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196화 (196/285)

196화

하나는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신우주랑은 상관 없어.”

찬우는 그녀의 대답에 반응하며 눈썹을 꿈틀 거렸다.

“신우주?”

피식거리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매일 대장님, 대장님 거리며 그를 받들어 모시듯 부르던 너였는데, 그 입으로 신우주라고 마치 다른 사람 대하듯 부르는건 처음 듣는거 같네.”

“옛날 이야기는 상관없잖아?”

“어. 물론 상관없지. 상관없어, 옛날은...”

찬우는 중얼거리며 덧붙였다.

“이 자리에서는 더더욱.”

그는 허세를 부리듯 느긋하게 걸어가 소파에 등을 편히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신라그룹의 붉은색 슈트를 입고 서 있는 하나의 몸매를 스윽 훑어보았다. 생김새며 몸매를 찬찬히 뜯어보며 구석구석 모자란데가 없이 전보다 아름다운 여성으로 새롭게 태어난 그녀를 향해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의 누구처럼 볼에 점 하나 찍은 것보다 더욱 완벽한 변신이네. 훌륭해. 앉아.”

***

찬우는 손을 뻗어 앉기를 권했다.

그러나 하나는 여전히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문앞에서 움직일 생각을 안했다.

“전처럼 찌질하게 사랑 타령이나 할 생각으로 널 이 방으로 데려온 것이 아니야. 네가 전신 성형을 해서 완벽하게 변했듯이 나 또한 크게 변했어. 물론 외모가 아닌 마음이 변했지만 말이야.”

찬우는 그녀의 반응을 한번 살펴본 후 이어서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야. 현재 우리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지 않아? 국민의 입장으로서 관심을 갖는 것도 좋다고 보는데 말이지. 이 사달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나니까 누구보다도 잘알거라고 생각해. 뭐 재미없으면 신우주 이야기만으로도 좋아. 그를 죽인 사람도 나니까.”

“뭐?”

순간, 하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신우주를 죽이다니 무슨 말이야?”

“역시 그게 제일 궁금해? 신경안쓰는척 쿨한 표정짓더니 결국에는 신경쓰네 뭐.”

찬우는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어보였다.

“흐음.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되려나. 이야기가 길어서 말이지. 아마 내일 아침까진 말해야할거야. 과정이 꽤 스펙타클하거든. 우선 여기와서 앉어.”

“정말로 죽인 모양이네. 거드럭거리는 꼴이 볼만하네.”

하나는 말을 마치고 나서 소파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찬우를 마주보며 앉았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그래 보여?”

“쓸데없는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본론만 말해. 어떻게 신우주를 죽일 수가 있었지?”

“간단했어. 맹수를 착용한 후 그에게 정면 승부를 걸었지. 그리고 이겼어. 그게 다야.”

찬우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기에는 너무 터무니 없다고 생각되었는지 하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도 그럴것이 찬우는 악어팀 내에서 공격을 담당하기보다는 보조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런 그가 무력으로 우주를 제압한다는 것은 정말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신우주가 맹수를 벗고 있었던게 아니야?”

“전혀. 오히려 중무장을 하고 있었지. 빔 라이플, 고주파 블레이드, 개틀링 포나 다연발 로켓포 말고도 전에 없던 새로운 무기도 추가로 달고 있었고 말이야. 그의 무장은 실로 완벽했었어.”

하나가 빤히 쳐다보는 동안 찬우는 혼자 신이 나서 거짓을 진실처럼 꾸며 계속 털어놓았다.

“난 맹수의 기본 장비만 걸치고 신우주의 앞으로 가서 당당하게 말했어. '야, 신우주! 너 때문에 하나가 제네틱스를 떠났다. 넌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난 그 때문에 무척 화가 났다.

각오하고 어서 칼을 들어!' 라고 말이지.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결국 내가 이겨버렸어. 처음엔 나조차도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알것도 같아. 내가 신우주보다 맹수를 다루는 능력하며, 긴급 상황에 대처하는 위기 관리 능력 등 여러모로 더 뛰어났던 거야.

그것은 널 두고 벌인 전투 중에 갑자기 빛을 발했고, 그간 숨겨져 있던 잠재력이 비로소 폭탄처럼 터져버린 거지. 녀석이 심혈을 기울인 일격을 가볍게 피한 뒤 녀석을 연속으로 벨땐 정말로 그 쾌감이 장난 아니었어. 더구나 네 복수를 해준다는 생각에 더욱 짜릿했었지. 널 차버린 그 녀석을 대신 죽여주겠다는 생각으로 말이야. 어때? 내 말 듣고 통쾌해졌어?“

“......”

