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191화 (191/285)

191화

수연이 피식 웃는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슬픈 미소였다.

“그럼 이왕 이렇게 된거...... 더 나쁜년이 되어볼까.”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겠단 소리.”

예상외의 기습공격이었다. 수연의 팔이 우주의 목을 휘감으며 그의 어깨를 끌어당기는 순간, 서로의 입술이 포개졌다.

“!?”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감촉.

아울러 그녀는 워낙 기술이 좋아 혀가 아니라 마치 구렁이 한 마리가 입안으로 들어온것 같았다. 길고 억센 혀가 목구멍까지 핥아줄 기세로 입안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우주가 곧바로 수연을 밀쳤다.

“뭐하는 짓이오!”

그는 황급히 입술에 묻은 침을 닦았다.

“장난치지 마시오!”

“왜? 나 원래 이런 여자잖아. 잊었어?”

수연이 웃으면서 너무도 당당하게도 말하기에 우주는 기가 막혀 잠시 할말을 잃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옆으로 침을 내뱉었다. 그녀의 침이 입안에 멤도는 것 같아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난 갈테니 댁도 그만 가보시오!”

“빨리 꺼져줬으면 좋겠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소!”

“이번 일이 끝나면 만나서 이야기 해.”

“싫소!”

“왜 자꾸 거부해?”

“이제 우린 남이나 마찬가지요. 더구나 두 팀 다 사탄을 목표로 하고 있다오. 우리 둘이 만나는 모습을 남들이 보면 어찌 생각하겠소? 오해받기에 딱 좋지 않겠소이까. 자칫 누군가에 의해 사탄 공략에 관한 기밀이 외부로 새어나갔다간 제일 먼저 우리가 의심을 받게 될것이외다. 그러니 부디 만남을 신중히 하시오. 수연 누님과 소생은 이제 전처럼 사이가 좋게 될래야 될 수가 없단 말이오.”

“타인에게 오해받는게 무서워?”

우주는 말이 안통해 답답했는지 살짝 인상을 구겼다.

“그런 말이 아니잖소.”

“난 그렇게 들리는데.”

“멋대로 생각하시오.”

“멋대로 생각할게.”

수연은 그렇게 대답하고나서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샥스핀의 헬멧을 도로 머리에 썼다. 그대로 뒤로 돌아 몇발자국 걸어가는가 싶더니 다시 우주를 돌아봤다.

“하나 걸리는게 있어서 말해두는데, 오해하지는 마. 나는 아무한테나 이렇진 않아. 여태껏 남자들이 좋다고 쫓아다닌 적은 많아도 내가 이렇게까지 매달려 본적은 없는 사람이야.”

알고 있다. 일찍이 오수연에 대해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그때그때 자신의 성욕을 채우면 그뿐이었다.

그 후로는 뒤도 돌아보지않고 보란듯이 남자를 차고 다녔다. 그리고 그녀에게 차인, 수연에 대한 미련을 못버린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괴롭힌다 싶을 정도로 지독하게 따라다녔고, 심지어 임무중에 난동까지 부린 적이 있다하지 않았는가.

“날이 뜨기 직전까지 우린 수연 씨를 찾아 헤맸지. 마침내 어느 한 동굴 안에서 밧줄에 묶여있는 그녀와 녀석을 찾아냈어.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던 거야. 해가 뜨면 바로 사탄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차분히 그를 달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네. 그래서 난 결국 수연 씨를 인질로 삼았던 녀석을 쏴버렸지.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으니까.”

우주의 머릿속에 지난날 차영웅과 식사를 하며 나누었던 대화가 짧게 스쳐지나갔다.

수연은 조그마한 언덕에 서서 그를 계속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구는건 내가 뭔가 아쉬운게 있거나 네게 특출난 매력이 있다는 말이겠지. 아무튼 연락, 기대할게.”

그런 말을 남긴 채 수연은 홀연히 떠났다.

우주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특히나 ‘연락 기대할게’ 라는 마지막 말이 계속 귓가에 멤돌았다.

“참 제멋대로군...”

병문안을 거절할땐 언제고 이제와 만나고 싶다니.

정말 제멋대로다.

***

<두 분이 혹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까?>

불쑥 줄리엣이 그런 말을 꺼냈다.

그때까지 잠자코만 있던 녀석이 오랜만에 하는 소리가 참으로 가관이다.

