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거실에 침묵이 흘렀다.
우주는 대답없이 탁자 위에 놓인 흰봉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선주도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느라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우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인들이 들어가있는 방쪽으로 걸어가서 방문을 열었다.
“소민 낭자. 장모님께서 이만 가보신다고 하시는구려.”
그 말에 시선을 놓지 않고 우주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이선주가 기가 찬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후회할걸세. 대기업이 중소기업 하나 조지는건 일도 아니야. 그때가서 내 발목잡고 늘어지지나 말게. 소민이 하고 현우만 받아들이고 자네는 내쫓아버릴테니까.”
“내쫓겨도 좋습니다. 제 처와 자식만이라도 받아주시겠다니 그걸로도 됐습니다.”
“내 앞에서 여유부리지 않는게 좋아. 자네 같은 사람들을 한 두번 본줄 아나?”
“어머니!”
소민이 방에서 황급히 뛰쳐나오며 이선주에게 다가갔다.
“이 사람한테 자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는거예요. 제 남편이고 사위라구요.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말도 있는데 계속 이렇게 나쁘게만 말씀하실거예요?”
이선주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소민을 노려봤다.
그리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장모가 나 하나라면 모르겠다. 그런데 저길 보려무나. 나 말고도 신 서방을 돌봐줄 장모가 많이 있을거 아니냐?”
이선주는 방밖으로 나와있던 료코와 소라, 현아를 가리키면서 쯔쯔 혀를 찼다. 미라는 방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
소민은 시선을 내리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말에 공감해서 그렇다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게 서운해서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너도 푼수짓 그만하고 조만간 날 잡아서 현우랑 같이 집으로 돌아오너라. 이런 곳에서 애를 키우면 자라면서 보고 배울게 뭐가 있겠니? 애 교육에도 안좋다는걸 왜 모르는거야.”
“그만하세요!”
소민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눈가에는 촉촉하게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선주는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안고 있던 현우를 넘겨주고는 소파에 놓여있던 핸드백을 집어들고 뒤돌아섰다.
“니들이 싫든 좋든 내가 현우 외할머니니 마음 내킬때마다 언제든 또 오도록 하마.”
현관문이 쿵 하고 닫히자마자 현아가 먼저 숨막혀 죽을뻔했다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 회장님 성격은 여전하시네. 4년 전에 뵈었을때도 굉장히 무서웠었는데 말야.”
다음으로 소라가 말했다. 어느새 그녀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전 나가서 쇼핑이나 하고 올게요. 여기 있으니까 괜히 기분도 꿀꿀해지고 보기 싫은 사람 얼굴을 봤더니 토할것 같네요. 백화점 가서 탄산수나 사 마셔야지.”
소라가 현관으로 걸어나가는 것과 동시에 우주가 현아를 바라보았다.
“너도 같이 갔다와.”
현아가 끔뻑 놀라며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도?”
“응.”
도리도리.
현아가 머리를 작게 흔들며 싫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우주가 손가락으로 160억이란 글자를 만들어내자 그녀는 곧바로 '언니~ 같이가요~' 하면서 언제그랬냐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따라나섰다. 소라에게 제네틱스 경영운영본부장 시절의 이미지가 남아있어서 그런지 현아가 그녀를 많이 어려워했다.
우주는 이 기회에 둘이 쇼핑을 하면서 친해져보는 것도 괜찮겠다싶었다.
“그럼 나는 우리 애들이랑 놀아주러 가볼까나.”
미라가 부시시하게 뻗친 머리를 긁적이며 방안에서 나오더니 거실을 가로질러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미소와 유라가 가정부와 같이 노는 중이었다.
또 함께 거실에 있던 료코는 흐느껴 울던 소민에게서 현우를 받아 품에 안고는 우주에게 눈짓을 했다.
우주는 얼른 소민을 데리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대략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녀를 애써 진정시킨 뒤 침대에 재우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TV가 켜져 있었다.
료코가 소파에 앉아 현우에게 젖병을 물리고 뉴스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집중해서 보고있는것인지 우주가 나왔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우주는 슬그머니 그녀의 뒤로 걸어가서 머리를 갑자기 내밀며 어흥~! 하고 깜짝 놀래켜 주었다.