찬우의 장황한 설명이 끝나고 나서침묵이 흘렀다.

하나는 말이 없어지고, 적막감이 감도는 고요한 눈망울로 찬우를 응시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이었으나 찬우는 그녀의 기분을 알것 같았다.

“설마, 슬퍼?”

“별로.”

하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나 무심해보이는 대답에는 무언가 모를 깊은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내가 왜 슬플거라 생각하지? 오히려 아쉬워. 그를 죽여야 할 사람은 니가 아니라 바로 나였어.”

“어차피 피차일반이야. 니가 그에게 원한이 있었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원한이 있었어. 누가 죽이든 어쨌든 그는 죽었으니까 다행인거야. 안그래?”

찬우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과 심적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자라난 광기가 눈동자에 언뜻 내비쳐졌다가 금세 사라졌다.

“지금까지 신우주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이젠 다 털어버리고 잊어도 돼. 이 세상에 그는 없으니까.”

“신우주...”

하나는 찬우의 말과는 상관없이 혼잣말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멍하니 고정된 두 눈동자에는 우주의 죽음을 슬프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기쁘게 생각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속을 알 수 없었다.

이윽고 초점없는 눈동자가 돌아왔을땐 찬우를 향하고 있었다.

“넌 여기서 뭘 하는거지? 야스쿠니 특공대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거야?”

“야스쿠니 특공대에 관해서 알고 있었어? 어디서 들었나 보구나.”

“TV에 나오니까.”

“아하, 그렇지? 우리 이야기가 TV에 많이 나오고 있을거야. 엄청난 일을 벌였으니까. 잠깐만.”

찬우는 왠지 흥분돼 있었다. 앞으로 자랑할 이야기가 많아 갈증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앞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통을 꺼내 두 개의 플라스틱 컵에 물을 따랐다.

한 잔은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들이 마시고 다른 한 잔은 탁자로 가져와 하나 앞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마셔.”

“고마워.”

“이젠 고맙다는 말도 해주는구나?”

찬우는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이게 다 신우주가 죽어서 그런거야. 안그랬으면 전처럼 퉁명스럽게 튕기기나 했겠지.”

하나는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신우주 이야기는 지겨우니까 이제 그만하지?”

“그래, 맞아. 우린 이제 앞을 봐야해. 우리 둘만의 미래를 말이야.”

찬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뒷짐을 지고 소파 주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망상을 꿈꾸는 듯한 두 눈빛은 머릿속에 담긴 생각으로 인해 굉장히 들떠 보였고, 그는 자랑스럽게 떠벌리듯 입술을 열었다.

“대일본제국이 이 땅을 지배하며 곧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거야. 그러니 너도 슬슬 준비해. 어느쪽에 설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올테니.”

“어느쪽이란건 뭘뜻하는 건데?”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를 말이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돼. 안그럼 목숨이 위태...”

“됐어. 쓸데없는 말이었구나.”

하나는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을 잘랐다.

“현실을 봐. 못본 사이에 허풍만 늘었어.”

“허풍이라고? 이게? 내가 허풍이나 때리는 놈으로 보여? 아앙?”

찬우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꺼낸 이야기가 쉽게 무시당하자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우리 야스쿠니 특공대는 말이야 너무도 강력해. 끌려오면서 밖에 있던 거머리란 녀석들을 봤어? 그리고 맹수 어드벤스도 알겠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괴물과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어림없어. 우린 곧 청와대와 국회를 점령할거야. 그 선봉에는 내가 설거고 난 신우주를 죽였던 것처럼 불가능한 일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고 말거야. 난 능력있고 강한 남자니까.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인질로 삼으면 그땐 이 나라는 끝이야. 일본의 식민지가 되겠지. 더구나 그거 알아?”

찬우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하시도루님에게 듣기로 미군의 3함대와 7함대가 현재 일본 후쿠오카에서 정박중이야. 우리 야스쿠니 특공대가 이세종 대통령을 인질로 삼는 순간, 크게 반발할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파병된 병력들이지. 지금이야 양측 다 서로 충돌을 피할 생각에 그저 상황만 주시하고 있을뿐이지만, 한국과 일본 둘 중에서 일본이 우위에 서는 순간 중국과 러시아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며 결코 좌시하고 있지 않을거야. 미국과의 군사 충돌은 필연적일테지. 어쩌면 제 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질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는 입술에 묻은 침을 닦고 이어 물었다.

