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는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화요일에 받았습니다. ㅋㅋ 174화
“그건 둘째 문제요. 지금 크게 걱정하는건 소생이 데리고 있는 여성이 위험하다오. 조금도 멈출 수 없소이다.”
“데리고 있는 여성이라면 혹시 여자친구 말씀이십네까?”
그 질문에는 우주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러다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영애는 자신을 돌아보는줄 알고 그를 빤히 마주보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상공을 바라봤다. 저 멀리 세이비어가 떠있는 장소였다.
“뭘 보고 계시는 겁네까...?”
“또다시 우리를 도와주면 좋겠소.”
“네? 도와주다니요?”
“그런게 있소.”
영애로서는 도통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우주는 그저 상공에 떠있는 세이비어를 묵묵히 주시하기만 했다.
대체 무엇을 바라고 계속 주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그에 관한 대답을 곧 알 수 있었다.
우주를 따라 세이비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영애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밝게 내려쬐는 햇살에 윤곽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세이비어를 등지고 한 마리의 거대한 새가 날개짓을 하며 자신들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
오전 9시.
소라는 아침 일찍 수원시 외곽의 한 정신병원을 찾았다. 현재 서울 전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였다. 4개 사단 병력이 투입되어 곳곳에 검문소가 설치되고 교통을 통제했다.
특히 야스쿠니 특공대의 테러에 일조한 한규만 회장과 한소영, 한소라 자매에게는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하지만 소라는 좁혀져오는 수사망을 피해 미꾸라지 같이 잘도 빠져 나갔다. 그녀가 수원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민의 협조 덕분이었으며 창성도 가담해 그녀를 호위했다.
오늘은 강미라가 퇴원겸 출소하는 날이다.
소라는 신세기 프로젝트가 성공하자 우주가 레지스트 쉴드에서 죽거나 행방불명되었다고 단정했으며 아버지인 한규만 회장이 저지른 행동의 여파가 자신까지 닿으리라 확신했다. 그녀는 즉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쓸만한 조력자를 찾아야만 했다. 그게 바로 강미라였다.
사라진 우주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이 자유로워지고 나서 부터가 먼저였다. 그래야만 전력을 다 할 수가 있었고 정부의 도움도 바랄 수 있었다.
따라서 미라를 설득해 모든 일의 원흉인 하시도루를 제거하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마츠다이라와 이완구의 목도 좋았다. 어떻게 해서든 대한민국 정부에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알려야만했다.
소라는 창성을 시켜 홀로 정신병원을 걸어나온 강미라를 자신의 승용차로 안내하게끔 했다.
미라는 신우주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창성을 순순히 따라나섰으며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라와 만났다.
“흐ㅡ음. 이게 뭘까요?”
미라는 소라가 건네준 사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네 장의 사진 속에는 마츠다이라와 이완구, 하시도루와 박찬우의 얼굴이 찍혀 있었다.
그들을 알턱이 없는 미라는 관심없다는 눈초리로 사진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소라를 쳐다보았다.
“이런거나 보자고 여기에 온게 아닐텐데.”
“이야기부터 들어보시죠.”
소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상대가 상대니 만큼 그녀는 내심 긴장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태연하게 보이려 최선을 다했다.
근 넉달만에 만난 미라는 전보다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 마치 아랫턱을 크게 벌린 채 소라의 얼굴을 꿀꺽 삼킨 뒤 목을 자르고 싶어하는 뱀처럼 미묘한 독기를 발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했던 점이 있었다. 소라가 우주에게 듣기로, 우주를 강간한 뒤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들었건만 임신 6개월째인데 배가 전혀 나오질 않고 있었다. 예전 모습 그대로 마르고 탄력있는 몸매였다.
“성격이 급하신것 같으니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죠. 그 사진속의 인간들이 레지스트 쉴드 안에서 우주 씨를 살해했고 그래서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거짓말.”
“사실입니다.”
“절보고 믿으라는건가요? 그 말을? 후후. 재밌네요. 농담이라면 잔인하고 사실이라면 놀랍네요. 그분이 죽었다니. 제가 믿을수 있을 만한 증거라도 있나요?”
