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잠깐만.”
우주는 대뜸 말을 멈추라는 듯이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갑자기 왜 그러십네까?”
“저 앞에 검문중인것 같소.”
“검문요?”
영애가 정면을 바라보자 구산 인터체인지라고 써진 고속도로 표지판 아래에 엄중한 검문이 펼쳐지고 있었다.
중무장한 병사가 다섯 명. 도로에는 바리게이트가 쳐져 있고, 도로밖 가로수가 심어진 곳에는 기관총좌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민간인이 군용 트럭을 몰고 있다고 괜한 트집을 잡지 않으면 좋으련만.”
“서신을 받아왔으니 괜찮을겁네다.”
검문소를 통과하는 차량은 우주가 유일했다.
우주는 신호를 깜박이며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차를 정차시키자 총을 어깨에 멘 병사 두 명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우주는 긴장하지 않고 차창을 내린 뒤, 가슴 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전방주둔지 지휘관의 서신을 펼쳐서 건넸다.
“이게 뭡니까?”
“전방주둔지에 계신 지휘관에게서 받아온 서신이오. 곳곳에 설치된 검문소를 통과하려면 필요할 것 같아 받아왔소이다.”
“서신이라, 흠......”
“잘 좀 부탁하오.”
서신을 받아든 병사는 대충 훑어보더니 이내 차안의 우주를 바라봤다.
그가 이를 들어내고 활짝 웃어보인다. 눈매도 동글고 갸름한 인상이 좋은 청년이었다.
“아, 신우주 씨 되시는군요. 제가 원래 눈썰미가 없어서 잘 몰라뵈었습니다. TV에서 보던거랑 많이 다르시네.”
“머리도 땀으로 다 젖고, 위장크림도 군데군데 묻고. 몰골이 지저분해서 더 그런걸수도 있소.”
우주도 방긋 웃어보였다. 굳었던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병사는 이어 조수석에 타고 있던 영애에게 시선을 주었다. 얼굴부터 가슴, 골반까지, 타이트한 슈트를 입은 그녀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았다.
그는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처음보는 수라인것 같은데 신참인가보죠? TV에서 뵌적이 없는것 같습니다.”
영애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우주가 대신 대답했다.
“그렇소. 일을 시작한지는 얼마안되었소이다.”
“자주 얼굴 비추고 그러면 곰방 인기 많으시게 생기셨어요. 상당히 미인이십니다.”
“감사하오.”
우주는 멋쩍게 웃어보이며 병사가 빨리 떠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병사는 건빵주머니에서 팬과 메모지를 꺼내더니 우주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요?”
“혹시 모르니 사인 좀 해주십시오. 나중에 대스타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때 병사의 뒤에서 잠자코 서 있던 다른 병사가 그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기며 조용히 눈길을 보냈다.
그에 병사는 괜찮다 라는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다시 우주를 돌아봤다.
“사인은 금방하잖아요. 해주실거죠?”
“사인이라, 알겠소이다.”
우주가 펜과 메모지를 받아 그대로 사인하려는 순간, 병사가 손으로 막았다.
그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주 씨 말고 조수석에 앉아계시는 아가씨 것만 해주십시오. 바쁘실텐데 얼른 가셔야죠.”
“크음. 큼! 알겠소.”
우주는 머쓱했지만 덤덤한 얼굴로 영애를 돌아보며 펜과 종이를 건넸다.
“사인 하나 해주시오.”
“......”
영애는 무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사인을 적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 간나새끼가 지금 근무를 개판으로 서는 가니? 나라가 위급한 이때에 엄중한 경계는 서지 못할 망정 쓰잘데기 없이 잡담이나 늘어놓다니 군기가 형편없는 아새끼고만. 부대 마크 꼭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찾아가서 불알을 터뜨려주갔어. 각오하라우!’
그녀는 약간 화가 나 있었다.
대충 흘겨쓰듯 사인을 다 적고 나서 우주에게 도로 펜과 메모지를 건넸다.
우주는 그걸 병사에게 다시 건넸다.
“여기있소.”
“고맙습니다.”
병사는 사인이 적힌 메모지를 잠시 뚫어져라 쳐다봤다. 왠지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는것 같았다.
시간이 없던 우주가 보채 듯 물었다.
“빨리 가봐야 하는데 뭐 문제있소?”
병사가 고개를 들며 밝게 웃어보인다.
“아, 아닙니다. 뭐라도 적혀있나해서요. 그런데 이름만 적혀 있네요.”
“그럼 이름만 적혀있지 뭐가 있겠소.”
“모모씨 행복하세요 라든가, 힘내세요 같은거 있잖아요.”
그는 영애를 바라봤다.
“성함이 리영애 씨 군요. 앞으로 TV에서 자주뵙길 기원합니다. 화이팅.”
그러고는 뒤쪽 화물칸을 가리켰다. 국방색 천막으로 덮혀있는 화물칸에는 맹수가 감춰져 있었다.
“뒤쪽에는 뭐 별거 없으시죠?”
“없소이다.”
“좋습니다. 곧바로 통과시켜드리겠습니다.”
병사는 뒤돌아서 걸어갔다. 가슴에 꽂아놓고 있던 무전기를 빼들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리영애, 리영애. 제네틱스 슈트를 입고 있다. 피아식별 불가. 아군인지 확인 부탁한다.”
그와 동시였다.
부아앙!
끼이익!
우주가 타고 있던 육공트럭이 갑자기 전속력을 내는가 싶더니 급하게 U턴을 했다.
