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계속 만졌다간 내 손에 죽을줄 알아.”
“이야, 이거 두근거리는데.”
하나가 싸늘하게 으름장을 놓았지만, 찬우는 보란듯이 그녀의 젖가슴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설령, 정말로 죽는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 하나의 몸을 만진다는 기쁨과 그 둥글고 말랑말랑한 감촉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니 몸을 만지면서 내가 여태까지 해온 일들이 후회 되지 않기 시작했어. 그동안 머릿속에서 날 괴롭혔던 잡념들이 한방에 싹 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야. 평범하게 살았으면 니 가슴을 만질 수나 있었을까? 만지기는 커녕 곁에 다가가는 것도 못하게 했었겠지. 나쁜년. 그러니까 더 실컷 만져야해. 이렇게, 이렇게. 그래 여기도 한번 만져주고. 여기도.”
하나는 찬우의 행동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목석처럼 그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뿐이었다. 그의 손길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주무르고 어루만져도 그녀는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할 수 있는데까지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배짱을 부리는 것도 같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찬우는 제발 하지말아 달라고 빌기는 커녕 콧대높고 도도하기 이를데 없는 그녀의 태도에 내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젖가슴을 주무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진도를 더 나아가 슈트를 훌러덩 다 벗기기로 결정했다.
하나의 알몸을 볼 수 있다는 흥분 때문인지 침이 절로 꿀꺽 삼켜졌다.
“스물 한 살에 처음으로 총각 딱지를 떼게 생겼군. 고마워 니 덕분이야.”
“역겨워.”
“역겨워? 간뎅이가 부었군. 상황파악이 안돼? 내 앞에서 말을 심하게 뱉을수록 더 괴롭게 만들어줄거야. 말 한마디도 신중하게 골라서 하도록 해. 여기선 내가 왕이니까.”
“왕치고는 그릇이 너무 작아보여서 안 어울려.”
“도발도 작작해. 언제까지 자존심을 세울지 두고 보자.”
찬우는 그녀의 머리를 계속 조준하며 안쪽의 책상으로 가서 서랍을 열었다.
안에 있는 수갑을 집었다.
“반항도 못하게 두 팔을 꽁꽁 묶어주겠어. 전부 니가 초래한 일이야. 난 옛정을 생각해 최대한 배려를 해주었건만, 넌 그저 나를 임무 완수를 위한 목표로 밖에 생각 안했어.”
“네게 치욕을 당하는 것도 임무 과정 중에 하나지.”
“강간 당하는 것도 임무라. 호오, 그런 생각으로 버티는 것도 좋은 방법이네. 잘 생각했어. 예전의 너 답지 않지만.”
“나 다운 건 뭔데?”
“여리고, 수줍고, 감수성이 풍부했지. 그런데 지금은 마치 얼음공주를 보는 것 같아. 세상을 다 포기한 눈빛에 어떤 험한 꼴을 당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강인함이 말투 속에 깃들어 있더군. 너무 인간미가 없어 보여서 재수없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로봇 같다고 해야할지.”
“굳이 정하자면 로봇과 비슷해.”
초점 없는 눈빛,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대답하는 하나의 말에 찬우가 피식 웃었다.
“내 말에 동의 하는거야?”
“동의해. 실은 얼마 전에 개조를 받았거든. 그때 분명 감정을 담당하는 우뇌와 감각을 담당하는 12쌍의 뇌신경도 과학자들이 건드렸을거야. 임무를 수행할때 감정과 통각(痛覺)은 불필요하거든. 오직 냉혈한 기계 같은 인간이야말로 임무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둘 수 있지.”
“개조를 받았다고?”
찬우가 크게 놀란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별안간 지상에서 폭발소리가 나며 방공호의 천장이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찬우가 천장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닥도 하지 않고 정자세로만 앉아 있던 하나가 갑자기 소파 뒤쪽으로 빙글 넘어갔다.
“고, 공격인가? 앗!”
