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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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那落).
보통 코끼리급 사탄이나 매머드급 사탄들을 잡기 위해서는 총 3페이즈로 이루어진 고된 전투를 헤쳐나가야한다.
마지막 3페이즈째에서 사탄은 잡힌다.
그러나 몇몇 희귀한 매머드급 사탄들은 총 2페이즈만으로 잡히는 경우가 있다.
공략 단계가 1단계 줄어들은 까닭에 어쩌면 쉬워보이고 간단해보이지만, 그 대신 난이도가 꽤 상승한다. 특히 마지막 2페이즈가 가장 어렵다. 마치 다른 평범한 사탄들의 2, 3페이즈를 동시에 합쳐놓은 것 같은 상당히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했다.
인류는 그 마(魔)의 2페이즈를 나락이라고 불렀다.
나락이 발동되면 사탄과 MSC팀원들을 중심으로 반경 1KM 지역에 거대한 결계가 생겨난다. 만약 결계가 펼쳐질때 사탄의 머리 위를 날아가던 비행기가 있다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상공에서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결계 밖에 있던 동물이 결계가 펼쳐지고 난 뒤에 안으로 들어오게 돼도 그 역시 즉시 나락에 빠진다.
나락이란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 사이에서 그저 괴수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환상의 세계라고 단정짓는 이들도 있고, 또는 평행 세계, 아니면 머나먼 우주 어딘가의 행성, 또 아니면 인류와 지구가 거쳐온 역사를 체험하는 타임머신이라고 정의된 바 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이 모든 것을 합친게 나락이란 설이 가장 유력했다.
사탄을 잡던 MSC가 나락에 빠지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특정 공간에 갇히게된다. 갇힌 자들이 살아남으려면 각 나락마다 주어지는 임무를 스스로 찾아 헤매야 하고, 그것을 해결해야지만 나락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면 마침내 현실세계의 사탄이 쓰러진다.
아울러 임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락에 빠진 개인의 정신과 현실세계에 남아있는 육체는 그 신변에서 일어나는 일부분을 공유한다. 예를 들어 나락에서 사망하게되면 현실세계에서도 죽음을 맞이한다.
이 때문에 어떠한 학자는 나락은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며 신이 내리는 형벌이라고 주장한다. 나락에 빠진 사람들은 단순히 꿈을 꾸고 있는 것 뿐이며, 그 꿈을 설계한 신은 바로 사탄, 사탄이 인간에게 시련을 주고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 자들에겐 현실세계에 있는 사탄이 직접 보이지 않는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 돌처럼 굳어있는 MSC 팀원들에게 벌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그저 한 학자의 주장일뿐이다. 대다수의 학자는 신을 믿지 않았고, 종교적인 철학에 기반을 둔 그의 주장이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여긴 나락이라고 하는 곳이예요. 나락에서 빠져나가려면 주어진 과제를 해결해야만하죠.}육감적인 몸매를 소유한 천유시가 바이저를 열고 팀원들에게 설명하는 중이었다. 팀원중 하나가 그녀에게 물었다.
{주어진 과제라는게 뭡니까?}
{그건 저도 몰라요. 지금부터 우리가 찾으러 다녀야죠.}{그렇다면 혹시 저 안에 뭔가가 있지 않을까?}링 메이가 굳게 닫힌 으리으리한 성문을 가리켰다.
{보이는거라고는 성문 밖에 없으니 일단 저 안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죠.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요. 어때요 탱커님?}천유시가 멀리가서 토하고 돌아온 서진동을 돌아봤다.
서진동은 침을 퉤 하고 내뱉은 뒤 헬멧을 머리에 쓰며 간단히 대답했다.
{가자구.}
46명의 쯔단 MSC 팀원들은 전원 문쪽으로 걸어갔다.
우주는 그 속에 섞여 쯔단MSC 팀 내에서 발언권이 강한 사람들이 하자는대로 순순히 따르며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었다. 외부인인 자신은 그저 묵묵히 높은 딜량만 쌓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간다!}
서진동이 힘껏 내달리더니 거대한 철문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충차로 때려부수는 것 같은 강한 충격을 가하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그때 팀원 중 한 사람이 성안쪽을 들여다보더니 급히 당황하며 뒤로 주춤거렸다.
{저, 저건 뭐야!}
{다들 뒤로 물러서!}
성안쪽에는 칼과 방패를 들고 대열을 맞추어 서 있는 수백명의 고대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눈알이 없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깊고 깊은 어두운 구멍이 존재했다. 입술 밖으로는 두 개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삐져나와 있었다.
{귀, 귀신이다!}
누군가 저도 모르게 그만 소리질렀다.
