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크악!”
“으악!”
“허억!”
료코는 더이상 마츠다이라가 알던 수준의 인물이 아니었다. 데바가 되어버린 그녀의 힘은 마츠다이라가 미처 깨닫지 못한 능력이었다.
불시의 공격을 받은 사내들은 모두 정신을 잃은채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헉, 헉...!”
그나마 남아있던 힘을 온힘을 다해 방출한 료코는 책상에 몸을 기대며 숨을 헐떡였다.
다시 힘겹게 일어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밥과 국 그릇을 벽을 향해 내팽게쳐버렸다.
“(요기를 채워 조금의 힘이라도 모으려 했거늘 역시 마츠다이라님인가. 빈틈이 없으시군. 독을 풀어놓다니. 붙잡혔을 당시 마른 목이라도 축여놓길 잘했어.)”
왜애애애애앵!
마츠다이라가 할복을 하라며 남기고 간 칼을 손에 쥔 순간 갑자기 귀청이 따가웠다.
건물 전체에 비상벨이 울리고 문밖을 지키던 병사들의 다급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이 활짝 열리며 슈트 위에 방탄조끼를 입은 사내 여러명이 안쪽으로 총부리를 겨누었다.
“(이 배신자 주제에!)”
사내들은 안에 있을 료코를 향해 발포를 하려했으나 짧은 순간 안은 텅비어 있었고 그녀는 보이질 않았다.
“(어, 어디로 나른거지?!)”
그들이 당황하며 잠시 주춤하는 사이, 진즉에 문 옆으로 가서 벽에 등을 대고 숨어있던 료코가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으로 수개의 총구를 단 칼에 베어버렸다.
무기를 잃은 사내들을 제압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였다.
“(이건 어떻게 쓰는 것이냐? 사용법을 말하라!)”
료코는 일부러 남겨둔 사내의 멱살을 붙잡고 눈앞에 총을 들이밀었다.
“(어찌 쓰는 것이냐!)”
“(크윽.....)”
사내는 입을 꾹 닫고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빨리 말해!)”
그러는 사이 윗층과 복도 쪽에서 바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무장을 한 수십명의 병사들이 이쪽으로 향하는 중인것 같았다.
료코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목을 처 정신을 잃게 만든 뒤 서둘러 복도로 나왔다.
동시에 발앞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폭음과 취이이익 하며 순식간에 번지는 노란 연기. 적들은 연막탄을 사용해 그녀의 시야를 묶어 두고 연기속으로 총을 마구 갈겼다.
투다다다다다다다!
“!”
료코는 민첩하게 문초실로 몸을 날렸다.
뱃속의 아기가 다치지 않도록 최대한 배를 감싸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연기가 안으로 더 들어오기 전에 서둘러 문을 닫았다.
“콜록, 콜록!”
되도록 연기를 마시지 않기 위해서 입을 막았다.
총알이 빗발치는 복도로 다시 나갈 수가 없었다. 자욱한 연기로 인해서 시야 확보가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몸이 무거웠다.
자객 생활을 오래했던 그녀다.
임신한 몸이 아니었다면 이런 난관을 극복하는 것 쯤이야 어렵지도 않았을터!
“(큰일이로다.)”
조금 전 방을 나가자마자 탈출에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적들의 대처가 의외로 빨랐다. 저들은 그녀를 다시 안에 가둬두는데 성공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죽는다.
중앙에 달랑 놓여 있는 책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빈 방이라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는 자신도 죽고 자신과 우주의 아이도 죽는다.
자신은 둘째치고 아이가 죽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 아찔한 생각이 들자 료코는 생각하기도 싫은 듯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다시금 저항하기 위해 힘을 냈다. 이 순간 어떻게든 행동해야만 했다. 쓰러진 사내 중에 한 명을 일으켜 세워 목에 칼을 들이대고 방패로 삼았다. 인질극이 얼마나 효과가 있겠냐만은 지금으로선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서방님. 소녀는 꼭 서방님 곁으로 돌아가겠나이다!’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도 악착 같이 빠져나가리라!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져도 이를 악물고 살아남으리라!
자신이 살아야 뱃속의 아기가 산다.
아기를 살리겠다는 의지.
그것만이 전부였다.
쾅!
쾅!
쾅, 쾅!
적들은 둔탁한 도구를 사용해 문을 깨부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여의치 않았는지 곧 문손잡이를 향해 탕탕탕 총을 쐈다.
찰칵, 찰칵, 찰칵, 홱!
총알에 파손된 문이 손쉽게 열렸다.
“(항복해라!)”
항복하라니, 항복해도 어차피 쏠 상황이다. 열린 문으로 여러명의 사내가 밀물처럼 몰려들어왔다.
돌격소총을 들고 조준 자세를 취한 사내들이 아군을 방패로 삼은 료코를 확인한 그때였다.
천장이 무너지는 무시무시한 굉음.
콰앙!
폭약 같은 것이 윗층 에서 폭발하면서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쿠콰쾅!
두 팔로 머리를 감싸던 료코가 고개를 들어보니 천장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천장의 골격을 이루던 철골이 일그러지고 눈앞에서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한시앞도 내다보지도 못하는 어지러운 시야속에서 불쑥 나타난 한 여성.
동그랗게 무너져 내린 천장의 윗층 난간에 서서 모두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어 그녀가 씨익 하고 웃더니 아래층 문앞에 콜록 거리고 서 있던 사내들을 향해 불꽃이 솟구쳤다.
투두두두두두두! 투두두두두!
“크억!”
“아악!”
“으아악!”
