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262화 (262/285)

262화

“(오셨군요!)”

거실에서 기다린지 얼마되지 않아 세 개의 방 중 한 방에서 기모노 차림을 한 여성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런데 화장법 때문일까.

우주는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전형적인 일본 여성의 외모와 비슷해보이는 그 얼굴이 다소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서글서글한 눈매에 양볼에 쏘옥 들어가는 보조개의 화사함. 꽃처럼 아름답게 웃는 표정을 보니 옛기억이 되살아났고, 그녀는 분명 허소윤이었다.

맑고 매끄러운 피부하며 동안의 얼굴까지 110년이 지나도록 전혀 변한게 없었다. 그저 조숙해보이는 옷차림과 교양있는 말투, 어른스러운 머리 모양때문에 어딘가의 안방 마님처럼 성숙해보일뿐이지, 그녀가 만약 캐주얼한 옷을 입는다면 청초한 여대생처럼 보이며 생기발랄한 매력을 뽐낼 것만 같았다.

리에는 기모노의 좁은 치마폭 탓에 잰걸음으로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회장님.”

“반갑소.”

“저희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먼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지요?”

리에는 마치 그를 처음보는 사람처럼 대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과거의 기억 일부분이 지워진 것일까.

우주는 잠깐 혼란스러웠지만 쓸데없는 감정 낭비라며 그런 생각들을 금세 지웠다.

우주 역시 그녀의 연기에 맞춰주기로 했다.

“차타고 고작 30분 거리인데 고생이랄게 뭐가 있겠소. 우리가 먼저 여기로 온다고 했으니 미안해 할 것 없소. 그보다 서로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랍시다.”

“그래야지요. 이야기를 들어주신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주는 아직 일본으로 가서 레이드를 해주겠다는 입장표명을 안했다.

게다가 천하MSC가 일본 원정을 가겠다는 사실은 자사 직원들을 포함해 임원들도 모르는 상태였다.

천하MSC 팀원들과는 이미 이야기를 다 끝낸 상태이고 대답은 뻔했으나, 어제 회의를 마치며 팀원들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켜두었었다.

따라서 리에는 지금부터 그를 설득해야하는 입장.

우주가 거절하면 그녀는 실패도 성공도 아닌 고이치로의 기대에 못미치는 반쪽짜리 성공을 가지고 일본에 돌아가야 한다는 조급함을 떠안고 있을 것이다.

이에 우주는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면서 최대한 요시자와 그룹측으로부터 천하그룹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득을 취하고자 속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회장님. 이쪽으로.”

리에가 두 손으로 공손히 어떤 방을 가리키자 우주는 곧 자신을 따라온 회사 실무관계자들을 거실에 남겨둔 채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큰 방으로 이동해 화사한 느낌의 꽃병이 놓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앉았다.

실내에는 널따란 베란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잔잔하게 깔려있어 단란하고 밝은 분위기가 돋보였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다과를 가져온 요시자와 그룹측의 여비서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자 방안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우주는 묵묵히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내내 반갑게 웃으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리에가 먼저 입술을 열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동자에는 지난 세월의 그리움이 담겨 있었고, 목소리에는 솔직함이 가득 묻어났다.

우주는 차를 한모금 마시고 나서 찻잔을 차분히 내려놓았다.

“소생도 많이 보고 싶었소.”

“그간 어찌 지내셨는지요?”

“예전에도 그랬듯, 오늘날에도 삻이 순탄치는 않더이다. 낭자는 어찌 지냈소?”

“저야 보시는 바대로입니다. 힘겨운 고난을 이겨내면서 분수 넘치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지요. 덕분에 요즘은 잘지내고 있습니다.”

우주는 '내가 살아있었단걸 알았으면서 그동안 연락 한번 없었던 이유가 뭐요?' 하고 묻고 싶은 마음이 태산 같았지만 목구멍 깊숙이 꾹꾹 눌러넣으며 간신히 입술을 뗐다.

