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그러나 자네는 변질되었어. 그것도 사치코를 죽였던 신진루이에게 물들어 대일본제국의 신민과 천황폐하를 향해 반기를 들었지. 왜 그런 비극적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것이지? 하물며 적의 아이까지 임신을 하다니 한때 대일본제국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자라는게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는군. 자네가 신민이라는 것이 참으로 참담하고 치욕스럽기 그지없다네.)”
마츠다이라의 말투는 신랄하게 추궁하고 비웃는 듯 했으나 그 눈동자에 떠올라 있는 알 수 없는 기묘한 눈빛이 말투와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를테면 쓸쓸하다. 정이란게 무엇인가. 지난날 관심이 애정이 되고 연정을 품은 일이 있기는 하나, 마음뿐이었다.
그에게는 춘정(남녀간의 정욕)보다는 대일본제국의 세계재패에 대한 애착이 더욱 컸다.
“(내게 할 말이 있는가? 있다면 해보게.)”
“......”
정적이 흘렀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츠다이라와 대치한 료코는 이렇다할 대꾸없이 묵묵히 있기만 했다. 표정에서는 그 무엇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할말이 없다면 이쯤에서 해두지.)”
마츠다이라는 품속에 있던 약봉지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책상 위에 나란히 두었다.
“(소좌를 내치기에는 그 실력이 아까워. 약을 먹어 신진루이의 아이를 지울지 아니면 거부하고 할복을 할지 선택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대일본제국의 승전과 영광을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해주길 바랄뿐이야.)”
마츠다이라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료코에게 다가가 그녀의 눈을 가렸던 천과 손목의 밧줄을 풀어주었다.
오랜만의 재회라서 그럴까,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츠다이라는 뒤로 돌아섰다.
료코의 시선이 그를 뒤쫓았다. 음침한 형광등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드리웠다.
“(제 선택은 하나뿐입니다.)”
마츠다이라는 문을 열면서 그녀를 돌아봤다.
“(선택은 하나? 사람은 줄을 잘갈아타는 것도 능력이지. 조센징의 나라는 오늘밤으로서 끝이다. 내일 아침에는 이 땅의 심장부에 욱일승천기가 펄럭이게 될거란걸 명심해두게.)”
철컥.
마츠다이라가 나가면서 그대로 문이 닫혔다. 그가 떠나고 난뒤 홀로 남은 료코는 책상 위에 나란히 놓인 약봉지와 서슬퍼런 칼날을 두 눈에 담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고 이것저것 복잡한 찰나에 그녀는 문밖을 지키던 간수를 불렀다.
“(게 있느냐! 떠나는 길에 간단히 요기라도 하고 싶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조용히 떠날테니 내게 먹을 것을 가져오너라.)”
문에 달린 작은 유리로 간수가 대답했다.
“(그건 윗분들께 여쭤봐야 할일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간수는 서둘러 자신의 상관에게 무전을 했다.
북적거리는 사령관실.
CCTV로 방안의 료코를 감시하던 상관은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마츠다이라에게 다가갔다.
“(반성은 커녕 뜬금없이 먹을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만, 어쩌실련지요?)”
마츠다이라는 코웃음을 쳤다.
“(복잡할것도 없이 이미 결론이 난 것 같군. 요구하는대로 들어줘.)”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니 방심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시하라 중좌. 자네의 생각은 옳다. 나 또한 쿠로가네 소좌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생각은 없어. 식사를 갖다주되 독을 타도록.)”
“하!”
이시하라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다시 말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일단 문초실로 병사 여럿을 들여보내 철저한 감시하에 식사를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마츠다이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대로 해. 하나, 그녀는 이미 우리가 죄인을 심문하고 처리하는 방법에 관해서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나 내가 기른 개다. 식사중에 행여나 있을지 모를 도발에 넘어가지 않도록 병사들에게 단단히 이르도록.)”
“하!”
마츠다이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당장 청와대로 갈 생각이다. 의외로 조센징의 저항이 격렬한 모양이더군. 이대로 상황이 고착화되기 전에 점령을 서두를 생각이다. 내가 없는 동안 이곳의 통제를 부탁하지.)”
“(하! 맡겨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임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츠다이라님.)”
“(뭔가.)”
“(주제넘는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쿠로가네 소좌가 죽는 모습을 보지 않고 이대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마츠다이라는 관심 없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르던 개가 도살장에 끌려가 죽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주인은 흔치 않지.)”
