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192화 (192/285)

192화

“거기가 어디요? 내 당장 가겠소이다!”

[자, 잠깐만요! 여기로 오면 안됩니다. 지금 시간이 없어요. 적은 잔존병력 대부분을 청와대 앞에 배치했습니다. 어서 청와대로 출발하세요. 마츠다이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우주 씨 밖에 없어요. 당장 달려가서 그의 야욕을 철저하게 깨부수세요!]

“......”

[우주 씨......?]

우주는 반응이 없었다. 한동안 바닥에 시선을 둔채 고심하는 얼굴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난 이제 독립 투사가 아니오. 전처럼 분에 넘치는 뜻을 품고 성격에 맞지도 않은 일을 하려했던 허세 종자가 아닌 일개 시민일뿐이외다.”

소라는 절로 코웃음을 쳤다.

[예전에 눈만 뜨면 나라 걱정을 하던 우주 씨 답지 않네요. 갑자기 노망이라도 들었나보죠?]

우주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일해봤자 무용지물, 식민 지배를 받든 말든 어차피 시간이 다 해결해줄거요. 알아서 해방이 될거고 알아서 전처럼 평화로운 나라로 돌아올거요. 그러니 나란 인간은 그저 내 가족과 친구들을 지키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마츠다이라와의 관계는 청산할 생각이 없는거에요?]

“그를 살려두겠다는게 아니오. 그건 후일에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오. 소생이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은 그대와 료코와 소민 낭자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것, 그 뿐이오. 더욱이 김대리와 민형의 안전도 궁금하고 말이오. 행여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어서가 찾아봐야한다오.”

[우주 씨. 이 순간 다른 일을 먼저했다간 우리 나라가 없어지고 말아요. 또다시 마츠다이라와 그의 군대에게 쫓기고 싶은거예요?]

“요즘은 100여년 전과 달리 이민하기도 편하다 들었소. 제 3국으로 망명한다면 제까짓게 어쩌겠소이까.”

소라는 기가 막힌 듯 콧방귀를 뀌었다.

[나 참. 갑자기 왜 이래요? 저들의 신세기 프로젝트를 억지로 진행시키면서까지 마츠다이라를 죽이려 했던 우주 씨는 어디로 간거예요? 일의 마무리를 지어야 하잖아요?]

“마무리를 짓기엔 일이 너무 커졌소이다. 개인의 포부를 벗어나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거대한 사명감을 다시 진다는 것은 이제 내겐 너무 버겁소. 가족, 친구, 동료 등 잃는게 많으니까.”

우주는 언젠가 소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주 씨, 이 세상은 이기적인 시대예요. 나라? 애국? 다 필요 없어. 나와 내 가족이 잘 살면 그만이야! 사실 당신도 과거에 대한 미련만 버리면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 수 있는데 언제까지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거예요? 우주 씨야말로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거 아니에요? 지금은 일제 시대가 아니야! 애국심 따위 개나 줘버리란 말이에요! 글로벌한 시대에 국경 따위는 없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벌일 사업과 관련해서 둘이 싸우면서 이야기했던것 기억하오? 사실, 그때 낭자와 대화를 나눈 뒤로 많이 고민하고 흔들렸었소. 나라를 위해 싸워봤자 얻은것이라고는 낭자 말대로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낭자의 말에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방을 나가버린 내 자신이 슬펐었소.”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소라는 아차 싶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조용히 침을 삼켰다.

자신이 그때 당시 말 실수를 한것 같았다.

우주는 가슴에 쌓아둔 것이 많은지 계속 말했다.

“100년 전 나와 같이 싸워주던 옛 동료들이 하나씩 죽어나가고, 여동생과의 생이별까지 감수해야만 했는데, 그 희생에 반해 조국의 해방은 커녕 후손들의 기억속에서도 금세 잊혀져 버렸소이다.

그런데 웃긴게 뭔지 아시오? 내가 없어도, 내 동료들이 아무것도 안해도 때가 되니까 알아서 해방이 되더이다. 그렇기에 하나 깨달은게 있소. 세상은 어떻게든 돌아간다오. 그리고 개인이 나랏일을 해결하려고 나서기보다 국가대 국가로 나서서 해결을 해야한다오. 한국과 일본 간에 해결이 안되면 미국, 중국, 러시아 등 타국이 나서서 알아서 해결해준다오.

