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249화 (249/285)

249화

“설마, 미국에서 있었던 그 일로?”

“그것 밖에 없어.”

우주는 무의식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희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아이가 틀림없었다.

“낙태할까...?”

“!”

그녀의 가당치도 않은 소리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어림없는 소리하지마시오. 꼭 낳으시오.”

“하지만.”

수희는 절친인 소민이 마음에 걸렸다. 친구관계에 찬물을 끼얹는 배덕 행위를 저지른것 같았다.

“소민 낭자라면 걱정마시오. 소생이 잘 말해두리다.”

“어떻게 잘 말해? 잘 말해도 소용없어. 보나마나 크게 화를 낼거야. 친구 남편과 관계를 가진데다가 아이까지 임신하다니. 나 진짜 미친년이야. 아무리 친구라해도 나 같아도 도저히 용서못할 일이고 그 미친년을 평생 원망하고 증오할거야.”

“...미친년이라고 할것 까지야.”

우주는 머리를 긁적였다. 지난번 미국에서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그저 술김에 사고를 쳤다는 핑계 밖에 생각할게 없었다.

그러나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다. 기존 부인 네 명에 이어 곧 다섯 번째 부인을 맞이할지도 모를 사내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와 배짱이었다.

“염려마시오. 그나저나 갑자기 변한건 없소?”

“변하다니?”

“데바처럼 이상한 능력이 생겼다거나 하는것 말이오.”

수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 근데 왜?”

“내... 말해줄게 있소. 여기 앉아보시오.”

우주는 수희와 소파에 마주보고 앉아 그간 숨겨놓았던 진실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면 데바가 된다는 것과, 료코, 미라, 소민이 그렇게 해서 데바가 되었고, 자신의 여동생이자 세이비어가 말하길 지구는 자신을 종마로 생각하고 아이를 많이 낳을수록 특별한 능력이 계속해서 생긴다는 이야기까지.

“정말이야? 말도 안돼!”

수희는 전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그 앞에 앉아있는 우주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반신반의 하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내 아이를 임신한게 틀림없다면, 낭자도 분명 초자연적인 능력이 생겼을 것이오. 내면에 있는 힘을 깨닫는 방법은 소생도 그랬고, 부인들도 그랬지만 눈을 감고 편안한 자세로 가만히 명상을 해보시오. 그럼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있을거요. 무언가 할 수 있겠다하는 막연한 느낌이.”

“막연한 느낌이라...”

수희는 우주가 시킨대로 잠자코 따라했다. 두 손을 양무릎 위에 올려놓은 뒤 허리를 곧게 펴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실내에 정적이 흐르고 우주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희의 머릿속에는 금세 무언가 슬그머니 하나씩 떠오르며 윤곽을 드러냈다.

“거울. 거울. 거울. 여기도 거울, 저기도 거울...”

“거울...?”

“거울 있는 곳으로 가봐야겠어.”

수희가 눈을 뜨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옆에 놓인 전신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제자리에 서서 거울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는 그녀.

“세상에...!”

물속에 손을 집어넣는 것처럼 거울이 물결을 일으켰다.

그녀는 거울 속으로 들어간 손을 휘저어 보았다. 텅빈느낌. 그 안에서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다.

그러는 와중에 우주는 그녀의 행동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수희의 능력은 과연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찰나에 수희는 금세 거울속으로 뛰어들며 방안에서 쥐도새도모르게 사라졌다.

“수, 수희 낭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울쪽으로 황급히 뛰어가는 순간, 수희가 도로 거울속에서 뛰쳐나왔다.

우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어디갔다온거요? 거울안에 있었소?”

수희가 급히 고개를 저으며 저도 당황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우리집에 갔다왔어.”

“낭자의 집에?”

“응. 이 거울 안으로 들어갈때, 우리집에 있는 전신거울을 떠올렸더니 거짓말처럼 우리집으로 공간이동을 했어. 정신차리고 보니 우리집에 있는 전신거울 앞이더라.”

“돌아올때도 거울을 통해 돌아왔소?”

“응. 이 거울을 생각하고 들어갔더니 여기로 와진거야.”

“그거 놀랍군. 공간이동이 가능하다니.”

우주는 감탄하더니 이내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축하하오! 이로써 낭자도 데바가 된거요! 당장 아트만 에너지를 측정하러 가봅시다!”

“나 정말 데바야? 꺄ㅡ!”

수희는 매우 기뻐하는 얼굴로 폴짝 뛰며 환호를 내질렀다.