찬우의 코앞에 서게 된 그녀가 가차없이 뒤돌려차기를 날렸다. 자세는 태권도 유단자보다 깔끔했고 체중이 실린 발차기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퍽!
“큭!”
찬우의 몸은 가랑잎처럼 튕겨져 벽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쥐고 있던 권총을 놓쳤다. 떨어진 권총은 빙글빙글 회전하며 책상 밑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으윽!”
그는 벽에 머리를 부딪혀 잠시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마음은 급한데 제대로 서지는 못하고, 주저 앉은 채 이리저리 마구 허둥대기에 바빴다.
그 틈에 하나는 책상위에 놓인 연필꽂이에서 세라믹 볼펜을 하나 집었다.
그것을 거꾸로 쥔 뒤, 대퇴동맥을 피해 찬우의 허벅지를 세차례 빠르게 내려찍었다.
“아아악!”
“넌 신우주를 죽였고, 난 널 죽이면 되겠네.”
“아, 안돼!”
찬우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는 자신을 무섭도록 내려다보는 눈동자 앞에서 감히 저항을 할 생각조차 못하였다.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했다가는 그 길로 황천으로 갈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정신을 덜 차렸는지 입가에 침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가 술냄새를 풍기며 말했다.
“그, 그 날카로운 실력하며, 저, 정말 니가 아닌것 같아. 아하하, 하하...”
“쓸데없는 잡담은 필요없어. 이제부터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주길 바랄 뿐이야. 하나 질문할때마다 모른다는 대답을 하거나 다시 말해달라거나 거짓을 토해낼 시에는 이 볼펜을 사용해 네 몸에 구멍을 하나씩 내줄 생각이야. 그러니 부디 내 말을 귀기울여 잘 듣고 성심성의껏 대답하길 바래.”
그러나 찬우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는 체념 섞인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울분에 찬듯 갑자기 이 얘기 저 얘기를 막 쏟아내기 시작했다.
“난 이런걸 바라지 않았어. 내가 바랐던 것은 너와 함께 하는 인생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예전의 하나는 마치 죽어버린것 같아. 이제는 다른 여자가 내 앞에 서 있어. 내가 만나고 싶었던건 그 착하고 순수했던 하나였는데, 지금의 넌 대체 뭐니? 왜 차갑고 잔인한 마녀가 내 눈앞에 서 있는거야 빌어먹을. 그러고보면 인생은 기대와 달리 너무나 잔혹해. 모든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왜 운명은 항상 시련만 주는거야.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가 중얼중얼 헛소리를 내뱉자 하나는 주저없이 볼펜을 들고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단순히 찌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살속에 박힌 볼펜을 한바퀴 돌리고 이리저리 후벼팠다.
“아악! 그, 그만!”
“제대로 할거야?”
“해! 한다고! 뭐든 대답할테니까 제발 빼줘!”
곧바로 옆구리에 박힌 볼펜을 빼내자 그는 악 하고 비명을 한 번 더 내질렀다. 찢어진 피부에서는 피가 스멀스멀 새어나와 바닥을 조금씩 적셔갔다.
“그럼, 질문.”
하나가 기운없어보이는 찬우의 멱살을 붙잡고, 차갑고 무미건조하게 말을 내뱉을때였다.
돌연 문이 활짝 열리며 간부 하나가 성급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대, 대좌님! 원인 불명의 폭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어?”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있는 찬우의 앞에 시뻘건 피가 묻은 볼펜을 거꾸로 쥐고 있던 하나를 보자마자 크게 기겁했다.
“이, 이 년이 감히!”
간부가 허둥지둥 허리춤에 찬 권총을 뽑아들려는 찰나, 하나가 먼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볼펜을 날렸다.
볼펜심에는 무슨 열추적 장치라도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컥!”
날쎈 화살처럼 날아간 볼펜은 간부의 목젖에 정확히 꽂히며 그는 즉사해버렸다.
그대로 상황은 종료되는가 싶었지만, 이번에는 찬우가 하나가 문쪽을 보고 방심한 틈을 타 주먹으로 그녀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큭!”