“빌어먹을! 어떻게 눈치챈거지!”
우주를 검문했던 병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전원 공격! 둘 다 사살해!”
예기치 않은 상황에 검문소를 지키던 병사들은 당황한 나머지 허둥지둥대며 어깨에 메고 있던 소총을 재빨리 꺼내들고 조준했다.
검문소를 벗어나려는 육공트럭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쏘았다.
탕탕! 탕탕탕!
도로밖 가로수 아래에서 기관총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육공트럭을 겨누었다.
투다다다다다다다다! 투다다다다다다다!
멀리 도망가는 육공트럭의 뒷바퀴만을 노리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화물칸을 가린 천막이 벌집이 되고 타이어가 펑하고 터지며 육공트럭의 균형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도로 위에서 홱 뒤집어졌다.
쿠콰쾅!
아스팔트를 파헤칠 기세마냥 끼이익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미끄러지는 차체. 뒤집힌 육공트럭의 차체와 맞닿은 도로면이 불꽃을 튀기며 한 30M는 미끄러져 나아갔다.
그리고 검문소가 있는 부근의 좌측 공터에서 맹수 어드벤스 2기가 땅밑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기존것들과는 다르게 장갑 전체가 어두운 남색으로 이루어진 위장색. 그리고 오른쪽 어깨장갑에는 하얀 페인트로 YASKUNI 라고 적혀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정체를 가리기 위해서 흙과 수풀더미로 위장을 하고 땅 속에 숨어있던 것이다!
“가서 확인해봐!”
한국군 군복으로 위장한 병사가 외치는 소리에 맹수 어드벤스 2기가 육공트럭을 향해 잽싸게 튀어나갔다.
지근거리에 도달하자 팔에 달린 개틀링포를 꺼내 풀오토로 연발 사격을 가하면서 운전석과 조수석 위주로 엉망진창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
투투투투투투투투!
하얀 먼지가 피어올랐고, 주위에 자욱하게 끼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맹수 어드벤스 2기는 당장 발포를 중지하며 걸레처럼 망가진 차량 앞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쿠웅 하고 엎어진 화물칸 쪽에서 육중한 무언가를 아스팔트에 쑤셔박는 소리가 들려오며 지반이 흔들렸다.
이어서 허공에서 쩌렁쩌렁 하게 울려왔다.
“웃긴 놈들 같으니! 내 지금부터 네놈들의 볼기짝을 걷어차 주겠다!”
맹수 어드벤스를 착용한 병사들이 숨을 삼키며 시선이 모두 화물칸으로 향한 순간, 번쩍하고 무언가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자욱한 먼지를 가르며 도약.
맹수를 착용한 우주가 고주파 블레이드를 꺼내들고 날아오르며 한순간에 그들의 뒷쪽으로 무난하게 착지했다.
“크악!”
잠깐의 틈도 주지 않는 놀라운 공격 속도. 맹수 어드벤스 한 기의 등에 칼을 꽂으며 동시에 다른 한 기의 뒷목을 움켜쥐고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녀석은 고속도로 밖으로 나가 떨어지며 얕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이어서 적의 등에서 고주파 블레이드를 뽑은 뒤 맹수 어드벤스를 발로 힘껏 차서 넘어뜨렸다.
그런 다음 주저하지 않고 적의 심장을 향해 고주파 블레이드를 겨누고 단숨에 내려찍었다. 맹수 어드벤스 한 기는 꼼짝달싹 못하고 그대로 단말마의 비명만을 남긴 채 작동을 멈추었다.
투투투투투투투! 투투투투투투투!
우주는 검문소쪽을 개틀링 포로 견제하며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진 맹수 어드벤스를 찾아 달려갔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폭음. 우주는 적이 쏜 대전차 로켓포를 직격으로 맞았다.
그러나 그 직후, 다친 곳 하나 없이 우주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맹수 어드벤스 착용자는 놀라움에 눈을 부릅떴다.
“제, 제엔장!”
“이놈새끼!”
우주는 가차없이 그를 향해 개틀링포를 난사해가며 달려들었다. 주변에는 탄피가 미친듯이 쏟아졌다. 쏘고, 찍고, 때리고, 맹수 어드벤스는 무차별적으로 난타당했다.
이윽고 적이 땅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을땐, 우주는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검문소 근처, 기관총좌에 자리잡고 있던 병사는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번개처럼 나타난 우주가 그 앞에 착지해 있었다. 감히 저항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우주를 쳐다본 순간 그게 끝이었다.
이어서 검문소를 엄폐물 삼아 호들갑스럽게 총을 쏘던 병사들도 하나씩 차례차례 쓰러졌다. 그들의 눈에 우주의 움직임은 사신보다도 빨랐다.
전투는 그렇게 끝이났다.
처음, 우주가 검문소에 도착했을때 검문했던 병사와 그의 등뒤에 서 있던 병사.
등뒤에 서 있던 병사가 우주에게 일격을 당해 쓰러지며 몇발자국 앞에 먼저 쓰러져 있는 검문했던 병사를 보며 중얼거렸다.
“사인은 대체 왜... 소위님이 이상한 행동만 하지 않았어도 놈을 죽일 수 있었을텐데 왜 그러셨습니까......”
우주를 검문했던 병사가 눈을 감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그 조수석에 탄 계집애가... 제네틱스 슈트를 입었잖아... 죽이기 아까울정도로 예뻣던 탓에 혹시 우리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아니었어도 한번 살려보려다 그랬지... 나도 모르게 그만...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