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초행길이었던 우주는 미국 지리를 잘 알고 뉴욕에서 대학을 졸업한 전문 여성 통역사를 현지에서 만나 함께 다녔다.
우주는 통역사에게 미리 신분을 밝힌 상태였고, 미국인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가릴 생각에 선글라스를 끼고 페도라 모자를 썼다. 그는 한때 미국 뉴스에도 자주 소개된 적이 있다.
오래전 일이라지만 눈썰미 좋은 누군가가 그를 알아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요즘 2백만 와트 사건으로 인해 그 소식이 일파만파 퍼져 바다 건너 미국까지 왔을터였다.
“남들 시선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안내해 드릴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한 명의 여행가이드와 한 명의 여행객이 아닌 부부여행객처럼 자연스럽게 보이게끔 할거예요. 그러니 부디 저만 믿고 안심해주세요.”
“세심한 배려에 감탄했소. 역시 우린 정이 많은 대한민국 사람이외다. 신경써줘서 고맙소.”
뉴욕. 서로가 편한 여행객 복장을 한 채 통역사의 안내로 월 스트리트를 걸어보기도 하였다. 그가 회사로 스카웃할 직원을 만나려면 저녁쯤에나 가능했다. 해가 질때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우오오! 여긴 정말로 신기한 곳이로다!”
국적불문 다양한 인종들을 길에서 마주치고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고풍스럽고 위풍당당한 건물들의 외관에 그저 감탄, 감탄, 감탄! 쉴새없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여긴 무슨 신화속의 신전을 닮았소이다.”
“뉴욕 증권 거래소라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유명한곳이예요.”
“그렇담 사진 한 방 찍어야겠군! 여기 사진 좀 박아주시오.”
우주는 같이 다니던 30대 초반의 여성 통역사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이왕이면 DSLR 같은 카메라가 좋았겠지만, 그는 카메라에 관심도 없고 여행이 목적도 아니었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이렇게 찍어보리다!”
우주는 쓰고 있던 페도라 모자를 벗어서 뉴욕 증권 거래소를 배경으로 멋지게 포즈를 취했다. '원반 던지는 사람' 이라는 조각상 포즈였다.
“자, 찍습니다. 치~즈.”
찰칵.
“한 번 더 찍을게요!”
찰칵!
“됐습니다!”
“어디, 어디. 어디 잘 나왔나 봅시다!”
우주가 사진을 보러 그녀에게 뛰어갔다.
그렇게 한창 즐거운 와중에 갓길에 정차되어 있던 차 안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세 명의 미국인.
FBI 요원들이었다.
우주의 입국 사실은 JFK 공항을 통해 FBI에 알려지게 되었다.
{신우주가 어째서 이곳에 온 것일까요?}뒷자리에 앉아있던 톰슨이 옆자리 빌에게 묻자 그가 대답했다.
{출입국 카드에 적힌대로 정말로 여행이 목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니면 뭡니까?}
{버뮤다 삼각지대에 있는 타이탄급 사탄을 잡기 위해서 MPO 아메리카에서 섭외를 한 것이 아닐까?}{그건 좀... 애매한데요. 만약 MPO 아메리카측이 섭외를 했다면 당장 리무진을 보내 모셔 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 여행객 옷차림 하며 사진 찍고 즐거워하는 폼을 보니 단순히 휴가를 위해서 비밀리에 놀러온 것 같습니다.}FBI가 우주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딱 하나다.
우선 그가 2백만 와트가 나와서는 아니다. 그런데도 관심을 갖는 이유는 3년 전 미국과 일본이 대한민국을 침략하려던 합동 작전이 거의 우주가 다 했다고는 볼 순 없지만서도 아무튼 그의 방해로 실패한 전력이 있기때문이었다.
그 후 우주는 미국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손꼽혔다.