“(예?)”
“(중좌는 자신이 키우던 개를 장사치에게 팔아본적이 있는가?)”
“(개를 키워본 적은 없습니다.)”
“(그럼 상상만이라도 해보게. 애지중지 키우며 꼬리치고 달려들었던 개가 장사꾼의 푸대 자루에 꽁꽁 싸매진 채 벽돌에 맞아 죽는 모습을 중좌 같으면 볼 수 있겠나?)”
“(보,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마츠다이라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똑같은거야.)”
동시에 일제 강점기 시대 군복을 차려입은 여성 한 명이 다가와 마츠다이라에게 호화로운 장식의 칼을 건넸다.
마츠다이라는 허리에 새 칼을 차고나서 이시하라의 한쪽 어깨를 토닥였다.
“(쿠로가네 소좌는 중좌에게 일임하겠다. 말끔히 처리 하도록.)”
“하!”
“(실수는 용납하지 않겠다.)”
“(하! 대일본제국의 부활이 멀지 않았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이사하라는 야스쿠니 특공대의 구호를 외치며 마츠다이라를 사령관실 문앞까지 배웅했다.
이후 마츠다이라는 휘하의 정예병을 이끌고 제네틱스 본사를 떠났다. 그는 40mm 유탄발사기와 50구경 기관총, 자주 로켓이 탑재된 장륜장갑차 3대를 비롯해 호주산 Bushmaster 기동차량 열대를 동원해 80여명의 병사를 싣고 움직였다.
이번에야말로 총공격을 감행해 청와대를 점거, 이세종 대통령을 인질로 삼을 작정이었다.
***
“(얼른 처먹고 끝내자.)”
제네틱스 본사 내 문초실.
료코의 눈앞에는 전투식량을 그릇에 담은 볶음밥과 된장국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제네틱스의 검은색 슈트를 입고 완전무장을 한 여섯 명의 사내들이 그녀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채 무섭게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식사를 즐기는 동안 잠시나마 피해줄 수는 없겠나?)”
지쳐보이는 몰골의 료코가 나직하게 묻자 여섯 명의 사내 중에 문쪽에 서 있던 자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우린 널 감시하기 위해서 이 안에 들어온 것이다. 괜한 수작 부릴 생각 하지말고 빨리 밥이나 처먹어. 이 대일본제국의 수치 같은 년!)”
성질이 급해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내를 향해 료코는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리 감시하라고 누가 시켰느냐. 난 조용히 밥만 먹고 싶었거늘.)”
“(니 똥이다.)”
“(말하는게 천박하군.)”
료코는 깊게 숨을 들이마쉬고 내쉰뒤 이어 말했다.
“(여유만만하신 마츠다이라님께서는 그분의 성격상 초조해보이는 이런짓은 안하실 것이고. 네 직속 상관이 누구지?)”
“(알것 없다.)”
“(내게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상관이 시키더냐? 그렇다면 네 상관은 날 두려워 하는가 보군. 죄인을 향해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도 못밝히는 간이 작은 사내야.)”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시하라 중좌 님이시다.)”
“(이시하라 라면 내 밑에 있던 이시하라 특무조장을 말하는건가?)”
“(중좌님께서 105년 전 특무조장이었는지 어떘는지는 내 알바가 아니다. 내가 지금 신경써야할 건 너니까 입닥치고 얼른 처먹기나해.)”
“(이런 일처리를 보아하니 그가 맞는가 보군. 녀석이 벌써 중좌 자리에 올랐다니 내가 봉인 되어 있는 동안 적지 않은 수훈을 세웠나 보구나. 재미있어.)”
료코는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랐다. 터진 입술에는 흐른 피가 말라 붙어있었다.
“(이시하라 중좌를 만나보고 싶군. 가능한가?)”
“(이 년이 자꾸 어따대고 부탁질이야!)”
사내가 소총을 들어 개머리판으로 료코를 치려는 찰나 삐빅 거리는 전자음이 들려왔다.
사내는 즉시 동작을 멈추고 왼쪽 귀에 꽂혀있는 소형 무전기를 통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시하라 중좌님께서는 네가 빨리 죽기를 바라신다. 대화를 거부하셨지. 그러니 시간을 벌려는등 허튼짓은 이제 그만두는게 좋을거야.)”
“(시간을 번다고? 착각하지 마라. 난 시간을 벌려는게 아니다. 단지, 붙잡힐 당시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기에 오래간만에 그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싶었을 뿐이지.)”
