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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트 쉴드-197화 (197/285)

197화

찬우는 냉장고 위에 놓인 컵 건조대에서 빈 컵을 집어 들었다.

유리컵에 차분히 술을 따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없으면 부대가 안돌아가. 암. 안돌아가지.”

이어 탁자쪽으로 걸어오더니 하나에게 술이 반쯤 담긴 컵을 건넸다.

“마셔. 한 잔 쭈욱 들이키고 잘 생각해봐. 난 널 구속할 생각은 없어. 단, 우리편이 되어준다면 말이지.”

하나가 순순히 컵을 받아들자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입술에 대고 마시며 소파에 철푸덕 앉았다.

하나가 입술을 축일정도로만 가볍게 술을 마신 뒤 탁자에 컵을 내려놓았다.

“날 곁에 두고 싶어?”

“당연하지. 이 모든게 너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이 상황이 전부 내 탓이란 말이야?”

“그런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지. 너와 내가 이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해봐. 태초의 아담과 이브가 된것처럼 말이야. 우리의 상황은 그 둘과 닮았어. 앞으로 다가올 식민지 대한민국의 최초의 남녀 지도자가 되어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거야.”

하나는 잠시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아담과 이브를 닮았다기 보단 그냥 너 혼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연것 같아.”

찬우는 벽쪽으로 눈동자를 굴리면서 웃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마주치며 물었다.

“그래서 어쩔건데, 나랑 함께 할래 안할래?”

“안한다면?”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어. 널 감옥에 가둬야겠지.”

“한다면? 한 자리 내어주니?”

“그것뿐이겠어? 앞으로 내 지위와 돈과 명예와 권력을 노리고 수많은 여자가 꼬이겠지만, 한평생 너만 바라볼거야.”

그에 하나가 정색을 하며 일침을 가했다.

“결국에는 또 사랑 타령이네. 처음에 안한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언제 사랑 타령을 했다고 그래? 저얼대 그러지 않았어. 난 친구로서 널 살려주고 싶을 뿐이야. 식민지 대한민국에서 마음 편하게 살도록 해주고 싶고, 누릴거 다 누리게 해주고 싶어. 그것뿐.”

“어쨌든 그런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하지 그래.”

찬우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이따가? 이따가라는 말은 조금 후엔 사랑 타령을 해도 된다는 말?”

“모르지. 니가 눈치껏 생각해.”

하나가 튕기듯이 대답하며 다시금 컵을 들어 술을 홀짝였다.

‘우후후. 여우 같은 계집애. 역시나 나한테 빌붙지 않고서는 세상 살기가 힘들거라고 깨달은거겠지. 하튼 여자들은 계산이 빠르다니까. 힘 있고 강한 남자를 선택하는건 원시시대부터 이어져 온 어쩔 수 없는 그녀들의 본능이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좋은 판단이다 유하나! 구라치면서 공들인 보람이 있어!’

찬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랑 타령을 해도된다는 말은 결국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그 뜻은 앞으로 자신과 행동을 같이하겠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간부랑 병사들에게 널 소개시켜줄까?”

“그것보다 우선 궁금한게 있는데 말이야.”

“궁금한거? 좋아. 뭐든 물어봐. 다 대답해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없으니 많이는 대답 못해줘. 부대 이동 준비가 끝나는대로 바로 출발해야하니까.”

하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제네틱스의 한규만 회장은 확실히 가담 한것 같은데, 그의 두 딸인 한소영과 한소라도 연루가 되어있는 거야?”

“먼저 한소영은 가담자에 포함되어야 하겠지. 기존 악어팀원들을 거의 다 내쫓고 하시도루의 수하들로 새로운 악어팀을 꾸린것도 그녀니까. 게다가 마츠다이라님이 깨어나면 상황이 이렇게 될줄 진작에 알고 있었어. 묵인하고 있었던 것과 다름없지.”

“그래서 지금 어디에 있는데?”

“내가 알기론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양평의 비밀별장으로 가있다고 들었어. 3일 전 하시도루님을 통해서 들었기에 그 이후 정확한 사정은 몰라. 아마 알게 모르게 도와주고는 있겠지.”

“구체적으로 어떤식이라고 생각해?”

“그거야 난들 알겠냐. 우리가 하나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츠다이라님, 하시도루님, 고조부, 한규만, 한소영, 나, 등등 각자의 역할이 나눠져있어. 각자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기 위해서 알아서들 움직이는 중이지.”

“그녀도 너처럼 양평쪽에 지휘하는 부대가 있을까?”

