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휘익!
찬우는 그리 쉽게 맞아주지 않았다. 뒷걸음질로 가장 구석까지 후퇴하면서 네 발 남아있는 다연장 로켓포를 빌딩 중간을 향해 정밀 조준했다. 이대로 빌딩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숨박꼭질이고 나발이고 난 지금 네년과 놀아줄 시간이 없다!”
그는 즉시 로켓포를 발사했다. 주저함 따윈 1초도 없었다. 한 발, 두 발, 세 발. 15층, 10층, 5층에 연달아 쏴맞추자 각 층을 떠받치던 철근 기둥은 폭발의 충격으로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빌딩 전체가 맥없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우르르르! 콰콰쾅!
지반이 흔들리고 21층 빌딩이 순식간에 폭삭 주저앉았다.
석면과 먼지가 주변 건물과 도로를 덮어버리며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어디냐, 어디.”
찬우는 디스플레이창을 주시하고 있었다. 적외선 센서로 현주의 위치를 급히 찾았다.
그러나 무너진 빌딩의 잔해에서 그녀는 발견되지 않았다.
빌딩을 무너뜨리면 딸려내려올줄 알았더니 완전히 예상이 빗나갔다.
그녀를 탐지한 곳은 바로 옆 건물의 옥상.
“그새 도망가다니 제법이군. 아니. 역시나 팀장급이랄까. 밥값은 하는 모양이야. 크큭.”
찬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맹수의 방어력을 맹신하다보니 심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다연장 로켓포의 남은 한 발을 쏘기 위해서 현주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옥상을 향해 침착하게 조준했다. 기다렸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발포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경고음이 울렸다.
[2시, 4시, 7시, 9시, 12시 방향에서 미확인 파워드 슈트 5기 출현!]
“다섯 기라고?!”
캐비어는 아직 맹수의 내장 데이터에 기록되지 않았기에 소속불명의 미확인 파워드 슈트로 표시되었다.
찬우는 성가신 기분이 번쩍 들었다. 추측컨데 이것들의 목적은 현주와 함께 협동작전을 벌이려는 것.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한쪽에서는 스텔스 모드를 해제한 캐비어 다섯 기의 어깨에서 숄더캐논이 빛을 발했다.
사방에서 솟구쳐오는 다섯 개의 빛줄기가 일제히 찬우를 강타했다.
펑!
펑!
펑!
펑!
펑!
“크으윽!”
강한 충격은 아니었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심코 맞은 까닭에 자칫 균형을 잃고 넘어질뻔 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찬우의 대응도 빨랐다. 그는 재빨리 스톰 쉴드 제네틱스를 꺼내들고 오른손의 개틀링포로 응전. 적은 뿔뿔이 흩어지며 또다시 스텔스 모드를 켜고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내가 놓칠성 싶으냐? 한놈씩 잡아서 회를 쳐줄테니 각오하거라!”
찬우는 현주를 잡는 것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를 해치우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이니, 캐비어 다섯 기를 모두 때려부수고 난 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캐비어 한 기부터 먼저 잡을 생각에 가장 늦게 모습을 감춘 녀석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 달려나가는 순간, 지근거리에서 대전차 지뢰가 폭발.
솟구친 아스팔트와 흙이 맹수의 장갑을 때렸다.
“제기랄!”
찬우는 울화가 치밀었다. 짜여진 듯한 적들의 움직임은 마치 게릴라 전투를 연상하게 했다. 열세한 장비를 가지고 정면으로 맞붙기에는 불리하기에 기습과 습격, 부비트랩등으로 자신을 농락하면서 생명력을 조금씩 갉아먹을 속셈인 것이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노릇. 일단 하나만 잡자는 생각에 다시 달렸다.
한편, 현주는 가장 높은 위치에서 찬우의 모든 행동을 묵묵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찬우는 말그대로 단순했다.
어찌나 쉬운지 그녀가 짜놓은 덫에 순순히 걸려들어 주었다.
현주는 그의 피를 말리듯 시간을 질질 끌면서 맹수의 동력원을 완전히 거덜낼 생각이었다. 에너지를 동내면 제까짓게 무슨 수로 움직이겠는가. 그때 무용지물 고철 덩이가 된 맹수의 장갑을 열고 찬우를 취하면 그뿐이었다.
그렇게 되는데 1시간을 예상했다. 앞으로 1시간만 데리고 숨박꼭질을 하다보면 알아서 퍼질 것이었다. 손도 안대고 코풀듯 맹수를 거져 이기게 되는 셈이다.
“무당벌레 20과 21에게. 목표가 19를 뒤쫓는 중이다. 양측면에서 협동 공격해 목표의 속도를 늦추길 바란다. 이상.”
-수신양호.
-이해했다.
현주는 기연합이 제공한 채널을 통해 캐비어 다섯 대와 교신을 주고 받는 중이었다.
기연합은 방금 전 찬우를 포획하는 이번 작전의 지휘를 전적으로 현주에게 맡기겠다고 연락을 취해왔으며, 그렇게 되기까지 오성그룹의 특수작전실장 오범석이 큰 노력을 기울였음은 물론이었다.