수년전까지만 해도 수라를 으뜸으로 쳐주었지만 시대가 바뀌어 현재는 데바가 최고였다. 수라 중에서 유명해지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기가 어려웠고, 데바급이 되어야지만 드라마도 찍고, CF도 찍고, 사람들도 인정해주고, 연봉도 많이 받을 수가 있었다. 한마디로 수희에게는 이제 장밋빛 미래가 펼쳐진 것이다.

“나한테 키스해줘.”

뜬금없이 수희가 애교를 부리며 품에 안겨들었다. 데바가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뻤고, 자신을 데바로 만들어준 우주에게 커다란 매력을 느낀듯 했다. 이래서 월드컵과 올림픽 기간에는 국가적인 축제분위기 속에 콘돔이 많이 팔리는가 싶다.

그런 마음은 우주도 비슷했다.

그는 정장바지의 지퍼를 열고 고개를 축 늘어뜨린 고추를 꺼냈다. 이어 수희의 손으로 움켜쥐게 한뒤 그녀의 블라우스와 치마를 더듬으며 농도 짙은 키스를 나누었다.

‘임신까지 한 이상 이제 서로 가릴 것도 없지!’

아트만 에너지를 측정하러 가기에 앞서, 기쁨에 도취된 두 남녀는 때와 장소를 구분못하고 허겁지겁 욕망을 쫓기시작했다.

“헉, 헉!”

“하아, 하아...!”

서로 성기만 꺼낸 채 옷을 입은 채로 한바탕 거사를 치른 두 사람은 쓰러지듯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우주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실내에 놓인 화분이 쓰러져 있고, 책상은 어지럽고, 벽에 걸린 액자에는 수희의 길다란 머리카락이 한가닥 붙어있는 채 삐딱하게 걸려 있는 등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혹시 문밖에 있는 비서들이 소리를 들었으려나...?’

우주는 뻘쭘한 기분에 TV를 키고 약간 소리를 높였다. 뒤늦게 뉴스라도 보는척이었다.

그런 반면, 수희는 심호흡을 하더니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그녀는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멍하니 말했다.

“나 말야. 사실 그동안 말하고 싶었던게 있었어.”

“소생한테?”

“응.”

그녀가 곧바로 말했다.

“4년 전에 토크클럽 기억나?”

“토크클럽이라면 알긴 아는데 낭자가 그걸 어찌 아오? 낭자도 토크클럽을 했었소?”

“당연하지.”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우주에게 눈길을 주었다.

“놀라지마. 내 아이디가 대갈공주였어.”

“뭐, 뭣이오!?”

그녀는 생긋 웃어 보였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일격아.”

“대갈공주!”

우주는 더없이 크게 놀라며 다시 만난 대갈공주를 향해 그동안 쌓아둔 회포를 풀 생각에 말이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반갑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TV속에서는 타이탄급 사탄이 나타난 일본의 현상황이 긴급속보로 다뤄지고 있었다.

영상에 등장한 나베 신쥬 일본 총리는 각부처 장관들을 대거 대동하고 기자들 앞으로 나와서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자국민에게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다.

“요며칠간 우리는, 지구 역사상 전례가 없는 가장 나쁜 악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악에 맞서 정부의 기능은 중단 없이 계속 될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며, 국민 여러분께 비통한 심정으로...”

나베 총리가 사과문을 읽는 동안 뒤에 서 있던 장관들은 모두 나이와 직책에 걸맞지않게 서럽게 울며 눈물, 콧물 다 흘리는 중이었다.

화면이 전환되며 여성 아나운서가 나왔다.

-도쿄에 있는 육종섭 기자!

-네! 육종섭입니다!

-나베 총리의 대국민 사과 말고 새로운 소식이 들어온게 있나요?

-예,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신화속에 나오는 귀신인 바쿠를 닮았다고 하여 바쿠라 명명된 이 타이탄급 사탄의 다음 행선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 오후를 기점으로 취재진들을 비롯해 나고야 인근 지역에 파견되었던 일본 정부 부처의 인력들이 전원 철수하였습니다.

지금 나고야는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히로시마를 상기시킬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가 된 상태입니다. 더는 희망을 바랄 수 없이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군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럼 오늘 오전에 투입되었다던 요시자와MSC도 전멸을 당한 것입니까?

-아직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가 없었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애석하게도 전원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일본은 자생능력을 거의 상실하였습니다.

-육종섭 기자!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자생능력을 상실했다는 걸 풀어서 설명해주겠습니까?

-그간 각 기업이 연합하여 구성했던 일본 내 정예 MSC, 총 20개팀이 오늘 요시자와MSC를 끝으로 모두 전멸을 당했습니다. 사망자만 대략 1000여명에 달하는데요. 이로 인해 일본은 이제 타이탄급 사탄뿐만 아니라 하다못해 매머드급 사탄에 조차 대응할만한 MSC가 전무하다는 것이 이곳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따라서 남은 것은 이제 중소기업이 가진 MSC 뿐인데, 이들은 실력과 장비가 미진하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라 일본 정부가 이들 기업들을 모아 바쿠 레이드에 투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그건 정말 우리한테도 안좋은 소식인데요? 바쿠가 바다를 건너서 온다면 큰일이니까요. 아무튼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대비책이 있다고 합니까?

