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영애의 손에는 전에 없던 스마트 폰이 손에 쥐어있었다.
“말이 잘통했습네다. 현장 지휘관에게서 육공트럭을 빌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네다.”
“그거 잘됐군.”
영애가 지휘통제실을 나오면서 젊은 부관 한 명도 뒤따라나왔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키도 크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모인 잘생긴 사내였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은 함께 지하도를 빠져나왔다.
부관의 통제로 바깥에서 차량을 정비중이던 운전병에게서 육공트럭을 인계받았다.
우주는 맹수를 화물칸에 싣고 나서 영애와 함께 차량에 탑승했다.
영애는 떠나기 전 차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자신들을 위해 잠시나마 애써준 부관에게 웃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네다. 꼭 무사하시기를 바라고, 지휘관님께도 연전연승으로 조국에 승리를 안겨다 주길 기원한다고 안부전해주십디오.”
“예. 꼭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애 씨.”
“네?”
젊은 부관은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영애를 바라봤다. 그 표정이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귀중하고도 신비로운 것을 보는 것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립니다만, 연락처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뵙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때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저랑 담소를 나누면 어떠신가요?”
영애는 잠시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당황하거나 수줍어하지 않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귀관은 상관에게소, 근무 중에 에미나이나 꼬시라고 배웠습네까?”
“예?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에미나이 꼬시느라 쓸데없이 시간 허비하지 말고, 적 하나라도 더 죽일 수 있게끔 총검술이라든지 연마하라는 겁네다.”
영애가 차가운 표정을 짓고 내뱉은 말에 부관은 어쩔줄 몰라하며 우물쭈물 거렸다.
이에 우주가 대충 상황을 정리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고마웠소. 우린 이만 가보리다.”
육공트럭은 미끄러지듯 부대를 빠져나갔다.
다시금 텅빈 도심을 홀로 내달리며 우주가 물었다.
“낭자가 좋아서 그러는 것 같은데 싫어도 적당히 거절하면 되지 왜 이리 무섭게 말하는거요?”
“무섭게 해야됩네다. 그래야 썩어빠진 정신상태가 고쳐지지 않겠습네까?”
“호감이 드는 이성에게 연락처를 물어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소.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밖이라면 물론 그래도 되겄지요. 하지만 우리는 일반인이 아닙네다. 누릴 것 못누리고, 즐길것도 참아가며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하는 게 사명인 군인인기라요.”
“우리?”
운전하느라 앞을 보고 있던 우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영애 낭자도 군인이오?”
“예?”
“방금 우리라고 했잖소.”
영애는 말이 헛나온걸 느끼고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당황한 표정으로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부랴부랴 상황을 수습하느라 애써 정색하면서 대꾸했다.
“내래 언제 그랬다는 겁네까? 만약 했어도 말실수였을 겁네다.”
“그런데 왜이리도 당황하는 거요?”
“당황한 적 없습네다. 그리고 사람이 말을 하다보면 실수 할 수도 있지 이렇게 꼼꼼하게 지적하시면 내래 숨막혀죽습네다.”
그녀가 서슴없이 죽는다는 말을 꺼내자 우주가 조금 당황하면서 대충 얼버무렸다. 어차피 큰일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 그녀의 말실수인지 뭔지 진의여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마츠다이라에 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라고 한적이 없는것 같소.”
“그렇디요? 그리고 내래 대장님을 사모하지, 다른 사내놈들과는 말조차 섞기 싫은기라요. 내래 당장 마음 같아서는 이 마빡에다가 사내놈은 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면 말걸지도 말아달라고 대문짝만하게 써놓고 다니고 싶습네다.”
“하하하.”
우주는 가볍게 웃고 나서 아까부터 계속 영애의 손에 쥐여있던 스마트 폰에 관해서 물었다.
“그건 왜 받아온거요?”
“어떤거 말입네까?”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 말이오.”
“아, 이거 말입네까. 이건 휴대폰은 아니고 영관급 지휘관에게만 제공되는 군용 비상 단말기입네다. 쥬피터 S5 라고 불리는건데 전화 기능은 쓸수 없고 오로지 채팅으로 모든 지휘관과 대화를 할 수 있습네다. 바깥에 야자수 톡이 있다면 군에는 인트라 톡이 있디요.”
우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작전 시에는 통화가 더 빠를텐데 왜 채팅을 하는거요?”
“통화가 물론 빠릅네다만, 군에서 쥬피터 S5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겁네다. 내 구역에서 일어나는 일 말고도 다른 곳의 소식도 알 수가 있는기라요.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휘관이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가 있디요. 육군본부가 마치 트위터를 사용하는 것처럼 1분이 멀다하고 계속 톡을 보내옵네다.
지휘관은 그것만 읽으면 전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파악은 되니까 그야말로 쉽고 간편하고, 작전에 도움도 되디요. 애초에 이 쥬피터 S5는 연락을 주고받는게 목적이라기 보다는 그때그때 기록을 남겨서 모든 지휘관에게 상황을 널리 전파하는데 의미가 있습네다.”
“구...”