“무당벌레 19에게. 20과 21이 공격을 실시하면 즉시 DNP 폭탄(Do Not Pass, 동전만한 크기로 배를 공격하기 위해 수중에 설치하는 기뢰와 기능이 같다. 지나가는 물체에 접촉 또는 감응하여 폭발한다.
지뢰와 다른 것이 땅속에 묻지 않고 바닥에 촘촘하게 뿌려둔다.) 수십개를 길목에 부설하고 서쪽 500m 지점으로 이동 후 대기하고 있길 바란다. 이상.”
-알겠다 오바.
캐비어 다섯 기는 현주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직접 움직이지 않고 캐비어 다섯 기의 머리가 되어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뒤에서 조종했다.
서로 다른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공감대를 이끌어낸 것이, 현주의 말대로라면 자신들은 시간만 벌면 그만이었다. 적극적으로 덤빌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조국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점에서 한마음으로 뭉칠 수가 있었고, 또 서로 간에 전우라고 호칭하면서 평상시와는 남다른 애국심과 전우애를 발휘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모두가 한뜻으로 대동단결.
이 장소에 모인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움직이면서 현주의 작전은 제대로 먹혀들었고, 나중에 맹수의 동력원에 이어 보조 배터리까지 바닥을 드러낸 찬우는 강제로 길 한복판에서 동작을 멈추었다.
흥분을 주체못해 이성을 잃고, 무대포로 달려든 결과는 절망이었다.
찬우는 거친 숨을 헐떡이면서 서둘러 맹수를 해제했다. 동력이 멈춘 맹수의 무게는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는 바삐 어디론가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지칠대로 지친 그는 다리가 휘청하면서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러면서 한순간 모든 것을 포기했다.
체념한 듯한 얼굴로 길바닥에 드러누운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한참동안 알 수 없는 괴성을 질러댔다.
이윽고 그를 괘씸하게 여긴 캐비어 한 기가 헬멧을 벗고 그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천하의 반역자! 개쓰레기 새끼!”
다른 캐비어들도 속속들이 도착하고, 현주도 찬우 곁으로 다가와서 비에 쫄딱 맞은 개 마냥 처량한 그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무엇이 널 그렇게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었지? 설마 유하나 때문만은 아니겠지?”
찬우는 바닥에 누워 눈을 감은 채 픽 웃었다.
“좆같지만, 그 설마가 맞다.”
“거...”
현주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그대로 입을 꾹 닫았다.
뭘 말한다 하더라도 이젠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죄값을 달게 치르는 것뿐.
“알겠다.”
현주는 짧게 대답한 뒤 주사기를 꺼내들었다. 일반 병원의 것과는 다른 주사기였다. 표면은 은색 플라스틱이었으며 주사 바늘이 볼펜심처럼 감춰져있고 손가락 두 마디 만한 크기였다.
그의 목에 주사기를 대고 꾹 눌렀다. 바늘이 즉시 튀어 나와 몸속에 수면제를 투여했다.
“아... 죽기 싫어...”
찬우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현주는 시선을 돌렸다. 발걸음을 옮겨 캐비어를 착용한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신라그룹과 기연합 지휘관에게 연락해 결과를 보고 하는 중이었다.
현주는 심신이 살짝 지친 나머지 평소처럼 씩씩한 말투가 안나왔다. 옅게 웃음을 짓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없었으면 절대로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우린 전우니까요. 앞으로도 화이팅입니다.”
“예, 화이팅입니다.”
현주를 둘러싼 다른 한 사람은 신이 나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현주 씨가 아니었다면 우린 아마 큰일 났을거요. 정말 머리가 좋으시더이다. 팀장에서 차장급으로 승진하셔도 되겄소.”
“우리 신라그룹과 오성그룹의 멋진 팀플레이였습니다! 언론사에 제보하면 좋은 기삿거리가 될것 같아요. 특히 저희를 지휘한 현주 씨의 활약을 크게 알리면 온 국민이 듣고 정말 대단하면서 저마다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울 겁니다.”
“야야,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현주 씨, 우선 이걸 계기로 나중에 한번 모여서 밥이나 한끼 하시죠. 정기적인 모임도 괜찮구요. 모임 이름은 임현주와 신사들, 줄여서 주신(酒神) 어떻습니까? 술 잘먹는 신들의 모임이라고 해서 주신이라는 뜻도 되고 말이죠.”
“재밌는 이름이네요.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하죠.”
현주는 만면에 웃음꽃을 피웠다. 남자 다섯이 홍일점인 현주를 둘러싸고 어느새 띄어주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렇다보니 평소 남성미 넘치던 그녀의 행동이 절로 여성스러워졌다.
또다른 한 사람은 캐비어 안쪽에서 고가의 라이카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자자, 우리 기념 사진이나 한장 박읍시다. 현주 씨가 가운데 서고요.”
찰칵.
현주를 사이에 두고 모두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을 먼 곳에서 지켜보던 한 사람.
“후후, 이제 내가 나설 차례네.”
강미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