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이후 우주가 급하게 도착했을때는 대략 10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대통령 집무실 앞 복도.
콰아앙!
복도의 한쪽 벽이 와르르 무너지며 맹수를 착용한 우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앞에 대통령 집무실 문고리를 쥐고 있는 맹수 어드벤스, 즉 마츠다이라가 보였다.
우주는 성난 사자처럼 포효했다.
“(마츠다이라! 네놈을 죽이러 왔다!)”
마츠다이라는 천천히 옆을 돌아보며 외부 스피커를 통해 차분하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무너진 콘크리트의 잔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석면 가루. 우주가 착용한 눈앞의 맹수.
마츠다이라의 태도에는 여유가 느껴졌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일찍 온것이지? 료코를 구하러 가는게 먼저가 아니었나?)
“(내가 네놈 따위에게 속아넘어갈줄 알았더냐! 허튼 수작 부리지 말거라!)”
-(구출됐다는 소식을 들었나보군.)마츠다이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료코가 살아있어서 만족했나? 널 만나면 하나 묻고 싶은게 있었다. 대체 그녀를 어떻게 회유한것이지? 내가 알던 쿠로가네 료코는 정신력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병사였다. 대일본제국을 향한 그녀의 애국심은 일말의 의심도 필요없을 정도로 뛰어났지.)
“(네 질문에 대답할 의무는 없다.)”
-(아니, 있다. 허소윤에 관해서 좀 말해줄게 좀 있지. 어떤가? 서로 교환하는 것이.)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라면 당장 관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소윤이 일본으로 간 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보군?)우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를 갈며 대꾸했다.
“(100여년 전 이야기는 다시 들먹거리지 마라.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미 다 끝난 이야기이다. 남은 것은 그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복수뿐이다!)”
-(한? 한을 풀어준다고?)
마츠다이라는 작게 코웃음 쳤다.
-(살아있는 사람의 한을 풀어준다는 소린 난생처음들어보는군. 노망이라도 들은겐가?)
“(뭐라고?)”
우주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마츠다이라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을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 했겠다! 양평에서 오는 중인 거대한 기계를 기다릴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말거라! 그 전에 아작을 내줄테니까!)”
-(주변 파악을 잘 못하는 것 같은데, 시간을 벌 속셈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여길 봐라.)마츠다이라는 손가락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가리켰다.
-(이 고철덩어리가 알려주는 정보에 의하면 이 안에 총 여덟 사람이 있다는군. 개중에는 이 나라의 주인도 있을 것이다.)
“(이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다. 네놈이 말하는 그분은 대통령님이시다!)”
-(요즘시대에는 왕을 대통령이라고 부르나 보군. 그래 좋다. 아무튼 너희 대통령이 이 안에 갇혀있다.
그럼, 넌 그를 구할 수 있을까? 내가 그에게 너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데 말이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줄 아나?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통령을 죽일 수 있다는 소리다. 네가 날 공격하기도 전에 말이야.)그는 왼쪽 어깨에 달린 다연장 로켓포를 180도 회전시켜 대통령 집무실을 조준했다.
우주가 흠칫하는 모습을 보며 마츠다이라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너희 대통령을 인질로 삼아서 시간을 벌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벌 수 있다. 난 그저 대화가 하고 싶은 것 뿐이야.)
“(네 부하들은 다 죽거나 붙잡혀서 이제 너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급박한 상황에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때가 아닐텐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게지.)
“(무엇이?)”
-(처음에 물었듯이 너와 료코의 관계가 말이다. 그녀를 대체 어떤식으로 세뇌시킨 것이냐?)
“(분한가?)”
-(분하다는 말이 정확하겠지. 애써 키운 개가 주인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다른 새주인을 따라간다면 기분이 좋겠는가?)
“(주인이 무정하고 매일 같이 매로 다스리는 인간이라면, 개로서는 그 주인을 떠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지도 모르겠지.)”
-(역시 먹을 것으로 꼬드겼는가?)
“(시끄럽다! 료코를 개취급하지마! 네놈은 그래서 문제다! 그래서 누가 널 따르겠는가!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제국주의 부활이라는 미친 망령된 생각만 쫓고 있는 녀석이!)”
마츠다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리 있는 말이다. 사람을 개취급하면 안되겠지. 그렇다면 역시 내 문제란 말인가. 내가 더 다정한 인간이었다면 그녀가 날 배신하지 않았을것이라 생각하나?)마츠다이라의 태평한 말에 우주가 그를 노려보며 다그쳤다.
“(우린 지금 한가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전투 상황이다! 네놈은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감히 무슨 배짱으로 해괴한 잡담을 떠벌리는 것이냐!)”
-(해괴하지 않다. 잡담도 아니다.)
“(그럼 뭐하자는 것이지?)”
그 와중에 우주는 그의 허점을 찾으려 무척 애를 썼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알게 모르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공격할 방안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마츠다이라가 대통령 집무실 앞에 서서 대통령을 인질로 삼고 있는 이상 먼저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시간을 끌어야 할 판이다.
