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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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적이 쓰러진 것을 확인한 우주는 철저하게 파괴된 육공트럭을 향해 걸어갔다.
엎어진 화물칸 뒤쪽에 세워진 스톰쉴드 제네틱스. 보통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커다란 방패 뒤에 숨어 있던 영애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끝났습네까?”
“이제 안심해도 되오. 밖으로 나와도 괜찮소이다.”
방패 밖으로 조심스레 걸어나온 영애가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내렸다.
“휴. 하마터면 큰일날뻔했습네다. 아군으로 위장하고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지 뭡네까.”
“마츠다이라의 수법 중 하나요. 예전에 뭣도 몰랐을땐 많이 당했었지.”
우주는 담담하게 대답하고 나서 코앞에 쓰러져있는 맹수 어드벤스의 팔 장갑을 뜯어 개틀링포 전용 20mm 탄을 모조리 빼냈다.
자신의 팔밑에 달린 덮개를 열어 탄창 역할을 하는 곳에 탄알을 하나씩 채워넣었다.
“녀석은 날 두려워하고 있는게요. 소생이 서울로 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주요 길목마다 병사들을 배치했을게 뻔하리다. 앞으로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듯이 신중에 신중을 기해 갑시다.”
“그 자의 특징을 잘 아시는 것 같습네다. 싸워본 경험이 많으십네까?”
“많다마다요. 하나하나 세다보면 내 고추털보다 많을거요.”
우주의 무감각한 말에 영애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고추털이라니, 민망합네다.”
우주는 탄 채우는데만 열중한 채 그녀를 나무라듯이 말했다.
“애도 아니고 알거 다 알면서 뭘 그리 놀라시오. 레지스트 쉴드 안에서는 더 대담한 짓도 하려 했잖소.”
“그거야 제가 하는 거니 괜찮고, 대장동무가 노골적으로 말하시면 그건 또 싫습네다.”
탄을 채워넣던 우주는 하던 동작을 멈추고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내 늘 드는 생각이지만, 여자들의 생각은 참 이해하기가 어렵소.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할 수만 있다면 당장 회사 그만두고 점쟁이를 천직으로 삼을거외다.”
“그야 사내들보다 세심하고 꼼꼼하다보니 여기저기 마음 쓸곳이 많아 그런거 아니겠습네까?”
영애가 작게 웃어보였다. 우유 같은 피부에 보조개가 패이는 것이, 다소곳한 고전적인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차마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로 그 미소가 아름다웠다.
우주는 무언가에 홀린듯 잠시 넋놓고 바라보다가 줄리엣이 보다 못했는지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대장님 신체에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 분비가 늘어나는 것을 감지. 더해서 맥박이 점점 빨라지고 혈압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에 빠지기 직전의 증상으로 여성의 성적 매력을 무기로한 불특정 적의 공격이 아닌지 심히 우려됩니다. 흥분을 자제하고 주변을 다시 보십시오. 대장님은 현재 임무를 수행중입니다.>
줄리엣의 경고음을 들은 우주는 한순간 어깨에 힘이 풀리며 김이 팍 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거 굳이 경고 안해도 나도 잘알고 있다.”
<잘 알고 계시면서도 방심하고 계셨습니다.>
“방심이 아니라 그냥 쳐다본 것 뿐이야.”
<이 수치들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줄리엣은 보란듯이 맥박수와 혈압지수를 디스플레이창에 띄웠다.
모든 수치가 높게 나왔다.
우주는 빼도박도 못하겠다. 작게 한숨을 내쉰뒤 말했다.
“이런건 누가 알려준거냐. 혹시 네 마더라던 전지연 박사가 심어놓은 보조 프로그램 같은 거냐?”
<정확합니다. 특히 마더께서는 대원이 임무 중에 사랑에 빠질 일은 절대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며, 만약 근무중에 심박수가 빨라지거나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 도파민등의 분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시 착용자에게 급히 경고를 통해 알리라고 설계하셨었습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것도 경고 받을 일인게냐?”
<그게 아닙니다. 마더께서는 혹시 근무중에 있을지도 모를 타기업의 여성 스파이를 우려하신 것입니다. 보안 프로그램의 이름은 이른바 '얄팍한 수로 남성을 꾀어 내려는 첩자겸 꽃뱀 물리치기', 강미라의 신우주 납치 사건 이례, 착용자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 중 하나입니다.>
“이름 한번 오지게 길군.”
