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264화 (264/285)

264화

“반대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분수를 아는 것이 부자가 되는 것보다 낫다는 격언도 있네. 내 자네에게 시비를 걸고자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단 말이야. 우리 양팀 다 주어진 조건에서 최대한 팀의 생존과 안전에 관해서만 신경쓰도록 하자구. 서로 딜 욕심은 내지 말고.”

“설마, 서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한다면 신라MSC가 천하MSC를 이기는게 당연하다는거요?”

“꼭 그렇다는건 아니지만, 그럴지도 모르지. 혹시나 내 말이 너무 도전적으로 비친다면 이해해주게. 난 그저 자네가 신라그룹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하다는걸 알고 있기에 레이드에 해가 갈까 노파심이 났을뿐이야. 이 참에 우리 서로 경쟁에서 졌다고 상심해 하지 말기로 약속하지. 어떤가?”

웃으며 부드럽게 대답하면서도 그 말속에 뼈가 있고, 자신과 천하MSC를 은근히 무시하는 것 같다.

2년 전 우주는 엄청난 고초를 치뤘다. 처음에는 료코, 소라, 소민, 미라와 함께 문란하게 한 집에서 살고 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지며 언론과 국민으로부터 갖은 비난과 조롱을 받았고, 두 번째는 어느날 갑자기 성폭행범으로 몰리며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 모든 소문의 근원지가 신라그룹으로부터 나왔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신라그룹에 대한 적대감이 생긴건 분명 사실이지만,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그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아니 애당초 신라그룹에게 적대감을 내세울 작정이었다면 신라MSC와의 협동레이드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소생이 보기엔 그런걸 신경쓸때가 아닌 것 같소. 여태껏 타이탄급 사탄을 잡은 MSC는 없고, 따라서 사체가 유통된 적도 단 한 번이 없소. 노파심이고 뭐고 난 말이오. 신라MSC를 어떻게든 이기려는 생각보다 사느냐 죽느냐를 먼저 생각하면서 팀의 안전에 만전을 기할 것이오. 그러니 오늘밤에는 아무 걱정말고 두 발뻗고 편히 주무실 수 있길 바라오.”

우주는 자리가 불편해졌다.

조금 남겼던 와인을 훌쩍 다 들이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주위에 앉은 사람들과 정신없이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세종 대통령이 웃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자리가 재미없는게야?”

“재밌습니다. 그런데 만나야할 사람이 있어서.”

“너무 늦지는 말게.”

우주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중앙을 가로 질러 입구를 향해 걸어나갔다.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다 올 생각이었다.

‘차 대장이 옛날 그 차 대장이 아닌 것 같군. 복제인간이라지만 성격은 똑같을텐데 어쩌다 저리 경쟁심리가 강해졌는지 원. 둘이 힘을 합쳐도 모자른 판에 사사건건 겨루고 싶어 안달이났군!’

그런 우주를 먼 발치에서 노려보는 여성이 있었다.

오수연.

그녀는 입가에 가져간 와인을 테이블 위에 도로 내려놓으며 속으로 말했다.

‘다시는 안보길 바랬는데... 나쁜놈!’

이날 식사를 끝으로 일본으로 떠날 준비는 모두 마쳤다.

천하MSC와 신라MSC는 일본 총리가 보내온 전세기를 타고 다음날 일본으로 출국했다.

애당초 야마나시현에 이어 동쪽에 있는 도쿄로 이동할 것이라 예상이됐던 바쿠는 야마나시현에서 북쪽지역인 나가노 현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로인해 일본 정부는 한숨을 돌렸고, 한국의 연합MSC를 태운 전세기는 그대로 도쿄의 군사공항에 착륙했다.

공항에는 고이치로 총리가 내각 각료들을 대동하고 마중나와 있었다.

그 옆에는 리에가 붉은 정장을 차려입고 환한 얼굴로 서 있었다.

통역은 필요없었다. 일본측에서 실시간 통역 단말기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우주는 비행기에 연결해놓은 계단에서 내려오자마자 고이치로 총리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일본 국민을 위해 우리가 왔습니다. 총리님께서도 그간 근심이 많으셨을 겁니다. 맡겨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신우주 상. 우리 일본도 공략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말해주십시오.)”

다음으로 리에와 악수를 나누었다. 일이 잘되서 그런지 전보다 인상이 좋아진 것 같았다.

