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미라는 눈가에 찔끔 흘린 눈물을 닦는 와중에도 큭큭 웃어대느라 바빴다.
“그러길래 바보처럼 굴지 말고 나처럼 대범하게 강간이라도 했어야지. 그럼 억지로라도 받아줬을텐데.”
“신우주와 관련된 이야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 말라 했을터입니다.”
하나의 표정이 대뜸 돌변했다.
미라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사람 앞에서 말가리지않고 제멋대로 구는 건 여전하네요. 미라 씨는 제가 감정에 무뎌진 것을 천만다행으로 알아야 할것 같아요. 저는 지금 들리는 단어에만 의지하며 표정을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거든요.”
“이를테면 내가 화난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싶으면 인상을 쓴다든지?”
“아울러 절 모욕하는 것 같다 싶으면 힘을 써서라도 상대의 입을 닥치게 만들어야겠죠.”
“대답이 제법이네. 난 멀쩡히 돌아가고 싶은데 그럴러면 그때처럼 술을 잔뜩 먹여서 필름이 끊기게 만들던지 해야하나? 참고로 여긴 흑기사도 없어서 널 취하게 만들기엔 최적의 장소이긴 한데 말이야.”
미라는 하나의 기분에 아랑곳없이, 비꼬는 듯이 말하고는 덧붙였다.
“화났다는 표현을 굳이 에둘러 말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좌우지간에 나는 너랑 잡담을 나눌 시간이 이제 없는 것 같고, 난 기연합과는 거리가 멀어. 넌?”
“저는 기연합 소속입니다.”
“그래? 그럼 잘됐네.”
미라가 물었다.
“네 임무는 뭐지? 여기에 왜 온거야. 내 임무는 박찬우를 잡아오라는 것.”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제 임무 또한 박찬우를 생포하라는 것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다. 자신을 조롱하는 미라와 이 자리에서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이거 우연이네.”
“그러게요. 피차 마찬가지군요. 서로 힘내볼까요?”
“좋지. 각자 임무를 성공하려면 한 사람이 사라져줘야겠어.”
미라와 하나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울때였다.
두 사람이 혜성처럼 충돌하기도 전에, 돌연 땅이 솟구치며 맹수를 착용한 찬우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마치 외계에서 온 괴물이 끈적끈적한 침이 묻은 주둥이를 크게 벌리며 주변을 위협하는 것처럼 맹수에 내장된 무기들을 모두 꺼낸 채 크게 외쳤다.
“너희가 원하는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선택은 결코 틀리지 않았어! 내 앞을 가로막겠다면 다 죽여주겠다!”
찬우는 주변을 향해 선전포고 하듯이 그렇게 단언하고, 곧바로 기연합과 전투를 벌이는 장소로 뛰어나갔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전부 날려버리거나 때려부수며 전진했기에, 파괴와 학살의 신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가 출현한 지점과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미라는 먼 발치에서 나타난 찬우를 바라보고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 녀석도 양반은 못되겠네. 어쨌든 먹잇감 포착.”
하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문득 그녀의 발밑으로 시선이 향했다.
바닥이 붉은 피로 물들어있었다.
흥건한 피가 주변 흙으로 점점 번져나가는 중이고, 그것으로 보아 출혈이 심했다.
“그런 몸상태로 서 있는게 용하네. 그래 갖고 날 상대할 수 있겠어?”
“문제 없습니다.”
“혹시 시야가 흐릿해지진 않았어?”
“시야는...”
“호흡이 어렵거나?”
하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시야를 점검하다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을 휘청거렸다.
그녀는 급히 팔을 뻗어 근처에 쌓아올려진 타이어에 몸을 기대고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지...?”
“뭐긴 뭐야. 그것봐. 아무리 느끼는게 둔해도 몸은 알잖아. 넌 여기서 더 움직였다간 죽을 수도 있는거야. 박찬우고 뭐고간에 주변을 돌아다니며 서둘러 지혈할 도구를 찾아보는게 좋을거야.”
하나는 멍하니 미라를 쳐다봤다.
미라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투명화 능력을 써서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남긴 웃음소리만이 허공에 잠시 멤돌았다.
“승부를 벌이기도 전에 벌써 승패가 거려진 것 같네. 그러므로 박찬우는 내가 잡아가겠어. 넌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나 있으라구. 후후후.”