“어때? 대단한 스케일에 놀랐어? 무시하기에는 꽤나 심각한 상황이지? 그리고 네가 처한 현실이 어떤지 감이 오겠지?”

찬우는 그렇게 말한 뒤 아까 마셨던 독한 술로 인해 목이 타오르는 갈증을 재차 느끼며 하나에게 줬던 물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하아. 오늘따라 물맛이 좋군. 상쾌하고 개운해. 시중에 많고 많은 음료수 따윈 없어도 될것 같아.”

찬우가 그러는 동안 하나는 슬그머니 뒷머리를 매만졌다. 살짝 긁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녀는 찬우가 이야기 하는 동안 표정의 변화가 일절 없었다. 전의 풍부했던 감정은 짝사랑의 시련으로 인해 그녀의 마음을 냉철하고 단단하게 만든 것 같았다.

“일본의 자위대는 어쩔 생각이야?”

“자위대?”

찬우는 손에 쥐고 있던 컵을 탁자 위에 얌전히 내려놓고 대답했다.

“그들은 먼저 움직이지 않아. 모든 일엔 다 순서가 있는 법이거든. 우리가 이세종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인질로 삼는 순간, 미국이 먼저 움직이고 그 뒤에 바로 일본 해상 자위대가 움직일거야. 일본의 현 총리인 나베 신쥬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숭배하며 대일본제국의 부활을 누구보다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야. 그는 진작에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헌법을 수정하고 관련된 법안마저 미국의 승인하에 모조리 통과 시켜놓았지. 그들은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게 되면 미일 안보 동맹을 핑계로 자위대를 파병시킬거야. 동맹국을 지키기 위해서 군사력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다는 명목으로 말이지.”

“그럴만 하네. 그럼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하는 것 이외에도 우리 영토에도 자위대를 보낼 생각이 있는것 같아?”

“물론 있지. 나베 신쥬는 자국의 영토인 독도를 지킨다는 구실로 한반도에 해상 자위대를 주둔시킬거야.”

“근거는?”

“내가 모시는 다코오 하시도루님은 일본 최고의 거물인사지. 그 분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자는 이 시대 일본에 없는거나 마찬가지야. 하물며 일왕이나 총리까지. 나베 신쥬가 고개를 숙이며 찾아와서 부탁을 할 정도야.”

“이번 사태에는 나베 신쥬가 분명히 연결되어있다는 거야?”

“그렇다니까.”

찬우는 히죽 웃었다.

“그런 사람을 다 알고 내가 대단해 보이지 않아?”

하나는 무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더니 이내 대답했다.

“대단해보여.”

“그럴줄 알았지. 하하하.”

찬우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기분이 좋은 나머지 묻지도 않은 말까지 뱉어냈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을 양분 하고 레지스트 쉴드를 공동으로 사용할 속셈인거야. 이른바 제 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똑같은 셈이지.”

찬우는 기분이 좋아서 술이 땡겼다.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고 아까 마시던 술병을 움켜쥐었다.

한모금 마신 뒤 하나를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그러고 보면 난 전쟁의 한가운데, 시대와 역사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아. 모든 것은 내가 신우주를 죽이면서 부터 시작되었거든. 내가 아니었으면 분명 이번 일이 시작도 못했을거야. 그러니까 마츠다이라님이나 하시도루님은 내게 감사해야 돼. 안그래? 내가 다 해준거나 마찬가지잖아.”

“마츠다이라가 누구야?”

“마츠다이라님은 이번 일의 총 지휘자이자 대원수님이시지.”

“아, 그래.”

자기만족에 취해 실컷 떠벌리는 찬우를 우두커니 바라보던 하나는 그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찬우는 신이 났다.

술에 취해 양볼이 붉게 물들은 채로 킥킥 거렸다.

“앞으로 달라질 대한민국. 이 식민지의 책임자는 바로 나야. 뻔해. 마츠다이라님은 날 임명할테지. 안그랬다간 내가 다 뒤집어 엎어버릴거야. 지까짓게 뭐라고. 내가 아니었으면 신우주한테 죽었을 놈이 말이지. 딸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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