우주는 약간 성을 냈다.

“누가 엿듣고 있으라고 했냐. 그리고 사랑은 무슨, 개뿔이 사랑이냐. 난 저런 여자 사랑한 적이 없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때때로 잊고 싶은 추억도 있는법입니다. 시간이 다 해결해주겠지요.>

조금 전의 대화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몰라도 줄리엣은 분명 자신과 수연의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었다.

우주는 어이가 없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별쓸모 없는 기능까지 넣었다며 혀를 찼다.

“시끄럽고, 동력원을 교체하겠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계속 디스플레이 창에서 경고 문구가 뜨고 있었다. 맹수의 동력이 5%를 밑돌고 있다는 내용. 맹수 어드벤스 30기와의 싸움에서 동력 손실이 컸다기 보단 맹수 혼자서 경기도 구리시에서 전방주둔지까지 오토 모드로 이동하면서 동력을 소모했던게 더 컸다.

이 상태로는 언제 동력이 꺼질지 모를 정도로 간당간당한 상황.

이때 마침 좋은게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하시도루가 갖고 있던 맹수 002호.

“이쯤에 있을 것 같은데.”

우주는 맹수의 잔해가 널린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거렸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아까 말했잖냐. 동력원을 교체할거다. 맹수 002호꺼로.”

<그것이라면 우측 3m 지점, 떨어져 나간 자동차 타이어 아래에 깔려 있습니다.>

“진작에 말했어야지.”

<대장님께서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고놈의 말대답은 참.”

우주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허리를 숙여 발밑에 내팽개쳐진 맹수 002호의 가슴부분 장갑을 뜯어냈다. 부품이 다 고장난 탓에 어차피 섬세한 움직임 따위는 필요없었다. 걸리적 거리는 것은 손에 잡히는대로 움켜쥐고 뽑아냈다.

이윽고 주먹만한 동력원을 찾아 조심스레 밖으로 꺼냈다.

하얗고 찬란하게 빛이났다. 아름다웠다.

“사탄의 심장으로 만든거라지.”

우주는 혼잣말로 중얼거린 다음 맹수에게 말했다.

“비상 동력원 가동.”

<주 동력원을 가동 중지하고 비상 동력원으로 대체하겠습니다.>

비상 동력원이란, 비상시 작동하는 에너지 전지다. 맹수의 동력원이 완전히 파손된다 하더라도 오른쪽 겨드랑이에 내장되어 있는 에너지 전지에 의해서 최소 10분에서 최대 30분까지 맹수의 기동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움직임은 대단히 제약된다.

공격은 고사하고, 걷거나 뛰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다. 오로지 값비싼 맹수를 수거하고 후퇴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긴급 전원 장치였다.

“동력원을 교체하겠다. 혹시나 잘못된게 있으면 바로 알려주도록.”

우주는 가슴의 덮개를 열어 기존의 동력원을 살며시 빼낸 뒤, 맹수 002호의 것을 아기 다루듯 조심스레 집어 넣고 끼웠다.

철컥.

톱니바퀴가 맞물린 것처럼 잘 맞아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그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상 동력원 가동 중지. 주 동력원으로 전환한다.”

<명령대로 수행합니다. 비상 동력원 가동 중지, 주 동력원 재가동.>

맹수의 주 동력원이 다시금 활성화되면서 줄리엣은 맹수-002호 것과 호환이 잘되었는지 자체 점검을 실시했다.

디스플레이 창에 표시되는 주요 점검 항목 리스트에는 순서대로 Complete란 메세지가 줄줄이 떴다.

<테스트 완료. 맹수 002호의 동력원은 완벽하게 작동 됩니다.>

“좋아 수고했다.”

우주는 디스플레이창 우측 상단에 표시되는 맹수의 동력량을 확인했다.

맹수의 동력량이 무려 95%.

아이러니하게도 사용한게 맞나 싶을 정도로 상당히 높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확인과 동시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맹수를 착용한 하시도루가 샥스핀을 상대로 이렇다할 저항도 못하고 순식간에 파괴당했다는 증거.

“하시도루가 사용법을 제대로 몰랐겠지. 한심한 놈 같으니.”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이어 우주는 동력원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실시했던 절약모드를 해제했다. 그 전에는 정말 중요한 기능이 아닌 이상 잡다한 기능은 전부 꺼놓고 사용하질 않고 있었다. 몸뚱아리만 갖고 있었다는 말이 딱 들어 맞았다.