괜히 개인이 나섰다간 가족, 친구, 동료, 돈, 명예 다 잃고, 내 후손들은 판잣집 같은 곳에서 여름에 덥게 살고 겨울에 춥게 살겠지. 개인은 그저 소라 낭자 말대로 이기적으로만 살면 된다오.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다보면 내 자손들이 판잣집에서 살 필요없이 천수를 누릴 수 있을거요.“

소라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시며 한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렸다. 자신이 당시 그에게 했던 말이 그에게 깊은 상처가 된것 같다. 그 아픔을 지금까지 티내지 않고 쌓아놓고 있었다니, 역시 우직한 신우주 답다.

[그때 했던 말은 사과합니다. 정식으로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제 말이 틀렸던거에요. 그러니 우주 씨는 우주 씨가 100년 전 부터 가졌던 신념을 계속 지켜주세요.]

“사과를 듣고자 하는게 아니오. 그 이전에 이 나라엔 나만 인재가 아니오. 나보다 뛰어난 자들이 수두룩하외다. 더구나 나는 민간인이고 힘없는 내가 나서서 무얼 하겠소. 오히려 나라에서 녹을 받아먹고 지낸 자들이 이번에 목숨을 걸고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차례이외다. 그들이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동안 나랏일을 게을리 한거나 다름이 없소. 100년 전 한심했던 이 나라의 관리들처럼 말이오.”

[하아.]

소라는 무전기 너머에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동안 말이 없었다.

[나라만 없어지는게 아닙니다. 저도 없어지겠죠. 그래도 좋아요?]

“소라 낭자는 소생이 꼭 지켜줄거요.”

[똑같이 쫓길 처지가 될거면서 허튼 소리 말아요. 우주 씨는 마츠다이라에게, 저는 우리 국민들에게 쫓기는거죠. 제네틱스는 일본 우익을 도왔고, 덕분에 나라는 식민지배를 받게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국민들의 원성을 누가 사게될까요? 일본? 아니면 마츠다이라? 둘 다 아니겠죠. 그건 바로 접니다. 100년 전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구와 동급으로 취급될거라구요.]

“뭣이!”

우주는 깜짝 놀랐다.

“말도 안되오! 이완구 따위와 비교하는건 크나큰 수치요!”

[그 수치랑 동급으로 취급될것 같으니 문제죠.]

“그런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소. 내 끝까지 막아주리다!”

[우주 씨는 일개 시민이잖아요? 혼자서 뭘 막아주겠다는거죠? 전 앞으로 우리 국민들에게 평생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겁니다.]

“이민가면 자연스레 해결이 될것이오!”

[답답하네요. 이민이 무슨 완벽한 해결책이라도 되나요? 일본 제국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에게 우리 국민들은 핍박받게 될것이고 그로 인해 우주 씨가 그랬던것처럼 새로운 애국지사들이 태어날 것입니다. 그럼 그들은 하나같이 해외로까지 찾아와서 절 가만놔두지 않겠죠. 발각되는 순간 총에 맞아죽을지도 몰라요.]

“그런......!”

[제가 살려면 이번 사태를 빨리 진압하고 재판장에 나가 해명을 해야될 것 아닌가요? 이대로 해명도 못하고 죽게 만들 작정이에요?]

우주는 입술을 벌린 채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100여년 전 자신과 같은 처지인 새로운 독립운동가들이 소라를 노린다고?

만약 소라가 애국지사들에 의해 희생당한다면 누굴 탓하고,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 할 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첫단추부터 잘못낀 애달픈 일이되고만다.

첫단추. 이미 시작된 운명의 시련을 막기는 어렵지만, 시작 전에는 막을 기회가 한번은 있다.

첫단추를 제대로 끼면되는 것이다.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이번 만큼은 꼭 마츠다이라를 막아 첫단추를 제대로 끼면된다.

[제 부탁, 들어주실거죠? 우주 씨.]

우주는 가슴이 세차고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힘차게 대답했다.

“낭자를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소! 내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저승으로 가는 삼도천까지 힘껏 건너가리다! 마츠다이라를 응징하러 당장 떠나겠소!”

이어 소라가 뭐라고 말했지만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몸보다 마음이 급했고, 먼저 해야할 일이 있었다. 우주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영등포 비상대책본부.

소라는 지친듯 헤드셋을 벗었다.

“휴, 정말. 평소에는 영리한것 같다가도 가끔은 정말 단순해 보일때가 있다니까.”

***

우주는 맹수를 싣고 가기 위해서 차량이 한 대 필요했다. 맹수를 착용하고 서울까지 뛰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곳저곳 수소문하며 다닌 끝에 다행히도 전방주둔지 지휘관이 군에서 쓰는 육공트럭을 선뜻 빌려주었다.

이후 우주는 전방주둔지가 있는 파주를 빠져나와 곧바로 서울을 향해 악셀을 꾹 밟았다.

“어디로 가실 계획이십네까? 갈곳은 정해두었습네까?”