“물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확실한 증거가 있죠.”
소라는 확신에 찬 대답을 한뒤 자신의 핸드백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동영상을 하나 찾아서 미라에게 보여주었다.
영상 안에는 우주가 나왔다.
미라는 우주를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 지었다.
“우상님!”
영상속의 우주가 말했다.
-미라 낭자. 나요 신우주. 낭자가 이 동영상을 봤다는것은 그땐 내가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걸테요. (중략) 소라 낭자를 도와 마츠다이라의 야망을 꼭 저지해주기를 바라겠소. 낭자의 힘이 절실하다오. 부디 도와주시오.
영상이 끝나자 미라의 시선이 잠시 아래를 향했다.
우주가 사망했다는 사실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소라에게 말했다.
“우상님이 죽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아마 살해위협을 피하려다 조난을 당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 느낄 수 있어요.”
소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명확히 알려면 레지스트 쉴드 안으로 조사팀을 보내서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방도가 없을겁니다.”
“그럼 제네틱스 인력을 동원해서 가보면 되겠네요. 준비가 되는대로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미라의 말에 소라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도 조사를 서두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나 현재 형편이 좋지 못합니다.”
“본부장님께 무슨 사정이라도 있나보군요?”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렇게 미라 씨를 찾아온 것입니다.”
소라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제네틱스, 야스쿠니 특공대, 서울 전역 계엄령, 레지스트 쉴드가 임시로 봉쇄되었다는 이야기를 전부 해주었다.
미라는 이야기를 전부 다 듣고 나서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누구도 상상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네요. 재밌네요 정말. 일본이 정말 미친거 아니면 무슨 배짱으로 이랬을까요?”
미라는 조금 전 소라가 건네준 네 장의 사진들을 다시 집어들었다. 사진 속 인물들의 생김새를 머릿속에 새겨넣으려는 듯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아무튼, 이 자들을 죽여야지만 레지스트 쉴드에 재출입이 가능하겠네요. 우리 우상님을 찾으려면.”
“네. 우주 씨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선 미라 씨의 도움이 각별히 필요합니다.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을테니 서로 손을 잡읍시다.”
미라는 시선을 돌려 차창밖을 쳐다보았다.
3월 후반에 접어든 거리 곳곳에는 화사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짧지만 긴 대화가 끝난 후 소라가 먼저 차를 타고 떠났다.
차에서 내린 미라는 다시 정신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 달간 사용하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 한켠에 놓인 짐과 한 개의 알을 보았다.
알.
타조알 보다 큰 타원형 알은 그녀와 우주의 아기였다.
그녀는 알을 포근하게 안은뒤 껍질에 뺨을 비비며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가야.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단다.”
미라의 변신은 순식간이었다. 흰자가 있을 공간이 노란 빛을 띄고 있고, 동공의 모양이 길쭉하게 변했다. 그녀는 눈 깜짝할 새에 파충류 인간이 되었다.
초록색 피부와 전신에 뱀비늘이 달라 붙어있었고 혀를 날름거리자 두 갈래로 갈라진 길다란 혀가 나왔다가 금세 들어간다.
미라는 두 손으로 조심히 알을 들어 올렸다.
“네 아버지를 만나러 갈 시간이야.”
꿀꺽.
미라의 입술과 턱이 쩌억 벌어지면서 알을 삼켰다.
삼켜진 알은 그녀의 목과 가슴을 지나 아랫배에 자리 잡았다.
***
마츠다이라가 최우선으로 내린 지시는 료코를 잡아오라는 일이었다.
야스쿠니 특공대가 집안으로 침입하자 위기를 느낀 료코는 전력을 다해 탈출을 하였고, 혈혈단신으로 이틀째 피신 중이었다.
그러나 정처없는 도피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마츠다이라가 직접 나서서 료코가 숨었다는 산을 이잡듯이 샅샅이 수색하고 마침내 한 민가에서 그녀를 찾아냈다.
심신이 지치고 피로해 있던 료코는 허무한 결투 끝에 이렇다할 저항도 못하고 포박당한 채 처량하게 끌려갔다.
마츠다이라가 근거지로 삼은 강남의 제네틱스 본사 건물.