그랬더니 료코가 화를 내기는 커녕 흠칫 놀라며 소매로 다급히 눈물을 닦는게 아니겠는가.
우주가 되려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왜 울어? 혹시 소민 낭자 때문에?”
“아, 아니옵니다. 소녀의 일은 신경쓰지 마시옵소서.”
료코가 황급히 일어나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우주가 잽싸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게했다.
아기와 함께 품에 안긴 료코가 당황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왜, 왜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피하지 말고 말해봐. 넌 또 무슨 일인데 그래?”
그 말과 동시에 료코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투명한 손이 우주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간만에 일본어로 반말을 하면서 대답했다.
“(가뜩이나 마음 쓸 곳도 많은데 나까지 이래서 미안해. 하지만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잠깐 옛날 생각을 하다보니 눈물이 좀 나온거야. 별거 아니야.)”
료코가 애써 미소 짓고 하는 말에 우주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래도 갑자기 울고 그러니까 좀 이상하다. 조금 전에 소민 낭자의 일도 있었는데 말이야.”
눈가에 눈물이 맺힌 그녀가 저도모르게 코를 훌쩍이더니 다시 입술을 열었다.
“(나나 미소한테는 이제 너 밖에 없어. 그러니까 절대로 죽으면 안돼. 네가 죽으면 난 모든 것을 다 잃은 기분이 들거야. 앞으로 숨을 쉬고 살 수가 없어...)”
“으애애애앵!”
돌연 젖병을 물고 있던 현우가 입을 크게 벌리며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우주는 어쩔 수 없이 료코를 놔주었다.
그녀는 소매로 자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더니 아기를 잘 달래며 2층으로 서둘러 올라갔다.
“대체 무엇이길래...”
우주는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료코가 속에 품고 있는 고민이 무엇인지 알래야 알 수가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뜬금없이 벌어진 상황에서 그녀의 말은 참으로 난해했다. 어째서 그런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인지 이유를 몰랐다.
그러다 문득 귀에 들어오는게 있었으니, -일본 내 사상자가 오늘 오후를 기점으로 약 900만명을 넘어섰다는 속보입니다. 이 중 사망자만 700여만명에 이를 정도라는데요. 이는 일본 전체 인구의 약 5%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그야말로 대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실에 켜진 TV소리가 들려왔다.
우주는 비로소 료코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즉시 TV 앞으로 걸어갔다. 일본이 처한 현상황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며 턱을 어루만지면서 뉴스를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타이탄급 사탄 바쿠의 공격으로 인구 740만명에 달하는 일본의 아이치현(우리나라의 행정구역 중에서 도(道)와 비슷한 크기, 참고로 나고야는 아이치현에 속한 여러 도시 중 하나.) 전체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또 바쿠는 이제 일본의 수도 도쿄와 근접한 지역인 야마나시 현쪽으로 이동중이라는 소식도 들어온 상황인데요. 머지않아 국가의 중앙행정조직이 밀집한 수도가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더불어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과 러시아가 연합MSC를 파견해 달라는 일본의 요청을 거부했다는 소식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
며칠 후 소라는 대대적인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마늘밭에서 수거한 3조원의 돈 중에서 장비를 구매하는데 쓴 8천억의 돈과 사비로 쓸 5천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1조 7천억원을 전부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제 아버지인 한규만 회장과 친언니인 한소영의 여적죄(與敵罪, 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항적한 죄)로 인해서 피해를 입으신 우리 국민 여러분들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사죄드리며 더불어 제가 가진 재산 모두를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자금의 사회 환원 방식은 재단 설립을 통한 취약계층 지원이었다.
1조 7천억원이라는 큰 금액을 한꺼번에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재단을 세우고 체계적인 관리하에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지원 형태로 사회 환원이 이루어져야만했다.
하지만 언론으로 소식을 접한 대다수 국민들은 칭찬을 하기는 커녕 그녀에 대한 비난 여론만 더욱 들끓었다.