“부군(夫君)은 잘계시오?”

“부군... 이요?”

리에가 되물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에게 남편이 있을 거라 지레짐작했던 우주가 다시 말했다.

“미안하오. 혹시 혼자 지내고 있는거요?”

“네. 혼자지내고 있지요. 좀 오래되었습니다.”

리에가 덧붙였다.

“도령님은 결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식을 올린건 아닌데, 말하자면 사실혼 관계요.”

“법률적으로도 아직인가요?”

“뭐, 그런셈이오. 소생이 한국법으로 결혼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어서 말이오.”

“아...”

리에가 잠시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그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댁에 사모님들이 많이계시다던데,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어 참으로 행복하시겠습니다. 많은 남성들이 부러워 할겁니다.”

오랜만에 리에와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목소리, 그녀만의 버릇, 그때의 분위기로 인해 다시 과거로 돌아간것 같고, 흘러간 옛 세월을 회상하며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으나 우주는 마음을 고쳐잡았다.

‘우린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다!’

우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즉시 화제를 돌렸다. 오늘 이 만남은 두 사람이 해후하는 자리가 아니라 순전히 비즈니스적인 관계로 인해 만들어진 자리다. 과거 이야기는 그만 접어 두고 더이상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일을 시작해봅시다. 세상엔 유능한 MSC가 많고 많은데다가 중국이나 러시아도 있고, 우리 한국에선 신라그룹을 섭외한 마당에 어째서 우리 천하MSC까지 또 섭외하려는 이유가 뭐요?”

우주가 난데없이 화제를 돌리자 리에는 급작스러운지 입술을 머뭇거리다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

“음?”

“궁금하지 않으시군요?”

“뭐를... 말이오?”

그녀는 조금 망설이더니 이내 대답했다.

“...제가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간 뒤에 있었던 일 말입니다.”

“그건.”

가능한 피하고 싶고, 두 번 다시 꺼내고 싶지않은 이야기였다.

3년 전 마츠다이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허소윤을 사갔던 켄신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가 말하길, 그 계집이 온지 두달째 되는 시점부터 나날이 배가 부르고 마치 애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참으로 희한했지. 켄신은 본래 어린 종을 두고 몰래 남색을 즐기던 자였어. 그 계집을 사간 이유도 단순히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쌓은 인망과 덕망을 보존하려면 정상적인 인간처럼 보여야 했으니까. 결혼은 비뚤어진 성가치관을 가리기 위한 위장막에 불과했다.

그런면에서 일본말도 못하고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조선 계집은 최고였지. 타국에 아는 사람도 없고, 집안에 가둬두기만 하다가 필요할때마다 꺼내보이면 되거든. 그랬는데 그 계집이 생뚱맞게 임신을 하다니, 켄신이 내게 대단히 화를 내더군.)’

그 당시 마츠다이라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그래서 내가 그 뱃속의 아이를 어찌 했는줄 아느냐?)’

다시 현재.

우주는 마른 침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3년 전 마츠다이라에게서 대충 다 들었소. 그간 고생이 참 많았소. 당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외다.”

“아니요. 제가 선택한 길인걸요. 흐흑...!”

리에는 갑자기 울먹이며 말했다. 고통스러운 옛 기억이 다시금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콕콕 눌러 닦았다.

“그때 제 선택에 대해서 후회도 많고, 어미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뱃속에서 세상을 떠난 아이에게도 미안할 따름입니다.”

“......”

우주는 착잡한 마음에 시선을 내려 바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개탄스럽고, 안타깝고, 씁쓸했다.

“그간 내게 아무 연락도 없이 일본에만 있었던 이유는 뭐요?”

“행여나 도령님께 해가 갈까 무서웠습니다. 4년 전만 하더라도 저희 요시자와 그룹은 다코오 가문에 늘 감시당하며 살아왔었고, 일본 정부 역시 그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제가 만약 도령님을 만나려 했다면 우리 회사 직원들의 생계는 물론이고 도령님마저 엄한 일을 당하실까봐 두려웠습니다.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먼곳에서 조용히 응원해드리는 것뿐...”