“없을거야. 전쟁에 직접 나서서 부대를 지휘하는 건 나를 포함해 네 사람 뿐이야. 한규만과 한소영은 그저 전쟁이 끝날때까지 두각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한 자리 차지하려는 속셈일걸?”

찬우는 픽 웃으며 욕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야비한 것들.”

하나는 개의치 않고 곧바로 물었다.

“그럼 한소라는?”

찬우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며 다리를 꼬았다.

“질문에 전부 대답한다고는 했다지만, 마치 취조 당하는 기분이 드네. 걔들 사정을 일일이 알아서 뭐하게? 걔들이 뭘하든 아무 상관도 없잖아?”

“상관이 없다니? 나도 지난달까진 제네틱스인이었어. 전쟁이 끝나고 나서 상황이 어찌될지도 모르는데 알아두면 안되는거야?”

“음...”

찬우는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턱을 꾹꾹 누르며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설마, 우리가 질거라고 생각해?”

피식 웃으며 이어 말했다.

“제네틱스인이었으니까 반란죄로 체포될지 몰라서 핑계거리를 생각해두는 거야?”

“솔직히 그렇잖아. 아직 어찌될지도 모르고.”

“염려 마. 우리가 확실히 이기니까 그런것까지 걱정안해도 돼. 귀찮을 뿐이야. 내가 청와대에 도착하는 순간 다 끝날텐데 뭘 걱정해? 맹수로 다 박살 내버릴테니 안심해줘. 내 앞을 가로막을 자는 세상에 없어. 난 최고로 강한 남자니까.”

찬우가 떵떵거리면서 잘난 체를 하자 하나는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봐주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알았어. 대신 한소라까지만 말해줘. 그녀가 뭐하고 있는지도 알고 싶으니까. 그리고.”

하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찬우를 보고 강조했다.

“그 여자는 특히 조심해야 돼. 워낙 불같은 야망을 품은 여자라서 대한민국을 식민지로 삼고나면 널 제거하고 자신이 지도자가 되려 들지도 몰라. 너도 평소 그녀를 만나봤으니 어떤 사람인지 잘 알거야. 자신보다 못난 사람을 잘 무시하고 명예욕과 권력욕이 가득하지.”

“호오... 그렇긴 하네. 미처 생각 못했었어.”

찬우는 그녀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당장 찾아내서 죽여야겠군.”

“어딨는지 알아?”

“모르겠어. 한규만 회장이 그녀를 본부장 자리에서 내친 뒤로 이번 일에서 빠진거나 다름없었으니까.”

“한소라가 본부장 자리에서 물러났을때라면, 지난 2월에 내가 제네틱스를 관둘때네.”

하나는 이어서 물었다.

“그녀는 이번일에 어디까지 관련되어 있었어? 한규만에게 내쳐지기 전까지는 한소영처럼 적극 가담했었던거야? 이를테면 반란 준비를 그간 도맡아서 해왔던지 말이야.”

찬우가 갑자기 정색하며 대꾸했다.

“반란이라 부르지마. 우리쪽에서는 대일본제국의 부활을 위한 숭고한 투쟁이라고 말해.”

“그래 숭고한 투쟁이라고 할게.”

하나가 바로 말을 바꾸자 찬우는 인상을 피면서 이내 대답했다.

“적극 가담 했다고도 볼 수 있고, 안했다고도 볼 수 있지.”

“그건 무슨 말이야?”

“한소라에 관해서 말하려면 신우주도 있어야 해. 그도 가담한거나 다름 없거든.”

하나의 눈동자가 커지며 약간 흔들렸다.

“신우주까지? 신우주도 알고 있었던 일이야?”

“당연하지. 신우주가 왜 그렇게 평양을 고집했는줄 알아?”

“모르겠어.”

“예전 악어팀 중에서 나빼고 아무도 모를걸? 잘 생각해봐. 한소라가 평양으로 가려는 그의 생각을 계속 묵인하고 승인해준것도 이상하지 않았어? 다른팀들은 문화재 수거 임무라든지, 도로 건설자 호위 임무, 귀중한 식량 확보, 희귀한 광물 채취 임무 등등 매일매일 임무가 다른데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던거야?”

“그야 우린 사탄만 전담하는 팀인줄로만 알았으니까.”

찬우가 피식 웃었다.

“다 한소라와 신우주 때문이었어. 그 둘은 애당초 이번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막을 생각이었거든. 나 때문에 실패했지만.”