<부정하지 마십시오. 마더의 네이밍 센스 입니다. 계속 듣다 보면 마음에 드실겁니다.>
“누구와 이야기를 하시는 겁네까?”
영애는 신기한 얼굴로 우주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줄리엣과 대화를 하느라 잠시 그녀를 잊고 있었다.
“아, 그.”
우주는 땅에 떨어진 탄알을 마저 주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쥐고 있던 탄알을 팔밑에 꾹꾹 눌러 넣었다.
“맹수에 내장된 A.I 프로그램과 대화를 했소이다. 신경쓰지마시오.”
“와, 그런 기능도 있었습네까? 역시 맹수는 뛰어난 파워드 슈트인 것 같습네다. 우리 군에도 맹수 같은 파워드 슈트가 있으면... 앗.”
영애는 갑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말실수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가 쓸데없이 동작이 크자 우주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오?”
“아닙네다. 제가 헛소리를 늘어놓은것 같아서.”
“별말도 아니었소.”
“그렇지요?”
그녀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리며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검문소에 있던 병사들이 적이라는 건 어찌 아셨습네까? 참 기가 막히셨지요. 대장 동무가 아니었으면 정말로 큰일날뻔했습네다. 저는 적인줄도 모르고 신경도 못쓰고 있었지 뭡네까.”
“그건 말이오.”
우주는 비밀리에 맹수 어드벤스가 숨겨져 있던 땅을 가리켰다. 지금은 깊게 파헤쳐진 두 개의 구덩이.
“어디를 가든 주변 사물과 지형지물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오. 소생은 그러한 생각으로 맨처음 검문소에 도착했을 당시 주변을 우선 둘러보았다오. 그리고 마르지 않은 흙으로 덮여있는것을 보고 의심을 했었소.”
영애는 웃으며 손뼉을 마주쳤다.
“기가막히구만요. 정말로 탁월하신 판단입네다.”
“이것말고도 또 있소.”
“또 하난 뭡네까?”
“내 듣기로는 서울은 현재 계엄령이 내려져 있소.”
“그렇다고 저도 들었습네다.”
“그런데 검문소를 지키는 군인들의 표정을 보고 의아했던거요. 계엄령 상태로 신경이 몹시 날카로울텐데 어딘가 태평하고 여유만만해보였었소. 더구나 갑자기 사인이라니. 소생 같으면 전쟁 때문에 피가 마르고 심신이 피곤해서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을거요. 실로 군인이 맞는지 의심이 될정도 였지.”
“아.”
영애는 우주의 세심함에 감탄하며 깊은 탄성을 자아냈다. 심지어 그를 우러러 보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눈동자에서 초롱초롱 반짝반짝 빛이 났다.
“대장 동무는 정말 전략과 전술에 해박하신것 같습네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지식을 배워오신겁네까? 회사에 다니기 전에 용병 일을 하거나 군인이셨습네까?”
우주는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을 했다.
“그 비슷한 곳에서 일한 적이 있소.”
“역시나 대장 동무는 경험이 풍부하신 분이셨군요. 더더욱 대장 동무가 좋아지려고 합네다. 원래 사내대장부란 것이 여인을 강하게 휘둘러야 하지 않겠습네까? 저도 대장 동무의 품에 안겨 휘둘러지고 싶습네다. 제 마음도 가져가주시면 안되겠습네까?”
“뭐, 뭐요?”
우주는 황당해서 말이 안나왔다.
그녀는 뜬금없이 또시작이었다.
천진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잘나가다 갑자기 이상한 말 하지말고 어여 여길 뜹시다. 이럴때가 아니오. 당장 서울로 가봐야 한다오.”
“서두르고 싶어도 차도 없고 어떻해야 됩네까? 고저 차도 없겠다 어차피 걸어갈바에 어디 숲속에 가서 느긋하게 즐기다 가시디요.”
“즐기다니 뭘 즐기란 말이오. 지금은 전쟁중이오.”
“이 난리 통에 즐길거리 하나 오디 없겠습네까? 눈 한번 비비고 앞을 보십디오. 눈앞에 있는 여인을 품에 안으면 그게 바로 극락 가는 즐거움입네다.”
“말 한번 기가 막히구려.”
“그렇지요?”
꿀을 탄 듯한 달콤한 속삭임.
영애는 유혹하듯이 귀뒤로 긴 머리를 천천히 쓸어넘겼다. 더욱이 알맞게 볼록한 젖가슴과 잘룩한 허리, 올라붙은 사과 모양 엉덩이가 식초에 저린듯이 나긋나긋 거리기까지, 영애의 몸매가 드러나는 타이트한 슈트 차림은 마음속에 내재돼 있던 욕정을 슬그머니 자극했다.