이곳저곳 흙이 묻어 지저분해진 기모노를 입은 료코는 책상과 의자만 덩그라니 놓인 회색의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이마에서 비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끌려오는 내내 눈이 가려졌던 그녀는 여기가 어디인지 몰랐고, 임신상태에서 피로와 불안까지 겹쳐진 까닭에 가슴이 턱턱 막히며 제대로 숨을 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하아, 하아, 하아...”
그때 문이 벌컥하고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료코는 거칠게 몰아 쉬던 숨을 단숨에 삼키고 귀를 기울였다.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척만으로도 단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하오리와 하카마를 입은 마츠다이라는 크고 늠름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움직임은 재빠르고 유연하여 그 발걸음 소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또한 날카롭고 마침표를 찍은것 같은 검은 눈동자는 몹시 번쩍거려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 했으며 곧고 엄격한 입술은 한일자로 다물어져 있었다. 70을 넘긴지 이미 오래인데도 흰머리 하나 섞이지 않았은 그였다.
“(대일본제국의 번영을 위해 신진루이를 지옥끝까지 쫓아가 죽이라 일렀거늘 오히려 녀석의 좆집이 되다니 참으로 기가막힌 일이군.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어. 게다가 임신까지 하고 있다니.)”
마츠다이라의 눈빛에서 한순간 분노의 빛이 번뜩였으나 그는 특별히 화를 표출하지 않았다.
그는 여유로웠다. 현재의 전황이 자신들, 야스쿠니 특공대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했다.
청와대는 곧 점령 당할 것이고 세종시와 대전을 향해 두 번째 부대가 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번째 부대는 과거 친일파들의 후손들과 제네틱스의 기무팀이 뭉쳐 만든 완구특공대였다.
게다가 뉴욕의 UN 본부. 한국의 요청으로 열린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는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를 향해 '폭력행위를 자행한 자들은 책임을 지게 될 것' 이라며 군사력으로 보복하겠다는 매우 강경한 의지를 내비쳤으나 각 서방국들의 UN 대사들은 이에 대해 헛기침만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 테러 행위에 관해 일본을 공격 주체로 적시하지 않았으며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일본의 반응을 받아들이고 일본과 전혀 상관이 없는 무장 테러리스트들의 소행이라고 규정했다. 야스쿠니 특공대를 국적없는 무장단체로 취급하는 셈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비협조적 태도가 걸림돌이었다. 미국은 이번 사안을 대한민국과 무장단체간의 문제로 삼으며 방관으로 일관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국제적인 제재 움직임을 반대하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한국은 자국 내 야스쿠니 특공대의 테러 행위에 관해 국제사회의 문제가 아닌 한 국가, 한 지역에 국한된 문제로 치부되며 국제사회의 협력을 바랄 수가 없었다.
“(그래, 소감이 어떤가. 나라를 배신한 기분은?)”
“......”
마츠다이라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료코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일정하게 두들겼다. 그리고 료코의 부른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록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료코도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초조했다.
뱃속의 아기에게 해가 갈까 무척이나 두려웠다.
긴장으로 도배된 한 순간의 정적이 지나가고 그녀가 마른 침을 삼킬때쯤, 마츠다이라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쿠로가네 료코 소좌.)”
료코는 고개만 들어 반응할 뿐 이렇다할 대답이 없었다.
마츠다이라가 다시 말했다.
“(100여년 전의 자네는 그야말로 훌륭한 신민이었지. 누구보다 충성심이 강하고, 누구보다 실력이 뛰어났고, 누구보다도 강직했지.)”
하고 마츠다이라는 칭찬 같은 말을 꺼냈다.
============================ 작품 후기 ============================
전자책에서는 유하나란 이름이 아닌 윤혜진으로 개명됩니다.
윤혜진이 더 잘어울리는것 같아요.
처음 이 소설을 구상했을때 우주를 원망하는 역할을 소라가 맡을뻔했는데, (65화 마지막 페이지에서 66화 보시면 당시 제 의도를 유추해보실 수 있습니다.)한소라에서 유하나로 바꿨습니다.
하나는 우주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할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