뜻밖의 공격에 하나의 몸이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찬우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구리가 격하게 땡기고 다리가 통증으로 들쑤셨다.
이런 몸 상태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는지, 그는 하나를 제압하겠다는 생각을 얼른 포기하고 후다닥 문밖으로 뛰쳐 나갔다.
‘여기에 저 계집만 있는게 아니야! 지상에서 폭발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동료들까지 와 있는거야! 그러니 이럴때가 아니지! 서둘러 맹수를 착용해야 돼! 맹수만 있으면 적들을 제압하는건 식은죽 먹기니까! 다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
찬우는 절뚝거리며 바삐 오가는 병사들로 혼란스러운 복도를 내달렸다.
그는 그렇게 맹수가 기다리는 지하 무기고로 향했다.
***
찬우가 떠난 방안.
찬우가 방을 뛰쳐나가자 마자 곧바로 기계처럼 일어난 하나가 그를 뒤쫓을 생각에 방안을 나섰다. 얼굴을 세게 얻어맞았지만 그녀는 단지, 입술이 터지고 이빨 세개가 부러졌을 뿐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였다.
무표정을 유지하며 방밖으로 나오자, 이쪽을 향해 황급히 달려오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비치는 그 뒤쪽에, 피가 새어나오는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막고 오른쪽 다리를 절뚝 거리는 찬우가 어디론가 바삐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허리를 피기 힘든 노인처럼 보이던 그는 한 병사의 부축을 받아가며 복도에 있는 엘레베이터에 곧장 몸을 실으며 이내 사라졌다.
‘칫!’
하나는 혀를 찼다. 그 순간 그녀를 향해 수십발의 총탄이 가차없이 퍼부어졌다.
총알을 피해 다시 방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무기 하나 없는 자신에게 총을 든 병사 다섯이 동시에 덤벼들었지만, 그렇다고 죽기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어떻게 싸워 이길지 그녀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손도 떨지 않았고, 긴장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차분히 호흡을 유지해가며 자신을 죽이려 방안으로 몰래몰래 들어오려던 병사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아갔다.
그리고 다섯 명째 쓰러뜨렸을땐, 상황은 무사히 끝이났다. 추가로 들어오는 병사들이 더는 없었다. 아무래도 지상의 상황이 더 위급했는지 다 그쪽으로 몰려간듯 싶었다.
덕분에 방안은 다시 잠잠해지고 그녀도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찬우는 거의 놓쳤다 싶었고, 보고가 먼저였다.
헤진은 묵묵히 방안을 둘러보며 바닥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소파를 들춰서 손톱보다 10배나 작은 소형 무전기를 찾아냈다.
소형 무전기는 애당초 그녀의 뒷머리에 몰래 숨겨져 있었지만, 조금 전 찬우가 휘두른 주먹으로 인해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그녀는 이쑤시개처럼 끝이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소형 무전기에 내장된 마이크 선을 쭉 잡아 뺀뒤 입술에 가까이 댔다.
“여기는 무당벌레 5. 들립니까?”
소형 무전기를 귀에 걸쳤다.
무전기에서는 곧바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이선주 회장이었다.
-수신 양호. 무당벌레 5는 무사합니까?
“무사합니다.”
-안전수치는 어떻습니까?
“안전수치 6입니다.”
안전수치란 용어는, 무전을 사용하기에 적합한 장소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1부터 10까지 그 위험도를 단계별로 나눈 것을 말한다. 1이 가장 급박하고 위험한 상태를 뜻하며 10은 가장 안전한 장소를 뜻했다.
-조금 전에 매우 위험했던 상황인거 아십니까?
안전수치 6이란 말에 이선주 회장의 말이 조금 길어졌다.
