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209화 (209/285)

209화

마츠다이라가 살며시 입꼬리를 추켜 올렸다.

-(켄신이 그랬지. 자신이 비록 남색을 밝히긴 해도 그 계집과 한 번의 성관계를 가져 자신의 대를 이을 아이를 낳을 생각이 있었다고. 그런데 이제 부정이 타서 못써먹겠다고 하더군. 그리고 죽이기에는 주변의 눈이 두려우니 앞으로 새로 본처를 들이고 첩으로 삼을 생각인 것 같았어. 모두에게 존경 받고 인품이 자자하기로 소문난 켄신이었으니까. 처를 직접 살해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겠지. 좌우간 내가 그 뱃속의 아이를 어찌 했는줄 아느냐?)

“!”

우주는 끔찍한 짓을 자행했을거란 생각이 들어 묻지 않았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우선 말을 돌렸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허소윤이 정말로 살아있다면, 그 살아있는 이유도 네놈이 요상망측한 주술을 사용해 봉인을 해서 였겠지! 그 외에 별다른 수단이 있었겠느냐!)”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라.)

“(봉인이라는 대답 한마디면 충분하다!)”

-(허소윤이 여태 살아있는 이유는 봉인 때문이 아니다. 네게 묻지. 내가 왜 그 계집을 봉인해야 하지? 일본으로 힘없이 끌려온 한낱 계집일뿐, 네놈처럼 성가신 존재도 아니었는데 말이야.)마츠다이라는 사실이라는 듯이 양팔을 펴보였다.

그러고 보면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성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봉인이 아니라면 그녀가 어떻게 오래 살 수 있었단 말이냐? 그리고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을 네놈은 어떻게 알았지?)”

-(그건 내가 평양에서 깨어난 뒤였다. 레지스트 쉴드를 나와 하시도루를 만났을때였지. 하시도루는 내게 그 계집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바꿔주었고, 처음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지. 당시 허소윤이 뭐라고 했는줄 아나? 네 입장에선 들으면 기가 막힐지도 모르겠군.)우주는 꼴깍 침을 삼켰다.

하시도루와 허소윤이 어째서 서로 알고 지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고,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불길한 생각이 하나 있긴 했지만 부디 그러질 않길 바랐다.

“(그녀가 뭐라고 말했지?)”

-(이번 일을 앞두고 그녀가 그러더군. 대일본제국의 부활을 기원 한다고.)

“하하.”

우주는 터무니 없어서 웃고 말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세월이 모든걸 잊게 만들었을까?

지난날 허소윤이 했던말이 떠올랐다.

“전 제 운명을 탓할 생각은 없사옵니다. 그러나 굴복할 생각도 없사옵니다. 지금 제 자신은 비록 팔려가는 처지이오나 일본에 가서도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세상 어느 곳에 있더라도 내 나라를 위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분명 최선을 다할 것이니 안심하여 주십시오.”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당당하고도 자신감있게 포부를 밝히던 그 각오는 다 어디갔을까.

하긴 그렇다. 일본에서 평생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타국에서 제 한 몸 지키는 것도 힘든데 언제까지 애국을 하란 말인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허소윤은 무려 100여년이다. 그 기간 동안 변하지 않는게 되려 이상할지도 모를 일이다.

한가지 의문이 든다면, 조국이 해방된 이후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왜 그곳에 계속 있었는지 그것만이 궁금할뿐.

마츠다이라는 계속 말했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어보니 일본 사람 다 되었더군. 일본어도 능숙하고 더구나 창씨개명까지 했지 뭔가.)

“(그럴 리가...)”

-(정 못믿겠다면 그 계집의 성과 이름을 알려주지. 나중에 일본으로 가서 찾아 보거라. 단, 그때까지 살아있다는 가정하에 말이지.)마츠다이라는 조소를 날렸다.

그가 그러는 사이 우주는 디스플레이창으로 묵묵히 시선을 옮겼다.

줄리엣은 청와대 근처에서 대기중인 영애를 통해서 기연합과 군부대 측에 연락해 현장 화면을 생중계 중이었다.

대신 이쪽에서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일단 보이스를 제거하고 영상만을 실시간으로 전송했다. 그리고 그들이 텍스트로 보내오는 작전 계획을 눈에 새겨두었다.

기다리기만 하는 우주의 입장으로서는 작전이라고 하기 무색할 정도로 아주 간단했다.

[0. 반갑습니다. 신우주 씨. 오성그룹 공학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성기왕 박사입니다.]

[1. 우리는 건물 밖에서 슈퍼 메가 하이드로 포를 발사할 것입니다.]