“(부인들 미모가 정말로 뛰어나군요. 셈이 납니다.)”

“고맙소. 어쨌든 이 기회를 빌어 낭자가 일본에서 큰 기반을 다질 수 있길 바라오.”

“(앞으로 한국과 일본의 우호는 걱정놓으시지요. 제가 책임지고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공식환영행사가 끝난 뒤에는 일본 정부측에서 마련해준 호텔로 이동해서 짐을 풀었다.

당일 저녁에는 일본 국민들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어 위로와 희망의 메세지를 전달했다.

그리고 취침 전까지 가진 잠깐의 휴식시간 동안 호텔 밖으로 나가 구경도 하고 싶었지만, 천하와 신라의 연합MSC가 머무는 호텔 주변에는 그들을 보러나온 도쿄 시민들이 진을 치고 눌러 앉아있었다.

대다수가 며칠 간 숙박을 할 작정으로 인도는 물론이고 도로까지 점거한 채 텐트를 쳐놓고 있었다.

따라서 대다수 팀원들은 밖으로 나갈 생각을 접고 호텔 안에만 머물렀다.

다음날은 물자 정비와 브리핑을 가졌다.

천하MSC와 신라MSC가 공동으로 가진 브리핑 시간에는 우주와 차영웅이 돌아가며 공략 계획을 설명했다.

“일본측이 제공해준 자료에 따르면, 바쿠는 레이드에 돌입하자마자 사람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드는 디버프(Debuff, 능력에 악영향을 줌)를 건다고 합니다.”

“신경을 예민하게 만든다니요?”

스포츠 브라에 핫팬츠를 입고 앉아있는 수연이 무심코 손을 들어 질문을 했다.

그와 동시에 먼 곳에 앉아있던 수희가 그녀를 아니꼽게 쳐다보았다.

브리핑 중에 질문을 해서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이었다.

“보통 일상생활에서 예민한 사람들을 건드리면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막 신경질을 내죠.”

“맞소. 바쿠의 디버프를 받으면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나고 옆사람에게 화가 난다는 거요. 디버프는 레이드 내내 유지되고 여러분은 각자 감정 컨트롤을 잘해야 할것이오.”

“맙소사.”

“이런.”

“잘할 수 있으려나.”

여기저기서 힘들지 않겠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차영웅이 교탁에 놓여있던 자료뭉치를 들더니 위로 흔들어보였다.

“그동안 바쿠 레이드에 참가했던 일본 MSC의 사건사고를 모아놓은 사례집입니다. 여기 어떤 MSC를 보면 바쿠의 디버프를 받고 나서 공략은 커녕 팀원들끼리 서로 죽이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쓰여있군요. 이 MSC는 결국 전멸을 당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레이드 도중 절대로 흥분을 해선 아니될 것입니다.

최대한 여유를 가지십시오.”

긴장으로 범벅된 하루가 지나고 마침내 레이드 날이 다가왔다.

아침 일찍 일어난 팀원들은 부지런히 장비를 챙기고 일본 정부에서 제공해준 군용 차량을 타고 나가노현의 사쿠시로 이동해 바쿠를 뒤쫓았다.

멀리서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할만큼 가까운 거리에 도착하자 줄지은 차량들이 일제히 멈춰섰다.

오후 2시가 지난 시각.

우주는 차량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저 멀리 골프장 잔디에 누워 쉬고 있는 거대한 덩치의 바쿠를 바라보았다.

“참 기이하게 생긴 짐승이로다.”

몸의 생김새는 곰과 같고 이곳저곳에 반점이 나있으며 코끼리의 코, 멧돼지의 엄니, 코뿔소의 눈, 소의 꼬리, 호랑이의 네 발을 지니고 있었다.

이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는 고압전신주가 쓰러져 있었고, 바로 옆 무명하천에는 엎어진 트럭과 사람 시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안타깝군.”

시야를 더 넓게해서 먼 곳을 바라봤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나가노현의 사쿠시는 지도를 다시 그려야할 정도로 변했다. 일부 건물이 무너진 게 아니라 도시의 모든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려 산산조각이 났고, 시야가 뻥뚫려서 마치 들판에 온줄 알았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도시의 잔해를 다 치우려면 최소 몇 달이 걸릴지 모를 정도로 심각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저것들은 다 뭐야. 누군 심각해 죽겠는데 산만하게시리.”

