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쳐다보니 20kg이상 나가는 무거운 박격포가 자신의 왼손을 짓뭉게고 있었다. 선반 위의 군수품들이 떨어질때 박격포도 함게 떨어지며 자신의 손을 내려찐것 같았다.
그녀는 남은 오른손으로 박격포를 치우고 자신의 왼손을 골몰히 쳐다봤다. 피를 흘리며 흉측하게 망가졌던 손이 점차 제 모양을 찾아갔다.
“훗.”
그녀가 데바가 되면서 얻게된 자연 재생능력. 인체 투명화 능력에 이어 그녀를 어떤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특급 능력이었다.
미라는 주변의 먼지가 걷히자 료코와 이시하라가 서 있던 장소를 응시했다.
“호.”
료코의 일격을 직격으로 맞은 이시하라는 최후의 최후까지 발악하며 저항하려던 기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처량한 몰골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바닥에 양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몸을 보호해주던 장갑 여기저기가 파손되거나 벗겨졌으며 머리를 감싸던 헬멧도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었다.
죽은 자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칼을 내린 채 그 앞에 묵묵히 서 있던 료코는 칼날을 절도있게 허공에 한번 휙 하고 털어내며 칼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녀는 멀찌감치 서 있던 미라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말했다.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네년이 가야할 곳으로 서둘러 안내하거라. 한소라가 나와 함께 데려오라던 그자에게로 말이다.”
“후후. 아까까지는 죽을둥 살둥 힘들어 하더니 이제 기운 좀 도시나봐? 어이가 없군.”
자신을 비꼬는 소리. 료코는 살짝 발끈하며 몸을 돌려 미라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정말 어이가 없다니까.”
미라는 진중하고도 박력있는 눈빛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는 것에 전혀 아량곳하지 않고 천천히 중앙 통로로 걸어나왔다.
알몸인 그녀는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진 군수품 중에서 판초우의를 집어 몸에 걸쳤다.
파충류로 변한 녹색의 그녀는 송곳니를 들어내며 료코를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적의 대장을 하나 때려잡았다고 기세가 아주 등등하시군. 기억해. 난 널 안내하는 사람이 아니야. 네 은인이지. 감사합니다란 말을 들어도 부족할 판에 버릇이 없군.”
애꾸. 미라는 왼쪽 눈에 안대를 쓰고 있었다. 지난날 료코에게 당해 왼쪽 눈을 잃었던 미라는 그때의 분함을 절대 잊지 않고자 여전히 애꾸가 된 채로 살고 있었다.
미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채 그저 실실 웃어보이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왼쪽 눈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료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어 그녀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머리가 나빠도 기억을 하란 말이야. 그날을.”
미라는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던가.
그녀의 행동을 괘씸하게 여긴 료코가 욕설을 내뱉었다.
“시츠레이나 야쯔(무례한 것).”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다. 누가 먼저 칼을 들이밀어도 이상할 것 없는 분위기였다.
료코는 조금 화가 난 눈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기모노 상의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쪽의 주머니를 뒤적뒤적 거리더니 이내 열쇠를 하나 꺼내서 보여주었다.
“우리집 열쇠다. 앞으로 서방님이 생각날때면 내가 감시한다는 전제하에 언제든지 들락날락거려도 좋다.”
“......!?”
완전히 예상 밖의 반응에 미라는 그저 멀거니 그녀를 바라봤다.
“설마 내가 잘못들었으리라고는......?”
바로 그 설마였다.
료코는 확인시켜주듯 죽은 이시하라의 머리 위에 열쇠를 살며시 올려두었다.
“마음이 변하기 전에 썩 가져가거라.”
“와우!”
미라는 믿어지지 않는듯 거의 존경에 가까운 눈빛으로 료코에게 물었다.
“정말로 괜찮은 거야? 우상님이 계시는 집에 매일 가도 괜찮은거야? 가도 되는 거지!”
미라의 얼굴에는 기쁨이 고스란히 들어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작렬했던 살기는 온데간데 없고 저도 모르게 아이처럼 뛸뜻이 기뻐했다.
료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이다. 그분의 아이를 잉태한 몸으로서 당연한게 아니더냐. 언제까지 밖에서 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네가 평소에 처신만 잘한다면 첩으로 집안에 들여놓을 생각도 하고 있었다.”
미라는 환희에 가득찬 눈빛으로 소리지르며 료코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를 껴안고 펄쩍펄쩍 날뛰었다.
료코는 정신이 사나운 나머지 행여 아기라도 다칠까 힘겹게 그녀를 떼어놓으며 다그치기까지 해야만했다.
“처, 철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떨어지거라! 놓으란 말이야!”
