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수희는 핏발 선 증오의 눈초리로 잔뜩 노려보기만 했다.
수연을 죽이기 전 꼭 묻고 싶은것이 있었다.
“한규만 회장의 비밀별장에서 저랑 현아의 화장품과 옷가지 등이 발견되었던 거. 전부 당신 짓이죠?”
“아니야! 난 그러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해준다면 살려줄 용의는 있어요.”
수연은 처절한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내가 왜 그래야 했는데? 그럴 이유가 없잖아! 내가 널 힘들게 할 이유가 뭐가 있는데?”
“그거야 저도 모르죠. 그나마 한가지 짚이는게 있다면 이선주 회장의 지시가 있었던게 아닌가요?”
3년 전 신라그룹 직원이었던 수희와 현아는 이선주 회장으로부터 샥스핀이 맹수의 기술을 훔쳤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에 합당한 보상을 약속받고 신라그룹과 결별했다.
그런데 그때 이선주 회장이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수연을 시켜 복수를 계획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다.
수연은 강력하게 부인했다.
“회장님이 그런 지시를 내렸었다고 쳐! 그랬다면 난 거부했을거야! 내가 왜 그런짓을 해야해? 너희랑 원수진 일이 뭐가 있다고!”
“말이 안통하는군요.”
수희는 즉시 허벅지에 장착된 단검을 빼들었다.
여전히 수연은 그녀에게 목을 붙잡힌 채 들어올려진 상태.
수희는 과감하게 수연의 왼팔을 찔렀다.
“꺄악!”
수연은 비명을 지르며 고통으로 몸부림 쳤다.
피가 튀지 않도록 천천히 단검을 뽑자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수희는 독사 같은 눈빛으로 괴로워 하는 수연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래도 거짓말만 할건가요?”
“아파! 아파! 아프다구!”
“다시 한 번 찔러줘요?”
“알았어! 알았어! 이야기 할게! 이야기 할테니까 제발 그만둬줘! 제발! 부탁이야!”
“사실대로 말해요. 이번에 또 거짓말을 했다간 손목을 자를지도 몰라요.”
수희는 허벅지에 달린 칼집에 피묻은 단검을 도로 꽂아넣었다.
수연은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수희의 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 사실대로 말할테니까 이것부터 놔줄래? 숨쉬기가 힘들어서 말이 안나온단 말이야.”
“좋아요. 대신 허튼 짓은 안하는게 좋을겁니다.”
수희는 그녀를 순순히 바닥에 내려놓으며 목을 풀어주었다.
수연이 바닥에 무릎꿇고 엎드리더니 목을 쥐고 콜록 콜록 거렸다. 그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피가 줄줄이 새는 왼팔을 손으로 움켜쥐고 말했다.
“사, 사실은 한규만 회장이 너랑 현아의 스폰서였다는 소문부터가 이선주 회장이 꾸민 계략이었어. 난 그 일엔 관여를 안했고, 소문을 유포한 자들은 신라그룹이 비밀리에 육성하는 댓글알바팀이 했던거야. 이건 진짜야. 처음에 난 너희들과 전혀 상관없었어. 결백해!”
“역시 그랬군요. 신라그룹을 나올때부터 이선주 회장이 가만있지 않을거란 예상이야 진작에 했었지만. 그리고요?”
“그리고... 어느날 나보고 너희 집이랑 현아 집에 가서 개인 물품들을 훔쳐오라고 지시했어. 처음에 노렸던 유언비어가 크게 이슈화가 될줄 알았더니 사람들이 다들 터무니 없다면서 믿지 않아서 그랬나봐. 그래서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만한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던거지.”
“당신은 그때부터 가담한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혹시 성일 아저씨를 방화범으로 몰아세우고 우주 씨의 공장에 불을 지른 것도 당신이 한 짓인가요?”
순간 수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을 세차게 흔들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절대! 절대!”
수희는 그런 수연을 묵묵히 쳐다보다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처음 천하MSC에 임대되어 왔을때, 아까 당신 말대로 저랑 현아가 언니언니 그러면서 그렇게 잘해주고 셋이 많이 친하게 지내고 어울렸는데 사람을 어쩜 그리 한순간에 배신할 수가 있죠?”
“그건 말이야!”
“당신이 신라라서?”
“그 말이 아니야! 크읏!”