함께 따라온 자위대에 의해 여러개의 막사가 세워지고, 그 안에서 하이테크 슈트로 갈아입던 한동식이 조금 긴장된 얼굴로 볼멘소리를 했다. 나이 33세인 그는 예전 제네틱스때부터 시작해서 오성그룹을 거쳐 현재는 천하그룹 경력직에 지원해 채용된 수라였다.

“짜증나는군.”

허공에는 상당수의 헬리캠들이 잠자리떼처럼 떠 있었다.

그 수가 워낙 많았던 탓에 방향을 잘못잡으면 다른 헬리켐과 충돌해 떨어지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지랄들 한다 지랄들 해.”

그것들은 전부 여기서 5km 떨어진 거리에서 레이드 현장을 취재 나온 세계 각국 특파원들이 조종하는 것이었다.

취재 현장은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취재진들을 포함해 각국 MPO 관계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번 타이탄급 사탄 레이드는 인류역사상 두 번째였다. 그렇다보니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당연했고, 매우 흥미있게 지켜보는 반면에 한편으로는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2년 전 미국 미국 마이애미 동부 해안에서 나타난 타이탄급 사탄을 버뮤다 삼각지대로 끌어내는대만 수백명의 수라와 데바가 사망했었다.

그런데 처음보다 적은 인력을 가지고 타이탄급 사탄을 잡겠다니 솔직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혹자들이 말하길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MPO 국제본부에서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은 공식적인 소견을 내놓았다.

“가능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왜냐하면 미국에 나타난 타이탄급 사탄을 인류가 잡지 못했던 이유는 딱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로 알베르트 한스가 개발해낸 2세대 파워드 슈트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두번째로는 현존하는 데바 중에서 세계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신우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MPO 국제본부 고위관계자가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미국을 포함해 세계 각국은 이번 레이드에 대해서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인류의 앞날을 점쳐보는 순간인 것이다.

연합MSC 단장을 맡고 있는 박대춘 소령이 무전기를 들고 멀리서 지시를 내렸다.

“탱커는 공격을 시작해주세요.”

마침내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나노슈트에 증폭석을 풀로 다 채운 미라가 메인 탱커를 맡으며, 푸른 잔디로 뒤덮인 골프장을 단숨에 가로질러 달려나갔다. 그녀가 메인 탱커를 맡은 이유는 신라MSC 측에서 딜러 숫자를 더 늘리기 위해서 일부러 메인 탱커 자리를 양보한 것이 이유였다.

[크르르.]

원숭이 시체를 입에 물고 낮잠을 자던 바쿠가 눈을 부릅떴다.

곧바로 거대한 꼬리가 미라를 강타했다.

미라는 민첩하게 방패로 막으며 꼬리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꼬리는 금세 제자리로 돌아가며 허공만 갈랐다.

꼬리는 다시금 미라를 후려쳤다. 그녀는 재차 방패로 막아서며 바쿠의 몸통쪽으로 가까이 달라붙었다.

네 발 달린 짐승이 제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크게 포효했다.

애널라이저 토성이 긴급하게 무전을 날렸다.

-바쿠가 강력한 이유는 공격력과 체력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디버프와 나락 때문이에요! 그러니 미라 씨는 긴장하지 마시고 힐러진들을 믿고 도발력을 힘껏 쌓아주십시오! 녀석의 능력 수준은 매머드급 사탄과 하등 다를게 없습니다!

[크아아아아]

바쿠가 입에서 불을 내뿜었다. 강력한 불길이 미라를 덮쳤다. 메인 탱커를 전담으로 맡기로한 후방에 있는 힐러가 기다렸다는 듯이 큰 힐을 퍼부었다.

“자기! 자기! 자기! 우리 자기! 사랑스러운 자기! 내 자기! 이쁜 자기! 바람둥이 자기! 멋진 자기!”

미라는 도끼를 한 번씩 휘두를때마다 기합을 넣으려는 건지 수시로 자기 자기 거렸다.

도발력을 쌓는 시간동안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우주가 남들 눈치를 보며 얼굴이 다 화끈 거렸다. 빨리 공격 개시 신호가 떨어지길 기도할 뿐이었다.

곧 박대춘 소령이 무전으로 말했다.

-도발력 안정권입니다. 딜러들은 서둘러 공격을 개시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