지하 6층에 이르렀을때는 그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지레 겁을 먹고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
통로마다 겹겹이 쌓인 두터운 보안벽을 무난히 뚫고나간 두 사람은 이윽고 어느 한 방에 다달았다.
책상과 의자, 침대만이 놓인 휑한 독방.
“본부장님이 보내서 온건가요?”
“이제 본부장이 아니고 제네틱스에서 쫓겨난 여자가 보내서 왔는데 말이죠.”
짓궂게 대답하는 미라.
그런 그녀를 침대에 걸터 앉아 지그시 응시하는 전지연 박사.
마츠다이라가 일으킨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소라는 우선 지연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연이 누구인가. 마츠다이라와 그 일당들이 요긴하게 사용중인 맹수와 맹수의 양산형 버전 맹수 어드벤스 슈트의 개발자다. 그들은 모두 그녀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고있는것과 다름이 없었다.
소라는 생각했다.
지연만 도와준다면 이 엉망진창의 사태를 빨리 끝낼 수 있을거란 희망이 들었다. 예를 들면 맹수 어드벤스 슈트의 네트워크에 접속해 바이러스를 침투시켜 오작동을 일으킨다든지, 만약 원격도 가능하다면 원격 조종으로 적들의 손발을 꽁꽁 묶어놓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
“그렇게 못합니다.”
미라와 료코는 영등포에 위치한 비상대책본부로 전지연을 무사히 데려왔다.
소라는 앞서 '깨어있는 제네틱스인들의 국가 내란 진압 비상대책 위원회'란 이름으로 비상대책본부를 세웠다.
이번 반란을 일으킨 제네틱스와 그녀가 이끄는 제네틱스간에 확실히 선을 긋고, 정부와 국민들에게 두 종류의 제네틱스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의도였다.
그래야만 이번 사태가 일단락 된 이후 벌어질 전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을 포함해 무고한 제네틱스인들이 살 수가 있는 것이었다.
“할 수가 없어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두 눈. 조용한 방에서 소라와 대면한 지연은 늘 그래왔듯이 평소와 일관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하얀 연구원 가운은 그녀의 표정처럼 어딘가 쓸쓸하고 공허한듯 했다.
“한규만 회장님은 일찌감치 제게 맹수 어드벤스의 네트워크를 차단하도록 시켰습니다. 당시는 그뜻을 몰라 그저 시키는 대로 하였지만, 이제야 알것 같군요.”
소라는 미간을 좁힌 얼굴로 물었다.
“차단을 풀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습니까?”
“맹수 어드벤스는 외부의 간섭을 전혀받지 않는 독립된 개체로서 움직인다고 봐야합니다. 이른바 개인이 입는 옷처럼요. 직접 만지지 않는 한 원격으로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암울하군요.”
소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회장님의 행방에 관해서 엿들은 건 없으십니까?”
지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한규만 회장님을 마지막으로 뵌건 양평에 있는 별장에서였습니다. 그곳에 일이 있어 갔다가 저들에게 잡혔기에 그 뒤로 보진 못했습니다.”
소라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지연 박사가 아버지의 별장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간거람?
‘혹시 성을 매개로 승진을 보장 받으려 했던건가? 천문학적인 액수의 연봉을 받는 전지연 박사가 그럴리가?’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지의 별장에는 어쩐 일로......?”
일관되기만 했던 지연의 표정이 처음으로 심각하게 변했다.
“이렇게 된 상황에 이제는 말씀드려도 되겠죠.”
“뭐를요?”
“헤라클레스.”
“헤라...... 클레스?”
“맹수를 초월하는 엄청난 힘을 가진 로봇입니다. 63빌딩만한 크기에 네 발이 달려있다고 생각하면 상상하기 쉬우실 겁니다. 한마디로 네 발 달린 거대한 로봇 괴물이죠.”
“말도 안돼. 로봇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존재한다구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직접 타서 조종해야만 하는 기계입니다. 비행기나 자동차처럼요. 무선으로 조종도 불가능하고, 무인 자동 기능도 없죠.”
“어쨌든 맹수 같은 파워드 슈트가 아닌 로봇이잖습니까. 그것도 거대한.”
다시 돌아온 무표정한 새하얀 얼굴. 소라의 말에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헤라클레스를 꺼내 사용한다면 보통의 무기가지고는 막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1개 도시를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미사일이 아닌한은 서울이 정복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죠.”
“골치 아프군.”
소라는 머리가 지끈 거렸다. 손으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리고 그녀를 미술품을 구경하듯 감상하는 듯한 눈으로 응시하는 지연.
“서울에 미사일을 날릴 수는 없나요?”
“뭐라고요?”
소라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서울에 미사일을 날린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말이었다. 지연의 그 뛰어난 머리로 어찌 그런 바보 같은 말을 쉽게 하는지 머리 뚜껑을 열어보고 싶었다.
“농담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