수연은 팔뚝의 통증이 쓰라린지 눈을 찔끔 감으며 몸을 움츠렸다.
이내 고개를 들며 길게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난 그때 이선주 회장의 지시를 따를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어. 그녀가 내 약점을 빌미로 너랑 현아에 관한 일을 사주했고, 그때 난 거절 할 수가 없었단 말이야.”
“그 절박한 상황이란게 뭔데요?”
“그건...!”
순간 수연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지어지며 갑자기 나노슈트를 착용했다.
그리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수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바닥났던 아트만 에너지가 길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어느 정도 모인 것이다!
“날 이기면 말해주지! 꺄하하!”
그녀는 미친 맹수처럼 수희를 향해 악독하고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팔뚝에 입은 부상 따위는 나노슈트의 상처수복 기능에 의해 물엿처럼 끈적끈적한 액체로 된 물질이 내부에 주입되면서 찢어진 혈관이나 피부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달라붙으며 출혈이 멈췄고, 남아 있는 통증은 엔돌핀을 과다하게 분비시킨 효과로 극도로 완화된 상태였다.
“치잇!”
수희는 공격 하나하나를 간신히 받아쳤지만, 파워드 슈트의 성능차이로 계속 수세에 몰리게 되면서 결국 무릎을 꿇었다.
“아......”
하이테크 슈트는 산산이 조각나서 바닥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수연이 수희의 가슴을 관통했던 팔을 빼내자 수희는 피를 울컥 토하더니 힘없이 쓰러졌다.
“크크큭...”
수연은 빙긋빙긋 웃으면서 손안에 움켜쥔 심장을 내려다 보았다.
“이제 거의 다 끝났어. 여기서 모두 다 같이 죽는거야.”
말을 마치자마자 다섯 손가락을 강하게 오므리며 손바닥 위에 놓여있던 심장을 힘차게 터뜨려 버렸다.
C공간.
미라, 연진, 영웅, 신라MSC 두명과 천하MSC 1명까지 총 6명이 갇혀있던 C공간에서는 일찍이 치열한 3대3 난전이 벌어지며 연진의 활약으로 천하MSC가 선전을 하는가 싶었지만,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나노슈트를 착용한 차영웅은 가히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며 오뚜기처럼 일어나던 연진을 가까스로 죽인 뒤 도망친 미라를 쫓고 있었다.
일본 전국시대 도시의 윤락가.
밤중에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거리는 사내들.
속이 다 비치는 기모노를 차려입은 기생들이 널따란 큰 길을 오가는 사내들을 상대로 현란한 불빛 아래서 호객 행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차영웅은 투명화 모드 상태로 주변을 예의주시하는 중이었다.
그가 쫓고 있는 미라도 나노슈트를 착용하고 있다. 도망과 추적이 이뤄지면서 서로가 투명화 모드를 쓸건 뻔했고, 본래 MSC가 다르면 나노슈트의 식별코드 또한 암호화되어 투명화 감지가 불가능했으나 연합 레이드를 앞두고 천하와 신라가 서로 식별코드를 공유했기에 레이드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연합MSC 팀원끼리 센서로 감지해낼 수가 있었다.
“발칙한 고양이 같으니. 잘도 숨으셨군.”
그러다 사거리 한가운데에 서서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던 차영웅이 마침내 미라를 발견했을때는 목조로 건축된 3층짜리 건물 지붕 위에 그녀가 서 있었다.
“?”
차영웅은 위를 올려다 보자마자 흠칫했다.
미라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허리통만한 두께의 원통형 대포를 옆구리에 끼고 차영웅이 서 있는 사거리 중심으로 포문을 향한 채 한 손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심지에는 이미 불이 붙은채 타들어가고 있었다.
퍼엉!
대포는 곧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며 차영웅을 향해 포탄을 발사했다.
미라는 반동으로 지붕아래로 굴러떨어졌고, 차영웅이 서 있던 자리에 정확하게 포탄이 떨어지면서 펑 하고 터졌다.
그 충격으로 인해 지면이 크게 흔들리고 주변 담벼락이 무너지거나 지붕이 날아간 건물은 불길에 휩쌓였다.
“(불이야!)”
“(으아악!)”
사람들은 일제히 비명을 내지르며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다.
“겨우 이런걸로 날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주변을 뒤덮은 먼지가 차츰 걷히자 차영웅이 말짱한 모습으로 미라를 뒤쫓기 시작했다.