방탄조끼를 피해 목과 얼굴에 탄환을 맞은 사내들은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즉사해버렸다.
곧 아래층으로 뛰어내려온 여성을 보고 료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는......! 네가 여길 어떻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하는 료코. 눈앞의 여성은 다름아닌 강미라.
“왜. 내가 무서워?”
미라는 큭큭 웃었다.
***
미라가 한발짝 다가가자 료코가 그녀를 무척 경계하며 칼날을 세웠다.
“오해는 하지마. 널 죽이러 온게 아니니깐.”
미라는 자신이 들고 있던 기관단총을 바닥에 내던지면서 실실 웃는 얼굴로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료코도 칼을 내린뒤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현재의 몸 상태로는 미라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적을 더 만들기보다는 일단은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미라는 다시 한발짝 다가와 먼지가 묻고 헝클어진 료코의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몰골이 많이 초췌해졌구나.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 네게 갚아줘야 할게 있지만 오늘은 그 일로 온것이 아니니까.”
“......?”
미라는 이어 료코의 부른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려 했다.
료코가 잽싸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미라는 료코의 반응을 즐기는 듯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마주보았다.
“애가 무사한지 한번 만져보려고 했을 뿐이야. 날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돼. 앞으로 한집에서 살게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료코는 그녀가 하는 한국말을 전부는 아니지만 반쯤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시선을 내려 미라의 아랫배를 쳐다보았다.
희한했다.
지난날 우주를 강간하면서 그녀 역시 임신을 했다고 들었는데 배가 부르지 않은 상태였다.
평범하고 늘씬했다.
료코는 속으로 다행이라 여기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럼 그렇지. 네까짓게 감히 용종(龍種)을 잉태할 수 있을줄 알았더냐! 어림없다 이년!’
슬슬 서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는지, 료코는 몸을 늘어뜨리며 벽에 몸을 기댔다. 눈빛의 경계심은 전보다 흐려져 있었다.
‘여기엔 어째서 온것일까.’
의문을 품기가 무섭게 미라는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가죽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이상한 행동이었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소라가 보내서 왔어. 그녀가 데리고 있던 한 측근에게서 네가 제네틱스 본사에 감금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할 수 있었지.”
“여기에 한소라의 심복이 심어져 있단말이냐?”
“있더군.”
마츠다이라와 한규만 회장은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네틱스 전 임직원들을 완전히 장악할 수는 없었다. 계열사를 포함해 20만명에 달하는 제네틱스 그룹의 총 임직원중에 이번 반란에 참가한 직원들은 서울 강남 본사에서 근무하는 몇백명의 직원들과 평소 정부에 반감이 많던 수라들 뿐이었다.
헌데 참가한 직원들이라고 해봤자 일반 직원(사무직)은 별로 없었다. 대다수가 제네틱스 그룹이 보유한 사병인 기무대 멤버가 다수였다.
만약 일반 직원이 반란에 가담하고 있다면 그들은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서, 또는 주변의 협박과 압력에 두려워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마츠다이라와 한규만 회장은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그들의 반란에 얼결에 껴들게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지체될수록 그들은 지친끝에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것이고, 도망치거나 정부측과 내통하는 자가 생기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라서 마츠다이라와 한규만 회장은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있는 기간을 최대 3일로 보았다. 청와대 점령이 그 이상을 넘어간다면 반란은 실패였다.
“너 말고도 한 사람을 더 데려와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지금부터 그 여잘 찾으러 갈거야.”
속옷 한장 없이 옷을 말끔히 벗은 미라는 문쪽으로 천천히 걸어나아갔다.
료코는 무기 하나 없이 사지로 향하는 그녀를 보고 황급히 말리려 했다. 하지만 미라는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젠 너만 데바가 아니야.”
료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설픈 한국어로 물었다.
“너도 데바가 되었단 말이냐......?”
“당연한게 아니겠어? 너만 계속 특별할줄 알았니? 후훗.”
“어, 어떻게......”
“어떻게긴, 네가 그랬던것처럼 나 역시 우주 씨의 씨앗을 받아들였지. 간단했어.”
“하지만 넌 유산하지 않았더냐?”
“유산? 아아.”
미라는 자신의 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걸 보고 말하는 거라면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네. 아쉽겠지만 틀렸어. 나와 우주 씨의 아기는 다른 평범한 아기들과는 좀 다르게 태어날거거든.”
“......?”
료코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어보려던 찰나.
“이쪽이다! 그년들은 아직 방안에 있다!”
여러명의 발자국 소리와 함께 한 병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복도쪽에서 들려왔다.
료코는 마른침을 삼켰다.
“옷을 다 벗고 뭐하려는 수작이냐. 적들은 최첨단 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어.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막겠다는 심산이지?”
“너무 겁먹지 않아도 돼. 잠자코 지켜보고 있으면 다 끝나 있을거야.”
미라는 그야말로 여유만만했다. 문고리를 잡고 료코를 향해 웃어보였다.
그에 반해 료코는 심히 긴장되는지, 목울대에서 꿀꺽하는 소리를 냈다.
여러명이 다다다다다 뛰는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져 왔다.
“잘 봐. 나의 첫번쨰 능력을.”
그녀의 변신은 순식간이었다.
눈 깜짝할새에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있었다. 몸 전체가 초록색 피부로 변하고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비늘조직이 돋아났다.
“!”
미라는 두 갈래로 갈라진 파충류의 혀를 날름 거렸다.
“어때? 놀랐어?”
료코는 황당했다. 어이없고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왔다. 도무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네이년, 사람인게냐?”
“사람이지 귀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