사회복지단체나 시민단체에 기부를 하지않고 재단을 설립하겠다는 것은 사회 환원이 아니라 소라 개인의 이익 창출을 노리고 벌이는 짓이라며 꼬집었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전 재산을 강제로 국고에 환수해야 한다는 의견도 더러 있었지만, 소라는 이미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포기한 상태고, 한규만과 한소영에 비하면 여적죄 혐의도 크지 않았으며 자신의 행한 일의 죗값은 징역형으로 다 치룬 상태였다.
이런 마당에 정부가 나서서 어찌할 수 있는 정당한 법적 근거가 없었다.
한마디로 소라는 이제 자유다.
“내 돈으로 내가 뭘하든 지들이 뭔 상관이람. 아휴, 짜증나!”
우주가 있는 사장실 소파에 앉아있던 그녀가 신문을 보며 투덜거렸다.
사실 전재산 사회 환원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일부러 떠벌린 일이었고, 그래서 기자회견까지 자처했건만 반응이 영 신통치 않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그러길래 내 조용히 세우자 그러지 않았소. 안먹어도 될 욕을 왜 스스로 먹는건지.”
“흥! 몰라요. 이러면 좋아해줄줄 알았는데, 하찮은 것들이 눈치만 빨라가지고!”
이후 그녀가 세운 재단의 이름은 '소라재단'이었으며 그녀의 최측근들로만 이루어진 재단 이사진들은 다음과 같았다.
이사장: 신우주
이사: 쿠로가네 료코, 한소민, 강미라, 박현아감사: 윤정희 모기업 대표(소라의 고향친구), 박은정 모기업 회장(소라의 고향친구)소라는 재단 경영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것 같지만 재단의 모든 수익은 그녀의 지갑으로 들어오고 재단 명의로 사는 땅, 건물은 모두 그녀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가운데 공식적으로 내걸은 소라재단의 사업은 아래와 같았다.
개인 대상 장학금 지원 : 아동, 청소년, 대학생 등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청소년 수라와 데바 육성 및 지원기업의 데바 관련 연구 개발 지원기업의 파워드 슈트 연구 개발 지원사업은 모두 사회 공헌 활동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천하물산과 밀접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취약계층을 돕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최첨단 장비를 개발하거나 유망주를 발굴하고 육성해서 천하물산의 전력을 강화시키겠다는 것이 실질적인 의도였다.
어쨌든 하루가 멀다하고 천하MSC의 전력이 나날이 강화되고 있는 이때 떠났던 팀원들도 하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폐를 끼쳤습니다. 앞으로는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바즈라 레이드 당시 사지를 잃었던 신입사원 이진혁이 완쾌되어 돌아오고 그 다음날에는 우연진이 신체강화에 성공하며 전보다 더욱 믿음직한 모습으로 사장실을 방문했다.
“내 이볼브 에너지가 무려 20만이야. 더 올리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길래 못올렸지 뭐야.”
또 그날 오후에는 독일 파워드 슈트 기업 아마데우스에서 파견된 과학자들이 회사를 방문했다. 그들은 최첨단 이식(移植)장비가 실린 차량을 가지고 우주와 미라를 만났다.
차량 뒷칸에 탑승한 우주와 미라는 다섯 명의 과학자들 앞에서 속옷 차림으로 시술을 받았다.
제각각 뒷목과 양팔, 가슴과 양다리에 나노바이오칩이 심어지며 이제부터 언제 어디서든지 나노슈트를 꺼내 입거나 벗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해진 장소 이외에 파워드 슈트를 착용하고 다니는 건 법적으로 금지가 되어 있기에 길거리에서 함부로 꺼내 입었다가는 큰일난다. MPO 코리아로부터 즉각 징계를 받고 나노슈트는 압수된다.
따라서 아마데우스에서 파견 나온 과학자들은 사장인 우주에게 그 자신과 미라의 나노슈트를 제어할 수 있는 컨트롤러를 건네주었다.
{이 버튼을 누르시면 밖에서 절대로 못꺼내입습니다. 레이드 시에만 락을 해제하십시오.} 그렇게 나노슈트를 받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천하MSC의 이름을 내걸고 사상 첫 레이드를 시작할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