귀신병사들은 일제히 성문쪽으로 고개가 돌아가더니 이내 칼을 높이 쳐들고 우르르 뛰어왔다.
서진동이 팀원들쪽으로 등을 내보이며 널따란 성문 한 중간에 우뚝 섰다.
{전부 도발할테니까 안심하고 딜들 해!}서진동은 우렁차게 함성을 내지르며 도발력 기술을 발휘했다. 귀신병사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보고 달려들었다.
수백명의 귀신병사가 달려들다보니 서진동이 입은 하이테크 슈트의 손상률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베다와 리그베다 네 사람이 잠시 한눈이라도 파는 순간에는 서진동이 한순간 푹찍(푹하고 찌르니까 찍하고 죽는다는 말.)을 당할 것만 같았다.
따라서 스나와 위자들의 손이 바빠졌다. 귀신병사의 수를 빨리 줄여서 서진동이 받는 엄청난 데미지량을 최대한 낮추도록 노력해야했다.
하지만 그 수가 최소 500마리가 넘는 것 같다. 게다가 서진동이 성문을 꽉 틀어막고 있자, 어떤 녀석들은 성문을 포기하고 높다란 성벽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성벽을 넘어온 해골병사들은 곧바로 본진을 향해 개미떼처럼 달려들었다.
{왼쪽이야! 왼쪽!}
{오른쪽에도 오고 있어!}
{힐이 분산되면 위험해! 링 메이랑 슌풍 두 사람은 계속 탱커한테 힐을 주고 나머지 힐러들은 팀원들만 신경쓰도록 해!}MSC 전체가 점점 정신없어지는 가운데, 우주는 성문쪽을 일단 재껴두고 본진을 습격하는 귀신병사들을 향해 아트만 에너지를 난사했다.
원샷원킬.
하지만 그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달려드는 귀신병사가 워낙 많은지라 결국 팀원들을 덮치는 녀석들이 생겨났다.
공격을 받은 팀원들은 바닥을 나뒹구르며 귀신병사를 떼어내려 안간 힘을 썼다. 힐러가 서둘러 광역 힐을 난사하지만 무한대로 계속 쓸수 있는 아트만 에너지가 아니다. 첫 관문부터 다 써버리면 그 후에 닥쳐올 위기상황을 이겨내기가 힘들어진다.
팀원들을 맡기로한 베다들은 시간차를 두고 광역 힐을 시전했다. 한 번 시전하고 나서 대기 시간동안 공격 당하는 팀원이 있다면 동료가 도와주거나 자력으로 이겨내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46명 대 500마리 이상의 귀신병사.
여기서 그나마 큰 도움이 되는 것은 광역 공격을 할 수 있는 천유시와 왕자위 등 위자들의 존재다.
그러나 손이 부족하고 적은 많다. 여러마리를 뭉텅이로 잡아도 끝이 없었다.
게다가 딜러들도 힐러와 마찬가지다. 무턱대고 아트만 에너지를 난사할 수 없었다. 또 개인화기를 든 수라들도 총알을 아껴야 한다는 점에서 똑같았다.
탄환이 신경쓰인다면 남은 것은 하나였다. 바로 육탄전이다. 아트만 에너지에 비해 주먹을 내지르는 것이 체력 소비가 그나마 적다.
그런식으로 전투가 중반에 접어들자, 쯔단 MSC 팀원들은 일제히 아트만 에너지 소비를 최대한 자제하며 주먹과 발, 혹은 단검으로 귀신병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귀신병사보다 더 귀신같은 사람이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가 달려드는 적들을 일격에 분쇄시키며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기에 가까운 무술 실력을 선보였다.
바로 우주였다.
그는 한 번에 수십명의 귀신병사들을 때려눕히며 크게 선전했다.
같은 시각 현실세계에 있던 류쯔단.
그가 데미지미터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신우주 혼자서 거의 다해먹는군.}데미지미터기에는 우주의 딜량이 무려 5억이 넘게 표시되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루이였으나 그는 1억을 갓 넘겼다.
류쯔단의 옆에 앉아있던 중견 배우가 TV화면을 손으로 가리켰다.
{사장님. 저거 보십시오. 또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영상에는 모든 것이 멈춰있는 레이드 현장이 비춰지고 있었다. 갑자기 쯔단 MSC 팀원 한 사람이 힘없이 털썩 쓰러지더니 연이어 두 사람, 세 사람이 쓰러졌다.
다시 나락.
시체들의 피비린내가 들끓었다.