리에는 흘러나오기 시작한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다코오 가문의 수장인 하시도루가 한국에서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더불어 다코오 가문의 세력도 나날이 약해져만 갔고, 우리 요시자와 그룹은 그때부터 날개를 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도령님을 찾으려는 찰나, 그때는 많이 늦었더군요. 도령님께 부인이 여럿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는 도령님에 대한 실망감도 있었고, 도령님에 대한 분한 마음도, 그리고 제때 찾아가지 않았던 저에 대한 원망과 후회, 아쉬움도 컸었습니다.

“후...”

우주는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또한 어려운 시간을 감내하며 살아온게다.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지난 4년간 연락 한 번 없었다 하여 쌀쌀맞게 대하려 했던 자신이 이기적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리에의 두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우주는 다시 그녀를 살짝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고생 많았소.”

리에는 우주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앞으로는 절 혼자 내버려 두지 마세요. 지난 100여년간 혼자 이겨내느라 많이 외로웠습니다.”

“물론이오. 비즈니스 관계는 개뿔, 가족 같은 사랑으로 하나되어 뭉칩시다.”

그날 정오.

천하그룹과 요시자와 그룹의 공동기자회견이 열렸다. 우주는 이 자리에서 천하MSC의 일본 원정을 공식 발표했다.

“일본 국민 여러분! 극우세력의 수장이자 혐한을 부추기던 나베가 물러난 이때 양국간 새로 우호를 다지기 위해 뭔들 못하겠소이까! 지금 이 순간 고통에 힘겨워 하는 일본을 돕고자 하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염원을 담아 여러분들을 지키러 이 신우주와 천하MSC가 달려가겠소이다!”

천하MSC의 일본 원정 소식은 신라MSC 소식에 이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일부 국민들은 국내 최고 수준의 MSC인 천하와 신라의 안전을 우려해 일본으로 가지말아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어떤 시민 단체는 길거리로 나와 일본 출국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한국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천하MSC와 신라MSC가 힘을 합쳐 일본 내 타이탄급 사탄 공략에 성공만한다면, 다음으로 자국 내 버뮤다삼각지대에 빠뜨려놓은 타이탄급 사탄까지 처리해달라고 요청할 계획이었다.

그러는 한편 한반도 주변국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한국이 일본을 돕겠다는 소식을 접한 뒤 곧바로 자국어선의 불법조업을 두고 과잉진압했다는 엉뚱한 핑계를 대고 주중대사를 초치(招致, 불러들임)해 항의했다.

“{우방과 동맹 관계는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환경에서 구축되는데 이게 뭐냐 해! 서로 손발이 쿵짝쿵짝 맞아돌아가야 앞으로 일본이 까불지 못할것 아니냐 해!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으면 됐는데 다 망쳤다! 또 독도 달라는 소리나 듣고 싶냐 해!}”

“{잘 이해했습니다. 중국 정부의 입장을 본국에 전달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주중대사는 3년 전 테러에 대한 일본의 사죄가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근거를 들어가며 명확히 설명하였다. 그리고 국제관계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경을 초월해 타국 국민들의 안전과 인권도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관계가 조금 어긋난 것은 틀림없었다.

이는 한국이 나서서 무엇을 해야 할게 아니라 앞으로 일본의 총리, 고이치로의 태도에 따라 달린 일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서 조금 어긋난 것은 금세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일본에게 기회를 열어준 것과 다름없었다.

좌우지간 공동기자회견이 이루어진날 저녁에는 요시자와 그룹이 머무는 호텔방에서 천하MSC의 일본 원정과 관련해서 팀원들의 숙소 및 식사, 보조인력과 장비지원 등 본격적인 실무를 협의할 양쪽 관계자들이 밤새도록 협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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