추후 미국을 테러할 가능성이 있는 테러리스트들을 간추린 비밀 보고서에서 그는 위험도 중급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우주가 테러리스트 단체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고 그와 관련된 일조차 한적이 없는 무고한 일반인이기에 대놓고 입국 거부 같은 행위는 불가능했다. 오직 감시만이 전부였다.
{이봐 해리스. MPO 아메리카에선 뭐라고 해?}빌이 운전석에 앉아있던 해리스에게 물었다. 해리스는 이제 막 통화를 끝낸 참이었다.
{조만간 신우주를 미국으로 초청할 계획은 있지만서도 현재까진 초청한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빌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둘 중의 하나군. 테러가 목적이라든지 아니면 단순히 여행이든지.}옆자리 톰슨이 대꾸했다.
{괜히 복잡하게 가지 말죠. 제가 보기엔 그냥 단순히 여행같습니다. 왜 연예인들 그런거 있지 않습니까. 팬들과 기자가 모르게끔 소리소문 없이 해외로 나가서 휴가즐기다오고 그런거 말입니다.
}{그럴수도 있겠지. 뭐 여행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우리가 해야할 일은 어차피 신우주가 출국할때까지 계속 감시를 해야된다는 거야. 감시만.}그때 운전석의 해리스가 당황하며 말했다.
{비, 빌 팀장님! 신우주와 여자가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잠깐 얘기를 나누던 사이에 우주가 감쪽 같이 사라졌다. 그들은 닭쫓던 개 지붕쳐다보는 신세가 돼버렸다.
해리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당장 본부에 연락하죠!}
빌이 곧바로 대꾸했다.
{쉣!(Shit!) 무슨 이까짓 일로 본부야! 어차피 출국일은 내일이야! 그동안 우리가 찾다 못찾으면 공항으로 가면되고 출국시간까지 공항에 안나타나면 그때 신고해도 돼! 괜히 부산떨 필요는 없다구!}
***
“휴우, 이제야 따돌린 것 같군.”
벽에 자유로운 그래피티가 넘쳐나는 골목.
우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옷을 벗었다. 미행쯤이야 100여년 전 일본 군인들에게 숱하게 받았기에 그런 쪽으로 감각이 절로 발달했고, 덕분에 간파하기도 쉬웠다.
“어디서 나온 자들일까. 왜 나를 미행하는 거지?”
자신을 자꾸 뒤쫓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우주는 그 즉시 여성 통역사와 헤어지며 가방에 있던 옷가지들을 꺼내서 갈아입었다. 길 가다 흔히 마주칠만한 옷 잘 못입는 동네형 같은 스타일. 고등학교 체육시간에나 입을 법한 흰색이 들어간 남색 체육복이었다.
“여긴가...?”
우주는 통역사가 알려준대로 지도를 수시로 봐가며 어느 한 고급 아파트를 찾아갔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만날 생각을 하니 왠지 떨리는군. 한때는 국민첫사랑이란 호칭까지 얻었던 그녀라서 말이야.”
우주는 입구 계단에 쪼그려 앉아 어둠이 가라앉을 때까지 계속 기다렸다.
.........
......
...
.
“쿨쿨... 헛!”
어느새 잠이 들었던 그는 문득 눈을 떴다. 행여나 기다리던 인물이 지나간건 아닐지 졸린 눈을 번쩍뜨고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그런데 코앞을 보니 동전 몇 개와 지폐 두 장이 떨어져 있었다.
그는 혀를찼다.
“이곳 사람들은 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처럼 칠칠치 못하게 돈을 흘리고 다니는군. 나참. 내 이런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우주는 없이 살았던 적이 많았기에 공짜로 생긴 돈을 보고 주저함 따윈 없었다.
그것을 슬며시 바지주머니에 찔러두고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세 시간이 지나 오후 6시였다.
“다행이군. 아직 늦지 않았어. 소민 낭자의 말대로라면 이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때가 되었어.”
그가 만날 옛동료는 소민과 무척 친했다. 서로 멀리떨어져 지냈음에도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연락을 주고 받고 있었다.