하나는 적당히 앉을 만한 곳을 찾아 그곳에 걸터 앉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체온이 떨어져 몸이 으슬으슬하고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러자 상처를 이대로 놔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고 있던 군복의 상의를 벗은 다음 길게 찢었다. 등의 상처부위를 덮도록 천으로 몸을 감고 일정한 강도로 압박하며 지혈을 했다.
응급치료가 대충 끝나자 뒷머리에 감춰둔 소형 무전기를 꺼냈다.
그리고 손톱을 깨물었다. 잘려나간 손톱을 써서 줄을 쭈욱 뽑아 그 끝을 입으로 가져갔다.
“무당벌레 5로 부터 붉은 무당벌레에게.”
-수신양호.
“부상을 당했습니다. 기연합측과 연락해 속히 의무병을 투입시킬 수 있는지 알아봐주시길 바랍니다.”
-현재 위치가 어디죠?
하나는 자신이 구조될 지점을 말해주고 나서 무전을 끊었다.
이동 전에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한치 앞도 모르는 밀고 밀리는 처참한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혼돈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박찬우.
맹수를 착용한 채로 여기저기 날뛰는 찬우가 보였다. 개틀링 포의 탄피를 맹렬히 쏟아내며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을 모조리 통구이로 만들어버렸다.
“옷이 사람을 만든다더니.”
멋진 옷을 입으면 모델이 되고, 사제복을 입으면 신부가 되고, 승려복을 걸치면 중이 된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파워드 슈트를 착용한 그는 이 전장에서 만큼은 가장 강인하고 뛰어난 전사였다.
그와 몇 달전 길거리에서 말싸움 했던 일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바보같은 생각이라고 몇번을 말해! 신우주는 다른 세계 인간이야. 너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하나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가면서 저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찬우가 내뱉었던 말에 화가 났다. 우뇌의 개조로 인해 지워진 감정이 조금은 살아 있는것 같았다.
“네 말이 결국 맞았어. 그래서 널 더욱 싫어하게 된거야.”
***
하나가 울타리를 넘어 적 본진을 빠져나왔을 무렵, 무시무시한 폭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그때까지 맹수를 비롯해 맹수 어드벤스 만한 파워드 슈트가 없다고 철썩같이 믿고있던 완구특공대는 신라그룹이 개발한 샥스핀의 양산형 파워드 슈트 캐비어가 전장에 참가하면서부터 준비해둔 대응책과 작전들을 모조리 못 쓰게 되어버렸고, 기껏해야 캐비어를 한 대씩 맡아 상대하거나 적의 포격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비장의 무기이던 거머리도 쓸모 없었다.
동원된 병기도 서로 동등하고, 병력은 기연합측이 많다보니 완구특공대는 점점 수적으로 밀리며 적은 한눈에도 침착성을 잃은 상태였다. 때때로 같은편을 향해 대전차 로켓포를 날리는 심각한 오발 사고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폭탄을 직격으로 맞은 병사는 주변에 온통 살점을 튀기면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그 주의에 있던 병사들도 덩달아 봉변을 당했다.
“일보 후퇴다! 정문을 내주고 진영으로 돌아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하겠다!”
완구특공대는 여기저기서 밀렸다. 병사들도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경기도 구리시를 담당하던 또다른 완구특공대는 지휘관인 이완구의 부재로 혼란이 가중되면서 민관군 연합군에 의해 일찍이 괴멸당했고, 승전보를 안고 돌아온 민관군 연합군은 다시 안양으로 진격하며 먼저 도착해 전투를 벌이고 있던 기연합 부대와 합류하면서 총탄의 불길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홀로 꿋꿋하게 버티는 자가 있었으니 박찬우였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며 그의 능력을 벗어나 부대 통제가 어려워지자 그는 지휘를 포기하고 개인으로 움직이며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있었다.
사실, 대장이 부대를 이끌 생각은 안하고 제일 먼저 단독행동을 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찬우란 사람이 거기까지 밖에 안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통제를 할래야 아는 것이 없으니 할 수도 없었다.
아울러 이 모든일의 발단이 되었던 하나에게 공격을 받은 충격이 컸던 탓에 그는 반쯤 미쳐 있었다. 그녀에게 큰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바보같고 한심해보였다.
“니가 그렇게 나오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죽이겠어. 죽여주겠어! 갖을 수 없다면 차라리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게 나아!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