우주의 활약에 힘입어 쯔단 MSC는 수백마리의 귀신병사들을 모조리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해도 만만치 않았으니, 힐을 제때에 받지 못했던 팀원 6명이 사망했다. 그들은 금속재질의 하이테크 슈트가 찢겨져 나가고 가슴이나 다리 같은 신체부위를 귀신병사에게 파먹힌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
몇명의 팀원이 그들의 시체를 한곳으로 모아다 기도를 올리며 고인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이로써 남은 팀원은 모두 40명.
팀원들은 이제야 한숨을 돌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우주의 활약을 추켜세워줄 기력조차 없었다. 그냥 각자 잠깐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묵묵히 엄지손가락만 들어올렸다문득 링 메이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진동을 바라봤다.
{루이가 안보여요. 어디갔지?}
벽돌 바닥에 드러누워있던 왕자위가 벅찬 숨을 고르고 이내 대답했다.
{루이 씨는 아까부터 안보였어요. 성문이 열리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졌죠. 아, 나도 나노슈트 입고 싶다. 투명화모드도 있고 얼마나 좋을까. 나노슈트만 있으면 이렇게 고생할일도 없었을텐데. 그러고 보면 사장님은 왜 루이만 사줬지. 난 왜 안사주시는 걸까? 우리 회사는 차별이 없을줄 알았는데 알게 모르게 차별이...}서진동이 미간을 좁히며 끼어들었다.
{거 시끄럽다니까. 사람이 무슨 한마디를 해도 책 쓰는 것도 아니고 뭔말을 그리 줄줄이 이어서 말해? 듣는 사람 짜증나게시리.}{제가 언제 말을 길게했다고 그러세요. 전 그냥 머릿속에 들어 있던 생각들을 표현하는 것 뿐인데, 탱커님 너무해요.}{자자, 두 분 싸우지 말고 진정들해요. 진정들! 제 얼굴보고 따라해보세요.}링 메이가 환하고 밝게 웃어보였다. 앳된 소녀처럼 귀여웠다.
그녀를 본 서진동과 왕자위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피어났다.
한편, 근처에 묵묵히 앉아 있던 우주의 곁으로 천유시가 다가와 앉았다. 그녀에게서 향긋한 냄새를 느꼈다.
{힘들죠?}
우주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실시간통역기를 꺼내 ON 스위치를 눌렀다.
“뭐라고 말했소?”
{힘드세요?}
“아. 괜찮소. 별로 힘들지 않소이다. 그나저나 고인이 된 분들이 참 안타깝소. 낭자 또한 갑작스러운 동료들의 죽음으로 인해 많이 슬플게요.”
천유시는 잔잔한 미소를 흘렸다.
{솔직히 슬프긴 한데, 우리 일이란게 원래 그렇잖아요. 죽음은 언제나 곁에 있고, 동료의 죽음을 슬퍼할새도 없이 계속 일은 해야되고. 하도 이런 상황을 많이 겪다 보니 이젠 감정이 메말랐는지 눈물조차 나오지도 않아요. 마음이 애석하긴 하나 그냥 무덤덤하죠. 홍콩에서 MSC 팀원들끼리 서로 친목을 다질때 자주 쓰는 이런 말이 있어요. '내가 죽어도 절대 슬퍼하지 마라. 너도 언젠가 곧 죽게 될테니까.' 꽤 섬뜩하긴 하지만 농담처럼 하는 말이죠. 우리는 이제 죽음 앞에서 당당해지기로 한거예요.}우주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루이 도령은 혼자서 대체 어디로 사라진거요? 그리고 듣자하니 나노 슈트에는 투명화 모드란게 있소?”
{투명화 모드요. 네 나노 슈트에 있어요. 그것말고도 특수한 모드가 몇개 더 있다고 들었는데 직접 써보진 않아서 모르겠네요. 아무튼 루이가 자주 쓰는 건 투명화 모드예요. 주로 심적으로 쫓길때 쓰죠.}
“심적으로 쫓긴단 말이오? 어째서?”
{자신보다 딜이 더 잘나오는 사람이 있은니까 그러는 거예요. 제 일방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루이가 사라진건 아마 우주 씨 때문인것 같아요. 딜량이 크게 차이가 나니까 자존심이 상한거죠. 그래서 팀원들보다 먼저 앞으로 나아가서 몹들을 때려잡고 우주 씨를 이길 작정인거죠. 운이 좋으면 나락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
천유시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거 혹시 아시나요? 우리기업에선 나락을 빠져나가는데 큰 역할을 수행한 사람에게는 포상금을 줘요. 난이도에 따라서 액수가 조금 차이가 나지만 보통 50억원 정도선이죠. 루이가 만약 우주 씨에게 딜량에서 진다면 포상금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일거예요. 쯔단MSC의 에이스로서 포상금도 못받는다면, 신우주 한 사람에게 쯔단MSC가 완벽히 졌다는 생각이 들고 자존심이 상할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