-아까처럼 폭발사고가 발생했을때, 그때 무당벌레 5는 박찬우를 구속한 뒤 서둘러 안전한 장소로 이동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상치 못한 폭발 사고가 발생한 순간에 배고픈 새끼가 어미젖을 찾는것처럼 병사들이 지휘관부터 찾는건 당연한 거겠죠. 그걸 미리 염두해 두었어야 했는데 그 점을 인지 못한점이 실패였다고 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뭐, 됐어요. 이런 일은 처음일테니 넘어가기로 하죠.
이선주 회장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명확하게 들려왔다.
-회, 회장님. 이 무전은 기연합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채널로서, 사적인 대화는 되도록 자제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사 수라의 이미지도 관리해야 되고 말입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회사 전용 채널로 바꿉시다.
-네, 알겠습니다.
무선 채널이 바뀌자마자 이선주가 대뜸 그 직원에게 화를 냈다.
-뭡니까?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기연합 통제실까지 다 들릴줄 누가 알았습니까?
기연합은 군부의 통제 하에 있다. 그로 인해 명망 높은 10대 기업 회장들은 기연합 통제실로 가지 않았다. 가봤자 군부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야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존심상 허락치 않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뭉친 기연합이라고 해봐야 최종 결정권자는 군부였다.
그것은 기업이 사병력을 갖고 있는 것 자체를 정부가 경계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좌우간 10대 기업 회장들은 주로 부회장급들을 기연합 통제실로 보냈고, 자신들은 본사에 따로 남아 지휘본부를 설치하는게 통상적이었다.
-대체 왜 안바꾼겁니까?
-그, 그게 채널을 바꾸라는 말씀이 없으셔서...
-그런건 눈치껏 바꿔야 할것 아닙니까! 나야 대한민국 기업이 다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우리 직원이 되도록 실수하면 안되니까 괜스레 말이 많아진 것 뿐이구요!
-죄, 죄송합니다!
이선주 회장은 직원에게 실컷 화풀이를 하고 나서 다시 하나에게 말했다.
-어쨌든 박찬우 생포는 실패했고, 일단은 현장에서 멀리 물러나 있도록 하세요. 나머진 기연합의 후속부대가 후처리를 담당할것입니다.
“박찬우와의 대화는 전부 녹취한것입니까?”
-예. 빼놓지 않고 전부 녹취가 되었습니다. 신우주와 한소라가 이번 반란을 사전에 막으려 했다는 말까지 말이죠. 우리 기업이 단독으로 입수한 정보였다면 진작에 삭제했을텐데, 기연합에도 공유가 되는 바람에 다소 아쉽긴 하지만.
“그렇긴 하네요.”
그 말을 뱉는 하나의 시선은 왠지 바닥을 향했다.
이선주은 계속 말했다.
-어째서인지 목소리에 기운이 없군요. 박찬우 생포를 실패했다는데 따른 자책감 때문에 그렇다면 걱정 하지 마십시오. 무당벌레 5도 나름 큰 일을 해냈습니다. 이번 반란의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고, 관련된 자들을 색출해 내겠다는 소기의 목적도 달성했으니까요.
그러니 안심하고 퇴각하세요. 나머지는 오성그룹의 임현주와 우리 신라그룹의 새로운 자랑거리인 샥스핀 양산형 모델, 캐비어(Caviar) 20기가 곧 현장에 도착해 적들을 소탕할 예정입니다.“
하나는 저도 모르게 무심코 말했다.
“박찬우가 말하길, 신우주는 죽었다는군요.”
-예, 들었습니다. 그동안 눈엣가시였는데 아주 잘 죽었죠. 무당벌레 5도 그렇게 생각하죠?
“네.”
하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참고로 이선주 회장은 전방주둔지로 나간 차영웅으로부터 신우주와 접촉했다는 보고는 아직 받지 못한 상태였다.
애당초 차영웅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공격중인 부대는 기연합의 후속부대입니까?”
하나의 귀에 지상에서의 폭발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는 중이었다. 천장이 흔들거리는 덕분에 위의 긴박한 상황을 느낄 수 있었다.
이선주 회장이 대답했다.
-글쎄요? 그건 기연합의 부대가 아닌건 확실합니다. 아직 교전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오질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