-조금 전 발표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미국과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에 여성 아나운서는 약간 비꼬는 듯이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이 상황에 일본의 나베 총리는 왜 미국과 영국입니까? 아직도 자존심이 남아있다는 걸까요? MSC의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한국과 중국, 러시아가 더 뛰어날텐데 말이죠.

삑.

우주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TV를 끄고 수희와 함께 사장실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가자 마자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여비서가 벌떡 일어나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사, 사장님 잘 다녀오십시요!”

여비서는 긴장했는지 우주가 먼저 어디 다녀오겠다는 말을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말했다.

그에 우주는 헛기침을 하며 한 손을 올려보인 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나갔다.

우주는 수희와 함께 집을 찾았다. 아이들은 모두 어린이집에 가있고, 료코와 미라는 신입 사원 교육에 가있었으며 소민은 다음달 출산을 앞두고 출산휴가를 낸 채 집에서 홀로 쉬고 있는 중이었다.

“미안해 소민아. 나 우주의 아이를 임신했어.”

수희는 소민을 데리고 소민의 방으로 들어가서 그녀에게 임신 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소민은 크게 놀란 듯이 반응하더니 이내 환하게 웃어보였다.

“축하해! 넌 능력이 뭐야? 데바가 된거지?”

“괘, 괜찮은거야?”

“물론 괜찮지!”

따귀를 맞을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반응이라서 수희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어, 어째서 괜찮은거야?”

“어째서라니? 생각해봐. 우주 씨를 나혼자 독차지 할 생각이었으면 내가 이 집에 있었겠어? 여러 여자들과 함께사는것도 재밌고 좋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 절친이던 친구가 우리집으로 들어온다면 나야말로 대환영이지.”

“너 약 먹은거 아니지?”

“약이라니, 임신한 내가 약을 왜 먹니? 우리 회사 직원인 네가 데바가 되면 부사장으로써 나도 좋은것 아냐? 그리고 어차피 우리 남편은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다니? 뭐가?”

“이미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우주 씨는 지구한테 선택 받은 사람이거든. 회사가 더 잘되려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해.”

“그... 아이를 많이낳을수록 우주 씨의 능력이 추가된다는 그 세이비어의 말?”

“그래. 게다가 나는 우주 씨의 능력을 앞세워 신라그룹을 이기고 싶어. 어머니의 회사를 이겨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단 말이야.”

“그 마음은 알겠는데... 좀 그렇지 않아?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니가 순순히 받아들이니까 난 왠지 적응이 안돼. 너무 개방적이고 다른 세상에 온것 같다.”

“한때 내가 힘들었던 시기가 있어서 그런지 그때부터 가치관이 확 바꼈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우주 씨는 내게 있어 너무나 좋은 사람이야.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되기도 하고, 또 내 자신이 대단한 사람의 와이프란 것을 실감할때면 자부심이 생기기도 하거든.”

“몸을 섞는 여자가 많아도?”

소민은 피식 웃었다.

“홍콩 레이드에서 세이비어가 우주 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더라. 우주 씨는 인류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인도자 역할을 맡고 있고, 인간의 윤리로 잣대를 들이대선 안된다고. 이때 난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어. 우주 씨가 언젠가는 인간세상을 떠날것 같다는 슬프고도 오싹한 기분이 말야. 인류의 모든 문제를 떠안고 떠날것만 같았어. 만약 신이 있다면, 우주 씨는 어쩔 수 없이 신에 의해 종마 같은 역할을 억지로 떠맡게 된거야. 우리가 불평불만을 토해내기보다 오히려 위로를 받아야할 사람이지.”

소민이 말을 마치고 나자 수희는 놀랍다는 듯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왠지 대단하다...”

“대단해?”

“마인드가 달라. 나도 이 집에서 살면 너처럼 그런 생각을 갖게 될까?”

“아마도?”

“아무튼, 네가 이해해주니 고맙고 잘됐어. 아이 낳아서 잘 키울거야.”

“응. 나도 옆에서 많이 챙겨줄게. 출산까지 힘내도록 해.”

며칠 후.

서울시내 모호텔에서 50명의 신입사원과 가족, 임직원 등 총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입사원 환영회가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 자리에는 초청가수 강민과 함께 그의 소속사 사장 김철수도 함께 참석을 하여 자리를 빛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