해주면 그만일뿐이야.”

“어떻게...?”

“간단해. 전처럼 사탄을 잡아서 그들의 피와 가죽으로 인류가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돼.”

“새로운 사탄을 상대하기에는 내 힘이 턱없이 부족해. 동료들의 도움이 없으면...”

“글쎄? 그건 나중이 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이야 혼자지만.”

“나중에?”

“어머니와 같은 지구가 준 힘을 잘 이용해봐. 오라버니에게 큰 힘이 될만한 동료들을 얻을 수 있을거야.”

“그 힘이란게 혹시...”

우주는 잠시 말을 주저했다. 친여동생에게 이런 말을 꺼낸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물었다.

“내 정자로 여성이 임신하면 데바가 될 수 있는거 말이냐? 지구가 그렇게 한거야?”

“맞았어.”

막내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우주는 누운 채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그거라니. 그거로는 어디가서 말도 못하겠다. 하필이면 왜 그런 힘을...”

“어머니와 같은 지구는 우리 인간과 생각하는게 달라. 종의 번식에 큰 의미를 두고 있어. 태초의 아담과 이브에 관한 이야기처럼 오라버니로 인해 인간은 한층더 진화해 나갈 것이고, 지구는 앞으로 몇년이 아닌 백년, 천년, 만년, 그리고 그 이후까지 내다보는거야. 사실 데바로 각성한 인간들은 현재 지구의 먹이 사슬 중에서 최상위 포식자에 군림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 최상위 포식자는 다른 종의 개체수에 영향을 미칠게 분명하고 아버지와 같은 지구는 당연하게도 이를 탐탁치 않아해.”

“인간이 최상위 포식자가 된다면, 인류의 욕심에 의하여 다른 종들의 멸종이 가속화 될텐데 어머니와 같은 지구는 어째서...?”

“안심해. 그런 일은 쉽게 발생하지 않아. 오라버니가 제 아무리 노력한다쳐도 100년 안에 전 인류를 오라버니의 후손으로 데바화 시킬 수 있을까? 지금부터 여자를 열심히 만나고 다닌다 해도 어림없을거야. 최대한 많이 잡아줘도 오라버니의 데바화된 후손은 채 500명도 안될걸? 전세계 각 국가가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 이상 말이지.”

우주의 머릿속에서 번쩍 하고 스치는 것이 있었다.

‘909 울트라프로젝트...’

막내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게다가 아버지와 같은 지구로 인해 곧 전세계 바다가 방사능으로 오염될 것이고, 그 안에서 기존의 종들이 진화를 이루거나 새로운 종들이 출현하게 될거야. 그렇게 되면 인류가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해. 몇 년 후에는 새로운 종들이 나타나 최상위 포식자가 될 것이고 데바의 초능력만으로 생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세상이되겠지. 인류는 다시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새로운 도구를 발명하게 될거야.”

“그럼 조만간 지금보다 더 힘든 세상이 온다는 것이냐.”

“그렇게 되겠지.”

우주가 막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그의 몸은 처음부터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제 할일을 다한 구더기들은 땅밑으로 기어들어갔고 우주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그제서야 사방에 꿈틀 거리는 구더기들을 보고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벌레들이 왜 이렇게 많은거냐?”

“징그럽지?”

“한때는 식량으로 삼았던 것들이야. 징그럽다기 보다는, 아니 혹시 내 살을 파먹고 있던게냐?”

우주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즉시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막내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 반대야. 벌레들이 오라버니의 몸을 단숨에 회복시켜주었어.”

“정말? 구더기한테 그런 능력이 있었다니 놀랍군.”

“구더기와 외형은 비슷하지만 다른거야. 지구의 외핵에서 주로 살지만 오라버니를 살리기 위해 지상까지 올라온 녀석들이지. 여태 목격한 이라고는 오라버니 밖에 없어서 아직 이름은 없지만 외핵충이라고 하면 적당한 이름이 되려나?”

“외핵충이라.”

우주는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해보고 가만히 서서 목을 돌리기도 하였다. 모든게 정상이었다.

“오라버니의 친구가 오고 있어. 난 이만 가봐야할 것 같아.”

“친구?”

“보면 알거야.”

막내는 밝은 미소와 함께 곧 사라졌다. 낮처럼 밝았던 공간이 다시 어두워졌다.

“대장동무!”

맹수를 착용한 영애가 비탈길을 내려왔다. 그녀는 절벽에서 떨어진 우주를 찾기위해서 한참을 찾아헤매고 있었다.

“여기있소!”

“대장동무! 괜찮으신겁네까!”

우주를 발견한 영애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칼에 맞은 곳은 어찌되었습네까?”

“운좋게도 칼에 빗겨 맞았소. 아무이상없소이다.”

영애는 우주의 몸을 살펴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 그럼 내래 잘못보았나보구만요. 가슴을 꿰뚫었다고 생각했습네다.”

“다행히도 그러진 않았소. 그런데 영애 낭자는 박도령과 한편이 아니었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네까! 내래 서운합니다! 대장동무가 절벽에서 떨어지고 나서 박찬우 그 간나새끼에게 달려들긴 했는데 워낙 개놈들이 많아야지요. 어쩔 수 없이 저도 절벽에서 뛰어내렸습네다.”

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거 실례했소이다. 소생은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했소.”

“한번 더 그러시면 내래 삐질거라우. 정말 충격이었습네다.”

“다신 안그러겠소이다. 그런데 맹수의 동력은 많이 남아있소?”

맹수가 있으면 전방주둔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영애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거 이제 버려야겠습네다. 동력이 1%도 안남은 상태에서 대장동무를 간신히 찾은겁네다.”