“음?”
때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왠지 가벼운 소리로 보아 남성은 아니고 여성 같았다.
우주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만면에 웃음을 짓고 환한얼굴로 소리쳤다.
“수희 낭자!”
운이 좋았다. 그가 기다렸던 인물이 등에 백팩을 메고 음식물이 가득 담긴 쇼핑봉투를 가슴에 안고 걸어오고 있었다. 보통 영화속에서는 한 번이나 두 번 심지어 여러차례나 서로 길이 엇갈리던데 우주는 신이 도와준 건지 갈망했던 인물을 단번에 만날 수 있었다.
우주가 그녀를 부르자마자 수희는 마치 마법에 걸린듯 그대로 멈춰섰다.
그녀는 눈앞까지 달려온 우주를 보고 놀란 눈을 했다.
“어, 어째서 여기에?”
“오랜만이오. 보고 싶어서 찾아왔소이다.”
하나로 질끈 묶은 긴 머리와 진한 청바지에 분홍색 블라우스 차림. 2년 만에 만난 수희는 그야말로 청순한 대학생 같아 보였다.
“나를?”
“수희 낭자가 아니면 또 누구겠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소생을 미행하는 자들이 있는 것 같소.”
2년 전. 수희는 본래 계획했던 대로 신라그룹을 퇴직하고 곧바로 천하물산에 입사했다. 이는 신라그룹의 이선주 회장과 수희 간에 거래였으며, 수희를 원하는 곳으로 떠나보내주는 대신 이선주 회장은 샥스핀이 맹수의 기술을 훔쳤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었고, 수희는 그녀의 제일 친한 친구인 소민이 있는 곳으로 손쉽게 이직할 수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천하물산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오직 소민만을 바라보고 입사한 수희는 천하물산의 실소유주가 소민이 아닌 우주인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무언가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새로운 일자리에 만족했다.
몇달간 천하MSC에 합류해 우주와 같이 일하면서 서로 말을 터놓게 되었고, 기존에 우주에게 가졌던 호기심이 나날이 커져 그에게서 느껴지던 인간적인 매력이 야릇한 섹시함으로 다가오는 때였다. 당시 수희는 천하물산이야말로 내 평생 직장이라는 각오로 일도 짝사랑도 충실히 임하며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일이터져버렸다.
현재.
“이제 난 한국으로 가지 못해. 무서워. 그리고 두려워. 사람들이 힐난하는 시선을 어떻게 감당하니...? 너 같으면 참고 살 수 있겠어?”
우주는 식탁 의자에 앉은 채로 묵묵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녀가 하는 말에 어찌 대답해야할지 고심하는 얼굴. 그러다 집안을 둘러보았다. 수희가 사는 집은 아담하고 아늑했고, 꼭 필요한 가구만 갖다놔서 복잡한곳없이 깔끔했다.
“지난일과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쓰지말고 오직 나만 보고 와줄순 없겠소?”
“니가 내 남자친구도 아니잖아.”
고심 끝에 내놓은 답변이건만, 그녀의 칼같은 대꾸에 단숨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우주는 또다시 고심하는 얼굴로 지난날을 떠올렸다.
수희가 고통받았던 그때의 기억.
“난 아니야! 하늘에 맹세코 절대로 이런적 없어! 정말이야! 믿어줘!”
느닷없이 사장실 문을 박차고 뛰쳐들어온 수희는 신문의 헤드라인을 가리키며 우주와 소민을 향해 결백을 토했다.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우주의 시선이 멈춘 신문의 헤드라인.
‘본지가 단독으로 입수! 김수희, 반란자 제네틱스 한규만 회장과의 사이에 3살된 아들 있어!’
이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기사가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날 오후 인터넷에서는 수희와 한규만 회장과의 관계 의혹이 뜨겁게 불거졌다.
‘김수희, 지난 5년 간 한규만 회장이 스폰 봐줘.’