줄리엣에게 몰래 속삭였다.
“줄리엣.”
<네 팀장님.>
“군용 통신 채널을 찾아서 군부대와 연락할 방법을 찾아봐라. 기연합도 좋다.”
<알겠습니다. 찾아서 어떻게 전할까요? 좋은 작전이 있으십니까?>
“녀석이 입고 있는 맹수 어드벤스를 무력화시키게끔 EMP탄을 이곳에 쏜다든지...”
도중에 줄리엣이 말을 가로챘다.
<맹수와 그 양산형 기인 맹수 어드벤스는 EMP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완벽 방어 가능합니다.>
“......”
우주는 눈을 감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집무실 안쪽에 비밀 통로가 없는지 물어봐라. 아니면 내가 시간을 끄는 동안 천장이나 벽을 뚫어서 탈출시키는 방법이라든지 일단 이쪽 상황을 모두 말해주고 그쪽에서 서둘러 대책을 강구하라고 요청해.”
<모두 이해했습니다. 서둘러 통신 채널을 찾아 군부대와 기연합측에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줄리엣과 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마츠다이라는 아무것도 모른 채 혼자 떠들고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상 우리의 임무는 실패했다. 하시도루, 이완구, 박찬우와의 교신이 두절된 것을 보니 다 끝난 모양이더군. 이대로 나혼자 너희 대통령을 사로잡아봤자, 사면초가인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 말고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나. 본래 계획대로라면 서울을 장악한 상태에서 일본 본토에서 보낸 증원군을 기다렸어야 했을텐데 말이야.)
“(모든걸 포기했다는 말로 들리는 군.)”
-(변명의 여지도 없지. 자, 그러니 서로 잡담이나 나누자고. 어떠한가? 다른곳은 몰라도 이 장소에선 내게 주도권이 있어. 너야말로 시간을 벌어야 할 입장일텐데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닌가?)마츠다이라의 화법에는 언제나 함정과 계략이 숨겨져 있다.
그로인해 100여년 전 몇차례 당한 적이 있지만, 이젠 당하지 않는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수차례 되뇌이며 그가 뱉은 말의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머리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성격인 우주로서는 참으로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좋다. 그럼 소윤 낭자에 관해서 계속 말해봐라. 조금 전 네놈이 말하길 그녀가 살아있다고 한것 같은데?)”
-(그랬지.)
마츠다이라는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물론 맹수 어드벤스의 헬멧에 가려져 외부 스피커로 들리는 소리로만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닌척하면서도 역시나 관심이 있었군. 그러고 보니 그 계집에 관해서도 한가지 물어볼게 있다.)
“......?”
-(일단 이것부터 말해주지. 허소윤은 확실히 살아있다.)
“!”
우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허소윤과의 지난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의 눈은 빛이 났고, 그의 귀는 마츠다이라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바짝 긴장했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것이냐.)”
-(확실한 사연이 있지. 아주 기막히고도 놀라운 사연이. 그 계집을 일본으로 보낸지 네 달이 지나서였다. 어느날 본토로부터 한 통의 서신이 당도했지.)
“(허소윤과 관련된?)
-(그렇다. 허소윤을 사갔던 켄신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가 말하길, 그 계집이 온지 두달째 되는 시점부터 나날이 배가 부르고 마치 애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참으로 희한했지. 켄신은 본래 어린 종을 두고 몰래 남색을 즐기던 자였어. 그 계집을 사간 이유도 단순히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쌓은 인망과 덕망을 보존하려면 정상적인 인간처럼 보여야 했으니까. 결혼은 비뚤어진 성가치관을 가리기 위한 위장막에 불과했다.
그런면에서 일본말도 못하고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조선 계집은 최고였지. 타국에 아는 사람도 없고, 집안에 가둬두기만 하다가 필요할때마다 꺼내보이면 되거든. 그랬는데 그 계집이 생뚱맞게 임신을 하다니, 켄신이 내게 대단히 화를 내더군.)
“(뭐, 뭣이!?)”
마츠다이라의 말에 우주는 엄청 놀랐다.
뱃속의 아이라고 하면, 속으로 덜컥 짚이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자신의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것말고는 딱히 떠올릴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허소윤에게는 당시 남편을 비롯해 정분을 나누는 사내도 없었다. 그녀가 일본으로 팔려가기 직전까지 함께 어울리고 몸을 섞은 사내는 자신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어떻게 되긴, 서신을 받자마자 다음날 급히 본토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켄신의 집안은 일본 군부와도 긴밀하게 연줄이 닿아있기에 가능한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성의를 보여야만 했지. 난 사카이 항에 닿자마자 켄신이 사는 교토까지 말을 타고 달려갔다.
이윽고 그의 자택에 도착해서 그 계집의 부른 배를 보았을땐 정말로 기가막혔지. 켄신이 말했던대로 임신이 맞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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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소윤과 관련된 이야기는 146~151화를 보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