사내는 이를 드러내고 비웃어보였다.
“(아쉽게도 그런 생각은 너만 하는것 같군. 천하의 배신자년을 누가 만나주겠냐는 말이지.)”
이어 료코를 고깝게 쳐다보고 있던 다른 사내가 불평을 쏟아냈다.
“(그냥 죽이면 될걸 가지고 왜 밥까지 먹이는건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군. 이 꼴을 보라고. 일본인으로 태어난 주제에 조센징의 아이를 임신했다잖아. 이런년 가는길을 왜 챙겨주는거지?)”
료코는 가만히 그를 주시하다가 그의 억양을 알아채고 물었다.
“(너. 일본인이 아니군.)”
사내는 갑자기 윽박지르듯이 소리질렀다.
“(웃기지 마! 난 뼛속까지 일본인이다!)”
“(발음이 어눌한것을 보니 중국인 아니면 한국인이군. 아니, 한국인인가?)”
“(흥. 한국이라는 국적을 버린지는 오래다. 앞으로 내 조국은 대일본제국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무슨 원통한 일이라도 있었느냐?)”
그때 또 다른 사내가 그 사내를 만류했다.
“(어이, 그년의 꾀임에 넘어가지 말라고. 닥치고 식사나 하게 해.)”
“(아니! 이것만 말하고!)”
어처구니 없이 혼자 흥분한 사내는 답답한 보따리를 풀어내듯 료코를 향해 큰소리를 쳤다.
“(미개한 조센징들은 말이다! 어리석고 멍청한 DNA를 가졌으니까 일본에게 식민지배를 받은거야! 그들은 자신들의 미개함을 모른다! 선동 당하기 쉽고 깨우치려 노력할줄 모르는 민족이라구! 그런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다른 민족에게 또다시 지배를 받을뿐이지! 알겠냐!? 게다가 일본 같은 선진국에게 식민지배를 받는다면 그야말로 대환영이지! 일제 강점기 시대에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하고 있었던거라구!)”
“(식민지배를 받는게 당연하다고?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냐?)”
“(근대 일본의 토대를 만든 사카모토 료마 같은 인물이 또다시 일본에서 나올것이라 믿는다! 그 옛날 일본이 항구를 개방하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인 것은 정말로 신의 한수였지! 그들의 혜안은 전세계를 통틀어 그들이 우월한 유전자임을 증명시켜주는 것이었어!)”
“(한심한 남자로군.)”
“(뭣이라?)”
료코는 적나라하게 그를 비웃었다.
“(일본이 그토록 부러우냐?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은 항상 남의것을 부러워하고 실없이 허상만 쫓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럴싸한 수백가지 핑계를 생각해놓지. 너처럼.)”
“(이 개같은 년이!)”
사내는 총구를 료코의 자궁쪽으로 향했으나 그녀는 전혀 기죽지 않고 신랄한 비판을 계속했다.
“(그리고 조국을 배반한 너 같은 녀석들의 특징을 잘알지. 늘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어딜가나 똑같이 불평불만을 늘어놓거든. 지금은 일본이 마음에 들어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으로 붙었겠지만 머지 않아 염증을 느끼고 주구장창 불평만 해댈 녀석이다 너는.)”
“(네년도 똑같잖느냐! 감히 누구한테 훈계하는거야!)”
“(난 적어도 내 조국에 칼을 들이대진 않았다! 너 같은 개돼지놈은 당장 죽어 마땅해!)”
“지, 지랄말어! 그딴 소리 계속 할거면......!”
사내는 흥분을 주체 못해 한국말로 말하고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일부러 유도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던 료코는 자신을 향한 총구가 몸쪽으로 깊숙이 들어오자 재빨리 사내로부터 총을 낚아챘다.
“(이 죽어도 싼놈!)”
그녀는 개머리판으로 사내의 입을 세게 후려쳤다.
“쿠왁!”
사내는 이빨이 전부 으스러지며 잇몸에서 폭포수 같은 피를 토해냈다.
“아아악! 내 입! 내 입!”
“(제, 제기랄! 쏴! 쏴!)”
투다다다다! 투다다다다다다다!
당황한 사내들이 일제히 총을 갈겨댔지만 눈깜짝할 사이에 총구는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금속 재질로된 총을 매개로 그녀가 단숨에 엄청난 힘을 발하자 사내들은 모두 몸이 솟구치며 벽으로 튕겨져 나가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