‘미국에 있는 3살 남자아이는 김수희와 한규만 회장의 자식일 가능성이 농후. DNA 검사만이 유일한 해결책.’
‘김수희는 왜 한규만 회장과 염문설이 났나? 목격자들에 의하면 김수희가 한규만 회장의 자택에 수시로 들락날락.’
이후 억울함을 토로하던 수희는 끝내 DNA 검사를 받았고, 미국에 있다는 그 남자 아이는 이혼한 친언니의 자식으로 판명되었다.
이로써 말도 안되는 논란이 그대로 잠식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우주의 통조림 가공공장이 불타고 나서 한달 뒤 더욱 기가 막힌 일이 터져버렸다.
‘속보! 충청도 산골에서 도주중인 한규만 회장의 비밀별장 발견! 옷장 서랍속에서 김수희와 박현아의 속옷이?’
‘한규만 회장의 비밀별장에 김수희와 박현아의 화장품과 신발, 옷가지 등이 발견되어 경찰이 즉각 조사에 나서.’
‘한규만 회장이 김수희와 박현아의 스폰이라던 소문이 결국 반은 맞고 반은 틀린것일까?’
‘김수희와 박현아. 한규만 회장의 도주 도왔나?’
‘김수희와 박현아, 한규만 회장의 도주를 도왔던건 아니라는 경찰측의 공식 발표. 하지만 그녀들의 소지품이 나온 이유는 아직 몰라.’
경찰의 공식발표가 있고 나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예전 한규만 회장의 비서, "한규만 회장은 반란을 일으키기 전 자신이 스폰을 대주는 여자 연예인들로만 구성된 기쁨조를 보유했었다" 라고.’
‘김수희와 박현아. 한규만 회장의 기쁨조 소속이 아닐까 하는 의혹. 한규만 회장을 포함해 제네틱스의 중역들과 비밀 별장에서 주말마다 난교 파티?’
다시 현재.
“누가, 대체, 왜. 그때 당시 내게 왜 그런 고통을 줬는지 모르겠지만서도 난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여기서 그저 평범하게 대학교를 다니며 일반인처럼 조용히 살고 싶어. 그게 내가 바라는 마지막 소망이야.”
수희는 흐느끼듯 몸을 작게 떨었다.
“후우...”
우주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를 꼬았다. 부엌 한 켠, 툭 치기만 해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처럼 서 있는 수희를 지그시 응시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소? 다 신라그룹이 벌인 짓이외다. 그럼. 계속 이렇게 당한 채로만 살거요? 나 같으면 그런 인생은 절대로 살고 싶지 않소. 명예회복이 중요하오. 명예회복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왜 먼 이국땅으로 쫓겨나서 살아야 하오? 억울하지 않소? 잘 생각해보시오. 나와 다시 갑시다.
단언컨대, 소생이 낭자에게 커다란 힘을 실어줄거요.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할 정도로 강대한 힘을 주겠소. 난 대통령도 알고지내는 사람이니까 허언을 떠벌리거나 불가능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외다. 부디 전처럼 날개를 펴주시오. 날개를 웅크리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내가 아는 당신의 본 모습이 아니니까.”
“우주야...”
수희는 슬픈 얼굴로 우주를 막연히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의 뺨을 타고 닭똥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내렸다.
***
“하앙! 하으응!”
푹신한 침대 위에서 우주와 수희가 서로 알몸인 된 채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하얀 이불에 덮인 두 사람의 하반신. 우주의 단단해진 고추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수희를 찔러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지난 날의 아픔을 다 잊으시오. 오늘밤. 오직 본능에만 충실합시다!”
“하아, 아앗! 그, 그래! 더 강하게 넣어줘. 아무생각도 안나게 해줘!”
솔직히 말해서 수희를 영입 하기 위해 오른 미국 여행길이 그녀와의 섹스로 마무리가 될 줄은 우주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