“적극 가담했다는 말은 그럼...”

“한소라와 신우주는 마츠다이라님을 확실히 죽이기 위해서 신세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무리수를 뒀었어. 평양에 그의 봉인이 있었거든. 그런데 이 멋진 나로 인해...”

하나가 도중에 끼어들며 물었다.

“봉인? 신세기 프로젝트? 그게 다 뭔데? 이번일과 크게 관련이 있는거야?”

그러나 하나하나 질문을 했다간 이야기가 괜히 길어질 것 같아서 그녀는 다시 말했다.

“아니야 계속 해봐.”

“...잠깐만.”

“왜?”

돌연 찬우는, 그녀에게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너. 뭐야...?”

“뭐라니?”

“머리속에 번뜩 스쳤어. 너랑 이렇게 길게 대화하는건 정비사 교육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인지 왠지 어색해. 내게 질문도 많이 하고 어째서 내 말을 다 받아주는 거지? 넌 날 싫어했잖아. 갑자기 좋아질리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이상해보여. 내게 원하는게 있는것 같아.”

그에 하나는 살며시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야 당연히 너랑 함께하고 싶으니까 그렇지. 또 궁금한것도 많고.”

“거짓말 마. 내가 평소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넌 항상 매몰차게 내쫓았던 여자야. 매정했던 네가 단시간에 이렇게 다정해진다고? 웃기지 말라 그래. 이건 함께하기로 마음 먹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야. 분명히 무언가 있어.”

순간 방안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하나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찬우는 심각한 얼굴로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너. 집에서 잡혀왔다면서 어째서 신라그룹 슈트를 입고 있는거야? 혹시 사전에 지시를 받고 집에서 우리를 기다렸던거니?”

찬우가 허를 찔렀는지 하나의 얼굴빛이 변했다.

“확실하군.”

찬우가 그렇게 단정지은 순간, 그는 무섭게 일어나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재빨리 빼내 들고 그녀를 겨누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녀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하마터면 순순히 당할뻔 했어. 누구야. 누가 시켰어? 신라그룹? 정부? 아니 기연합이겠군.”

웃으며 이어 말했다.

“날 잘 구슬려서 정보를 다 캐내오라 그러든? 그런데 이거 어떡하나 벌써 딱 걸려버렸네. 큭큭.”

찬우는 천천히 탁자를 돌아 걸어가 앉아있는 하나의 옆머리에 총구를 바짝 겨누었다.

“그럼 그렇지. 니가 나한테 잘해줄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난 대체 왜 그랬을까.”

그는 갑자기 속이 끓어오르는지 단단한 총구로 하나의 옆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내 호의를 아주 좆으로 본거야? 사나이의 순정을 갖고 노는건 좋지 않은 버릇이야 이 암고양이 같은 계집애야.”

본색을 드러낸 하나의 얼굴은 조금 전 당황했던 기색이 사라지고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정면의 벽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거 하나 알려주지. 여자는 말야. 한 번 싫어진 남자는 죽을때까지 평생 싫어하게 돼. 바뀔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아. 찌질해지기 싫으면.”

“하하. 씨발 미치겠군.”

찬우가 기가막혔는지 실성한듯이 킥킥 웃어댔다.

“이거 좋은거 배웠네. 게다가 몸소 체험해가며 터득하니까 아주 기똥차게 들리는데? 그럼 나도 좋은거 하나 말해줄게. 정말 중요한 거니까 잘 새겨들어. 자고로 여자는 말야.”

찬우의 남은 한 손이 하나의 등쪽으로 옮겨갔다.

붉은색 슈트의 등에 달린 지퍼를 슬며시 끌어내리며 그는 말했다.

“남자 혼자 있는 방에 눈치없이 들어오면 안돼. 아주 위험하거든.”

지이익.

지퍼는 그대로 꼬리뼈 부근까지 내려갔다.

찬우는 이어 하나의 가슴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주저없이 부푼 가슴을 한 손으로 감싸고 천천히 주물렀다.

“아까부터 여기가 자꾸 눈에 들어오는데 꼴릿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돈 얼마나 들였어? 수술이 잘되었는지 한 번 볼까?”

그는 슈트 위로 볼록하게 튀어나와, 선명한 윤곽을 드러낸 굵은 젖꼭지를 살살 어루만지고 잡아당겼다.

그리고 점수를 매겼다.

“이건 99점짜리 가슴이야. 성형외과 좋은곳 알아봤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 하는 연예인들이 줄줄이 하는곳인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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