우주는 '군인 신분도 아니면서 어쩜 그리 잘알고 있소?' 하고 물어보려다 얼른 말을 집어 삼켰다. 목구멍 깊숙이 꾹꾹 눌러넣었다. 그녀를 배려한다기보다는 이때부터 그의 속에서 영애의 정체에 관한 왠지 모를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지휘관들이 다 갖고 있다면 위험한것 아니오? 행여나 타인에게 해킹을 당하거나 적군의 손에 들어가면 큰일이 날텐데.”
“그건 걱정마시라요. 방위산업체가 관리하는 쥬피터 S5의 군용 중계기가 전국 곳곳에 따로 설치되어 있고, 사용 설명서에는 전투를 앞두고 우선 순위로 파기하라는 지침이 적혀있습네다. 그럼에도 파기를 못했을 시에는 해당 부대가 전투를 치르는 중이다 싶거나 지휘관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싶으면 육군본부에서 임의로 판단한 뒤 원격조종으로 바로 폭파시킵네다.
”
“그럼 지금 낭자의 손에 있는건 뭐란 말이오. 지휘관도 아닌데 갖고 있어도 되는거요? 갑자기 폭발해서 다치는건 아닐까 무섭소.”
“아, 이건.”
우주가 정곡을 찌르자 영애는 또한번 당황하기 시작했다. 등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시선을 돌리며 변명거리를 찾느라 고심하는 눈치였다.
영애는 내심 당황하는 티가 묻어난 채로 3초만에 즉시 대답했다.
“사실, 우리 아바이께서 쥬피터 S5의 개발자입네다. 단말기를 리셋시키고 특정 코드를 입력하면 육군본부의 원격조종을 무마시킬 수 있디요.”
“아까 말하기에, 낭자의 아버님께서는 자동차 정비소 사장이 아니었소?”
“그건 젊었을적 하셨던 일입네다. 남조선에 와서는 방위산업체에서 연구원으로 일하셨습네다.”
“아하, 그랬었군.”
이로써 우주는 확실히 알았다.
영애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자동차 수리공에서 엘리트 연구원이 된다는 것은 보통 상상이 되질 않는다.
“아무, 아무튼,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됐고, 내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나 알아볼랍네다. 이제부터 바쁘니까 말시키지 마시디요. 내래 집중할 때 말시키는거 제일 싫어합네다.”
“알겠소.”
우주는 단답을 하고 나서 운전을 하는데 집중했다. 영애와 관련된 문제는 일단 두 번째였다. 곧 있으면 청와대에 도착한다. 마츠다이라를 만난다는 생각에 온몸이 근질거렸다.
얼마지나지 않아 쥬피터 S5를 묵묵히 바라보던 영애가 문득 말을 꺼냈다.
“양평에서 말입네다.”
우주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그에게는 곧 있을 전투가 중요했다. 대충 흘려들을 생각이었다.
그에 반해 영애는 조금 놀란 얼굴로 쥬피터 S5로 부터 시선을 떼지 않고 계속 바라보며 말했다.
“거대한. 아주 거대한 공성로봇이 양평에서 서울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입네다.”
“공성로봇?”
우주는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 골치아픈일이 생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영애는 계속 말했다.
“어찌나 강력한지 군에서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네다. 앞길을 무력하게 내주고 있다지 뭡네까? 보고에 의하면 적들은 그것을 헤라클레스라고 부른다고 합네다.”
“헤라클레스?”
“이름 한 번 거창하지 말입네다.”
“위력이 어떤진 몰라도 골치 아픈 일이 늘어난건 확실한 것 같소.”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헤라클레스에 관한 이야기는 뒤로 한 채 우주는 일단 청와대로 향했다.
***
청와대 상황은 무척이나 안좋았다.
마침내 마츠다이라는 이세종 대통령이 있는 집무실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청와대 방위를 일임받은 909 특임대의 격렬한 저항으로 불필요하게 3일이라는 시간을 허비하는 등 예상치 못하게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그는 끝내 목적 달성이 코앞에 있었다.
“(신인류라 불리는 수라에 이어서 특수한 능력을 갖고 있는 데바라는 존재가 세상에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작에 알았다면 이렇게 힘겹지만은 않았을텐데 말이지. 이게 다 하시도루의 능력 부족이다. 내게 미리 알려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커헉...!”
청와대 내부 복도.
맹수 어드벤스를 착용한 마츠다이라의 눈앞에서 송은혁 대위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비장하게 무릎을 꿇었다.
주변에는 그의 부하인 문상석이 엉망진창이 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실력은 나름 쓸만했다. 그러나 신진루이 같은 오기가 부족했어. 진정 날 이기려 했다면 더욱 절박한 심정으로 달려들어야 했을 것이다. 더구나 초능력까지 있는 자가 말이야.)”
쑤컹!
마츠다이라는 송은혁의 가슴을 꿰뚫었던 고주파 블레이드를 거둬들였다.
“아...!”
송은혁은 그대로 피가 솟구치며 상체가 뒤로 넘어가며 쓰러졌다.
마츠다이라는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며 이세종 대통령이 있는 방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 앞을 가로막는자는 이제 없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무려 3일이 걸렸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이제 됐다. 다 왔으니까.
이윽고 두 마리의 용이 새겨진 문앞에서 마츠다이라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대통령 집무실의 문고리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대일본제국은 반드시 부활한다. 오늘을 기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