육공트럭을 운전중인 우주의 옆자리. 조수석에 타고 있던 영애.

뭐가 그리도 급한지 우주가 거칠게 차를 몰자 왠지 무서워 눈을 자꾸 깜박깜박 거렸다.

“그 구해야된다는 여성분과 연락은 되신겁네까?”

“통화했소이다.”

“그거 다행입네다. 그럼 지금 그리로 가시는 겁네까?”

“아니오. 소생은 청와대로 갈거라오.”

영애는 빤히 우주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청와대는 왜 갑네까? 거기서 급히 데려올 사람이라도 있으십네까?”

“없소. 마츠다이라를 찾아가서 죽일 생각이오.”

“아까와 말이 틀리구만요. 그 여성분은 그냥 놔둬도 괜찮으신겁네까?”

우주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기만 했다. 급해보이는 그 표정은 마치 대화하기도 귀찮아 보였다.

영애는 슬쩍 눈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말입네다. 청와대까지 가는 길도 멀으니 속도는 좀 늦추는게 어떻겠습네까? 내래 이러다 사고 날까 무섭습네다. 와이리 빨리 달리시는지요.”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미처 생각을 못하고 있었소. 미안하외다.”

“제가 겁이 많아 그런거니 그렇게까지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됩네다.”

“아니 속도가 아니고 다른거 말이오.”

“뭘 말입네까? 미안할 일이 있습네까?”

“영애 낭자를 전방주둔지에 두고 왔어야 했는데 왜 데리고 온것인지, 나도 참 바보같소. 계속 같이 붙어있다보니까 까맣게 잊고 있었지 뭐요.”

“그야 제가 두 발로 탔으니까 그렇지요. 제가 왜 거기 남아있어야 합네까?”

“청와대는 지금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정도로 총탄이 빗발처럼 날아들고 있다고 하오. 그런 전쟁터에 내 낭자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외다.”

영애는 가슴에 살포시 한 손을 얹고 우주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닙네다. 저도 꼭 가야지요. 대장 동무는 제 생명의 은인입네다. 절 위해서 전방주둔지 작전을 성공으로 이끄신거 아닙네까? 그 은혜는 꼭 갚아야지요.”

“갚을 필요 없소이다. 그리고 지금 가는 곳은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고서야 살아남기가 어렵소. 마츠다이라의 실력은 고수중에 최고수, 또 다방면에서도 으뜸이요. 그놈의 특성을 잘알고, 상대해본 경험이 많은 내가 아니고서야 섣불리 덤비다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소이다. 그러니 부디 오해마시오. 서울에 도착하거들랑 도중에 내려줄테니 낭자를 찾고 있을 가족에게나 얼른 달려가보시오. 다 영애 낭자를 위해서 하는 말이오.”

“흐흑... 흑......”

“음?”

운전대를 붙잡고 있던 우주는 옆자리에 앉은 그녀를 돌아보자마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화를 나누던 영애가 뜬금없이 눈물을 훔치는게 아니겠는가!

“가, 갑자기 왜 우는거요?”

영애는 콧물을 훌쩍 삼키고 나서 입을 열었다.

“흑, 흑... 내래 여지껏 살아오면서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신경써준 남정내는 한번도 없었습네다. 대장 동무에게 감동 받았시요. 크흑!”

“이, 이보시오. 소생이 한 말중 감동을 받을 만한 부분이 있긴 있었소? 대체 어디서, 어느 부분에서 감동을 받았단 말이오?”

영애는 눈물이 맺힌 눈가를 소매로 닦으며 도리질을 했다.

“저도 모르겠습네다. 고저 전방주둔지에 갇혀있는 동안 대장 동무 생각만 했었고, 한참이 지나 대장 동무가 다시 돌아와서 문을 열어줬을때 얼마나 기뻤는줄 아십네까? 날 꺼내주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신게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땐,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네다.

그 후로 대장 동무가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냥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걸 어쩌란 말입네까?”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주는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며 운전에 집중하는 듯 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해 마시고 눈물을 거두시오. 낭자를 감옥에서 꺼내기 위해서 노력한건 맞지만, 실은 황급히 서울로 갈 생각에 더 힘을 냈던게 맞소.”

우주의 말을 듣고나서 영애는 치 하고 뾰로통한 얼굴을 지었다.

“고게 그새 생각하신 핑계입네까?”

“사실을 말하는거요.”

“고저 대장 동무는 여인의 마음을 밀었다 당겼다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 누가 사내대장부 아니랄까봐 역시나 능수능란 하십네다. 그러고 보면 얼굴도 참 잘생기셔서 녀성동무들도 많이 만나고 다니셨겠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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