<경고, 경고. 지금은 임무 수행중입니다. '얄팍한 수로 남성을 꾀어 내려는 첩자겸 꽃뱀 물리치기' 보안 프로그램 작동. 대장님 정신차리십시오.>
“시끄럽다.”
<대장님의 맥박수가 급격히 상승중입니다.>
“알고 있어.”
줄리엣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우주는 영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가 왜 자신에게 몸을 대주려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싶은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내 정액으로 임신하면 여성이 데바가 되는걸 알고 그러나.’
에잇, 아니겠지.
우주는 그런 생각을 뿌리치려는 듯 고개를 냉큼 휙휙 저었다.
그는 갑자기 코앞에 서 있던 영애의 탄력적인 엉덩이를 팡 때렸다. 더는 여자로서 보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도였다.
놀란 영애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오마나!”
“헛소리 그만하고 어여 떠납시다.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오.”
영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대장동무는 참 의지가 강하십네다.”
“소생은 의지 빼면 시체요.”
“과연 그러겠습네까? 옛부터 열번 찍어 안넘어 가는 나무 없다 하는데 내래 해보갔시요. 게다가 영웅호색이란 말이 전해내려오듯이 영웅은 자고로 색을 밝힙네다. 대장 동무도 영웅이라면 영웅답게 노시디요. 제 눈엔 손댈까 말까 고민하는게 빤히 다 보입네다.”
우주는 웃어넘겼다.
“그건 삼국지 시대때 이야기고 지금은 그러다 한방에 훅 간다오. 적당히 좀 하시오.”
“흥.”
영애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우주가 자신을 건들지 않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팔짱을 끼고 먼 곳을 쳐다봤다.
“내래 여자로서 매력이 없나 봅네다. 강에 뛰어들어 죽어야 겄시요.”
이쯤되면 은근히 그녀의 행동이 귀엽기도 하다.
우주는 속으로 웃었지만 내색않고 단호히 대답했다.
“투정을 부릴려거든 모든 일이 다 끝난 후에나 부리시오. 지금은 서둘러 서울로 가야하오. 어서 움직입시다.”
심통이난 영애는 따지듯이 물었다.
“차도 없는데 언제 갑네까? 또 맹수는 어떻게 가고요.”
“소생이 착용하고 가져가리다.”
“건전지가 남아돌겠습네까?”
“동력이 걱정되긴 하지만 서울 가면 무슨 방법이 있을거요. 맹수를 만든 박사한테 연락을 해도 되고.”
“에휴, 고저 내래 답답합네다.”
영애는 뜻대로 되는게 없어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우주의 설득으로 끝내 발걸음을 떼었다.
두 사람이 고속도로를 따라 한 10분쯤 걸어갔을때다.
뒤에서 여러대의 차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그들을 따라잡았다.
도로가를 걷던 그들 옆에 멈춰선 수십대의 차량들은 우주를 보자 환호하며 소리쳤다.
“헤이, 멋쟁이!”
“덕분에 살았어!”
“둘이 어디가는거야? 데이트라도 즐기나!”
그 중 제일 앞에 멈춰선 차량에서 털보 사내가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었다.
“급하다고 먼저간다더니 이게 어째된 일이여?”
“오다 보셨겠지만, 난데없이 적을 만나 전투를 치르다 보니 차가 완전히 파손 되었소이다.”
“아, 그런겨? 그래서 거기가 그랬었구만. 그럼 태워다 줄테니 어여 뒤에 타!”
“고맙소!”
우주는 신난 표정으로 영애와 함께 화물칸에 냅다 뛰어 올랐다.
그들은 전방주둔지에서 출발한 각 기업의 차량들이었다. 각자 기업의 본사가 있는 서울로 돌아가는 중에 우주를 만난 것이다.
불행중 다행이었다.
이로써 우주는 무난히 서울로 입성할 수가 있었다.
***
안양.
박찬우는 마츠다이라에게서 사수하던 지역을 버리고 청와대로 총집결 할 것을 명령 받았다.
뭐로보나 자신들의 세력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렇잖아도 연이어 도달하는 불행한 소식들.
고조부인 이완구는 신우주에게 살해당하고 그가 멘토로 삼던 하시도루는 허무하게 붙잡혔다.
그는 점점 엄습해오는 패전의 두려움을 떠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