[2. 굴절이 불가능한 광자에너지는 우측 벽을 뚫고 직선으로 적을 강타.]

[3. 맹수 어드벤스의 장갑은 광자에너지를 흡수하거나 반사시킬테지만, 맹수와 달리 그 위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4. 이러한 이유로 적은 큰 데미지를 받고 튕겨져 나갈 것이고, 심지어 사망에 이르게 될것입니다.]

[5. 적의 자리 이탈과 동시에 슈퍼 메가 하이드로 포의 가동이 중단되면, 신우주 씨는 즉시 대통령의 안전을 확보하여 주십시오.]

[6. 우리는 뚫린 외벽으로 곧바로 침투 부대를 보내 적을 제압하거나 사살할 것입니다. 승리를 기원하겠습니다.]

우주는 조용히 줄리엣에게 물었다.

“발사 신호는?”

<확인해보겠습니다.>

줄리엣이 텍스트로 그들과 교신했다.

<준비가 완료된 상태이며 앞으로 5분 뒤입니다.>

“알겠다.”

그와 동시에 마츠다이라가 재차 말을 걸어왔다.

-(하나 물어보지. 네가 허소윤을 신경쓰는 것을 보면 분명 무언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혹시 그 계집과 정분을 나누는 사이였나?)

“(그 뱃속의 아이가 내 씨라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지 않고서야 허소윤의 복수를 하겠다느니 하면서, 그 계집에게 이리도 미련을 갖을리 없지 않겠나.)우주는 대답에 뜸을 들였다.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네게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쓸데 없는 소리는 그만 집어치워라.)”

말을 마치자마자 문득 한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녀석은 시간을 벌 속셈이 아니라하면서도 계속 대화를 청하며 시간을 벌고 있다. 어째서지?’

우주는 호흡을 가다듬고 마츠다이라를 천천히 노려보았다.

‘무언가 있어. 녀석은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것이다. 분명.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해.’

하지만 시간이 없다.

곧 있으면 슈퍼 메가 하이드로 포가 발사된다.

우주는 애써 냉점함을 유지했지만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인해 마음이 초조해지고 등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마츠다이라를 상대할땐 언제나 계략과 함정을 조심해야한다.

한편, 손에 아무런 무기도 쥐고 있지 않은 마츠다이라의 태도에는 여유가 묻어났다.

-(허소윤은 말이야. 생명력이 정말로 질기더군. 내 보기에 불사의 생명력을 얻은 것 같았어.)

“(불사의 생명력?)”

-(네가 봉인된 이후로 40년이 지나도록 그 미모가 늙지도 변하지도 않고 한결같더군. 켄신이 여든의 나이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차 찾아가서 그 계집을 봤을땐 정말로 놀라웠지. 생기 있고 매끄러운 피부도 여전하고, 대한제국 시절 핀 꽃은 절대 시들 생각을 하지 않았어. 왜 그랬을까? 자넨 그 이유를 혹시 아나?)

“(100년을 넘게 그녀를 본적이 없는데 알리가 있겠나.)”

-(그렇겠군. 난 하나 짐작은 가는데 말이야. 연관성을 찾기는 조금 애매해. 나중에 천천히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면 모를까 현재로선 답이 안나오더군.)마츠다이라는 이어 말했다.

-(조금 전 너와 마주치기 전, 자신을 송은혁이라고 밝힌 자와 싸웠었다. 그 자의 기술이 정말로 특이하더군. 너나 나 같은 신진루이가 아닌 기괴한 능력을 발휘했었어. 그래서 그가 어떻게 그런 능력을 얻게되었는지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잠시 싸움을 멈추고 말을 걸어보았다.)

“(데바를 말하는 것이냐?)”

-(그래 자신처럼 초능력을 쓰는 자들을 모두 데바라 일컫는다 하더군. 그때 번뜩 드는 생각이 허소윤이란 그 계집이 혹시 데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안그런가?)마츠다이라의 말을 듣고 나서 우주는 무릎을 탁치듯이 이해가 됐다.

‘그런거였나!’

그녀가 데바라면.

‘허 낭자가 임신한 아이는 내 아이가 맞다! 아이를 임신함으로써 그녀가 데바가 된것이야! 불사의 능력을 가진 데바 말이다!’

우주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때 줄리엣이 다급하게 말했다.

<팀장님. 우측 2KM 지점에서 슈퍼 메가 하이드로 포가 발사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당도하는데 3초 걸립니다.>

우주는 그 즉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돌연 눈앞의 마츠다이라를 보며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것은 아주 우연한 발견이었다.

마츠다이라의 고개가 살짝 왼쪽 벽으로 향해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설마 슈퍼 메가 하이드로포가 발사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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