“그렇소이까.”

영애는 바닥에 누워 맹수를 착용해제했다.

그녀가 일어나자 우주가 급히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얼른 서두릅시다. 마츠다이라가 깨어났소. 서둘러 전방주둔지로 떠납시다. 갈길이 멀다오.”

“마츠다이라라니요? 사람 이름 입네까?”

“사람이라고 하기엔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이오. 그저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망령이외다. 녀석은 지금 헛된 망상을 꿈꾸고 있소. 당장가서 그것을 막아야 하오.”

“마츠다이라인지 뭔지 그 아새끼에 관한건 잘모르겠습네다만, 우선은 박찬우 그 간나새끼 먼저 조지러 가야하지 않겠습네까?”

“박 도령은 그저 그자의 끄나풀일 뿐이오. 제일 두려운 자는 마츠다이라요. 무슨일이 있더라도 첫번째로 척결해야할 대상이외다.”

영애는 권총과 전투단검 등을 정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을 잘모르다 보니 저로서는 도무지 감이 안잡힙네다. 그냥 대장동무가 하라는데로 따라가겠습네다. 일단 출발하시지요.”

“가면서 설명 해주리다. 우선 위로 올라가서 동굴 앞에 타고 갈만한 것이 없는지 찾아봅시다. 여기서 전방주둔지까지 걸어가기엔 길이 너무 멀다오.”

두 사람은 덩굴식물을 밧줄 삼아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오른 뒤, 마츠다이라가 봉인되어 있던 동굴에 들렸다.

우주는 그 안을 대충 훑어본뒤 분한 마음에 이를 갈았다.

“내가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면...!”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까지 머리에 계속 물음표를 달고 있던 영애가 물었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일본군인의 시체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근데 이 많은 관은 뭐고 또 죽은 아새끼들은 왜놈 새끼들이 맞습네까?”

“그렇소. 그것도 수십년 전 이 땅을 침략했던 전범(戰犯)들이오. 하나같이 능지처참을 당해 죽어 마땅한 자들이지.”

“어째서 아직까지 살아있었던 겁네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길다오. 간략적인 것만 설명해주리다.”

이후 동굴에서 나와 악어팀이 머물렀던 장소로 향했다.

탈만한 것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잡초만 무성히 자란 넓은 공터에는 휑한 바람만 불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슈퍼바이크라도 한대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없어서 크게 아쉬웠다. 촌각을 다투는 마당에 평양에서 전방주둔지까지 걸어간다는건 최소 하루는 걸릴것 같았다.

아니 하루가 뭐람. 무기도 없이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가는 길에 돌연변이 생물이나 사탄을 만난다면 시간이 지체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영애가 옆에 서 있던 우주를 쳐다보았다.

“이를 어쩐담. 어카겠습네까 대장동무. 걸어갑네까?”

우주는 말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료코였다. 시간은 이틀이나 지났고, 다시금 깨어난 마츠다이라가 그녀를 내버려둘리가 없었다. 게다가 임신한 몸이다. 곧 출산을 앞둔 그녀가 제 실력을 뽐내며 제대로 저항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큰일이다. 서둘러야해!”

우주는 초조하고 혼란스러웠다.

마음이 급했다.

“뛰어갑시다!”

그는 냅다 뛰었다.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영애도 곧바로 그 뒤를 쫓았다. 그러나 우주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점점 거리가 벌어지자 영애가 소리쳤다.

“대장동무! 같이 갑세다!”

“천천히 오시오!”

“천천히가 아니고 무기도 없이 혼자서 어쩌시렵네까! 이런 상황에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않겄습네까! 혼자 그렇게 무작정 가다가 돌연 괴수라도 만나면 그건 그것대로 또 늦어 질겁네다!”

우주는 조금 더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뛰어오는 영애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그녀에게 향해 있었지만 더 좋은 수가 없을까 하고 머릿속으로 열심히 궁리하는 투였다.

조금 숨이 찬 영애가 그 앞에서 멈춰섰다.

“제 말이 맞지요? 헉, 헉. 여긴 위험 지역이고 꼭 같이 가야 할겁네다.”

“소생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역시 영애 낭자가 걱정이오.”

“제가 짐짝이란 말씀이십네까?”

“그런 뜻으로 말한건 아니외다. 마음이 급하긴 하나 낭자를 홀로 남겨두는 것도 또 그렇소.”

“그게 짐짝이란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십네까. 내래 이래봬도 북조선에 있을 당시 전투력 측정 1등했던 여자입네다. 무시하지 마시디요.”

영애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두고 보시라우. 절대 뒤쳐지지 않겄습네다!”

우주는 점점 멀어지는 영애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영애가 뛰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날래 뒤쫓아와보시라우! 본떼를 보여주갔습네다!”

“좋소! 서로 힘내봅시다!”

우주도 뛰기 시작했다. 그녀와 보조를 맞추며 나란히 내달렸다.

새벽이 지나고 해가 뜨기 시작했다. 그동안 반도 못갔다. 평양에서 전방주둔지까지의 거리는 대략 150km.

멀었다.

두 사람은 지친나머지 이제 걸었다.

영애는 우주를 바짝 뒤따라오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시선은 바닥에 향해 있었다. 몇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고 이제 막 걷기 시작해서 그런지 숨을 가다듬느라 정신없어보였다.

“대장동무. 좀 쉬어가시디요. 어차피 수시간이 지났습네다. 마츠다이라인가 하는 작자가 도발을 일으키려 했으면 벌써 했고, 못했으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겁네다. 왜이리 날래가시려는 겁네까?”

우주는 앞을 보고 걸으며 대답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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