<절약 모드에서 통상 모드로 전환합니다. 이에 따라 그동안 Off 되었던 통신 관제 시스템 및 초단파 원거리 감시 레이더, 레이저 거리측정기, 스마트 온도조절장치, S.LED조명제어장치, 각종 센서 등이 각각 제 기능을 회복합니다.>

우주는 맹수의 모든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줄리엣.”

<말씀하십시오 대장님.>

“맹수에 TV나 라디오 기능이 탑재되어 있나?”

우주는 현재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이라도 파악하기 위해 TV가 없으면 라디오라도 듣고 싶었다. 몇시간 전까지 전방 주둔지는 통신 교란에 빠져있던 상태였던지라 외부 소식을 접할 방도가 없었다.

<둘 다 있습니다. 어느쪽을 시청하시겠습니까?>

“당연히 TV다.”

치지직.

치직.

각종 정보와 수치를 표시해주던 화면이 대뜸 전환되면서 TV가 켜졌다. 그런데 전파를 잡지 못하고 치직거리는 화면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채널을 설정해주십시오.>

“위로.”

채널 01번.

여전히 TV화면에 잡음이 심했다.

“위로.”

채널 02번.

똑같이 잡음이 심했다.

“또 위로.”

채널 03번.

변함없었다.

“5번.”

채널 05번.

혀를 찼다.

“7번.”

갑자기 삐빅 소리가 울리면서 줄리엣이 TV화면을 종료했다.

“무슨 일이냐?”

<마더(Mother)로 부터의 긴급 통신입니다.>

“마더? 마더가 누구지?”

<절 만들어주신 전지연 박사님이십니다.>

이름을 듣자마자 우주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일전에 맹수의 시운전을 위해서 소라와 함께 만난적이 있었다.

“전지연 박사라면 그 인천에 있는 로봇공학연구소에서 일하던 낭자 말이냐?”

<범위가 넓습니다. 인천의 로봇공학연구소에는 50명의 여성 로봇공학자가 재직 중입니다. 대장님이 생각하시는 그 분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범위를 좁혀주십시오.>

줄리엣은 곧바로 다시 말했다.

<마더의 연락은 착용자의 동의없이 강제적으로 승인하도록 되어있습니다. 3초 내로 연결하겠습니다. 3, 2...>

통신이 자동으로 켜졌다. 상대는 암호화된 회선으로 연락을 해왔다.

[신우주 씨... 입니까?]

극히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레 확인하듯 물어오는 그녀.

‘전지연 박사라고 했었지.’

우주는 한순간 고민에 빠지며 대답에 뜸을 들였다.

‘전지연 박사라면 제네틱스 소속일텐데, 그렇다면 아군인가 적인가? 어째서 연락을 해온거지? 맹수를 가져갈 목적으로?’

우주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완구처럼 강제로 구속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에 여차하면 맹수를 박차고 나갈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당신은 현재 어디 소속이요?”

[전 지금 소속이 없고, 여기는 한소라 씨가 이끄는 비상 대책 본부 상황실입니다.]

우주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

“뭣이? 소라 낭자가 거기 있소?”

[옆에 있습니다.]

“그거 잘됐군! 냉큼 바꿔 주시오! 소생 신우주라 하오!”

[우주 씨!]

귓가에 울리는 소라의 반가운 목소리. 곧바로 지연에게서 헤드셋을 낚아채는 소리가 들렸다.

[연락이 없어서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소라 낭자! 거긴 아무일도 없는거요?”

[없다고 하기도 그렇고, 좋다고 하기도 그렇네요. 현재 상황이 매우 안좋은건 분명합니다. 쫓기고 있는 처지거든요.]

우주는 그녀가 제네틱스에서 여러 요직을 역임한데다가 한규만 회장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국가가 과연 그녀의 처우를 어찌할지 근심이 솟구치며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래 지금 피신해있는 곳은 어디요? 그리고 료코와 소민 낭자의 소식은 들었소?”

[료코와 소민이 둘 다 저와 함께 있습니다.]

“둘다 무사하단 말이오? 료코는 제네틱스 본사에 갇혀 있다고 들었는데 구출해온거요?”

우주의 목소리가 들뜬다.

[네. 구출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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