한 번 시야에 들어온 이상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끝장내버리겠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그의 몸상태가 100% 온전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일찍이 연진과 혈투를 치르면서 왼쪽 눈의 시력과 왼쪽 팔을 잃었고, 그로인해 나노슈트의 상처수복과 아바타 기능이 작동되었다.
사라진 왼쪽눈과 왼쪽팔의 역할을 나노슈트가 대신하면서 그 역할로 힘이 분산되었으며 평소의 70% 밖에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더구나 가상의 왼쪽 눈과 왼쪽 팔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아바타 모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트만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소모해야만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힘을 쓰고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여기군!”
미라가 도망치기 전에 사거리를 나와 잽싸게 골목으로 꺾어 들어간 차영웅은 미라의 뜻대로 놀아났다.
처음에는 대포를 쏘더니 이번에는 공성퇴였다.
미라는 끝을 뾰족하게 깎은 커다란 통나무를 끌어안고 그대로 차영웅을 향해 돌진했다.
“이야아아아!”
퍽!
“커헉!”
차영웅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가슴 정중앙에 공성퇴를 맞고, 뒤에 지어진 목조 주택 네 채를 그대로 관통하며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다.
산산이 조각난 목재 파편이 허공에 흩날리고 마을 외곽에 박혀 있던 거대한 바위가 등에 닿아서야 마침내 멈췄다.
가뜩이나 나노슈트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그 충격이 상당해서 잠시동안 제대로 호흡을 내쉴 수가 없었다.
“하악, 하악, 학!”
“죽어버려어!”
미라는 이를 악물면서 차영웅의 가슴을 공성퇴로 힘껏 짓눌렀다.
차영웅의 등을 떠받쳐주는 거대한 바위가 넘어갈것처럼 흔들흔들 거렸다.
이에 차영웅이 착용한 나노슈트는 부랴부랴 가슴쪽으로 아트만 에너지 방어막을 집중시키고 착용자가 받는 물리적인 충격을 최대한 흡수하려고 시도했다.
그 덕분에 조금 여유가 생기자 차영웅은 즉시 한 손을 뻗어 미라를 향해 이볼브 에너지를 쏴날렸다.
차영웅의 이볼브 에너지의 위력은 255만 이볼브. 이 정도 위력이면 제 아무리 나노슈트를 입은 미라라고 해도 수초 간 정신상태를 혼미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참고로 미라의 아트만 에너지 위력은 216만이지만, 그녀의 직업이 로얄가드인 이상 그 위력이 스나, 위자와 견줄바가 못되었다. 탱커는 공격력이 약한 대신 도발력만 뛰어났다.
“윽!”
미라는 이볼브 에너지를 맞자마자 뒤로 튕겨나갔다.
동시에 공성퇴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차영웅은 숨통이 트였다.
그는 한손으로 가숨을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진 채 허우적 대는 미라를 향해 황급히 걸어갔다.
“학, 학...”
그는 침을 꿀꺽 사키고 나서 힘겹게 말했다.
“주변 사물을 활용해 임기응변을 하는 재주만큼은 인정해주지. 하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뛰어난 기술도 무용지물이라네. 내 앞에서는 어림도 없지. 나의 승리야.”
차영웅은 정신이 혼미한 미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대로 감전시켜 죽일 작정이었다.
그러나 미라의 본능은 끝까지 악바리 정신을 발휘했고, 영원의 시간이 흐르는 듯한 아득한 몽롱함 속에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천하MSC의 첫 코끼리급 사탄 레이드가 있던 날.
우주가 미라를 붙잡고 나노슈트의 사용법을 설명해주는 중이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아트만 에너지를 한번에 다 쏟아내고 싶을땐, 마치 자신이 수류탄이 된 것처럼 폭발하는 이미지를 상상하라고 그랬소. 그럼 나노슈트가 뇌의 신호를 인지하고 실제로 구현해준다고 하더이다.”
“구현해주는 건 좋은데 아트만 에너지를 한번에 다 써서 뭐하죠?”
“이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되겠지만, 아마데우스측 직원이 말하길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라 그랬소.”
“최후의 수단으로만...?”
“예를들면 자폭 같은거요. 레이드 도중 팀원들이 다 쓰러진 상태고 나만 살아남았다 생각해보시오. 거기에 사방이 꽉 막혀 도무지 탈출할 방법은 없고 눈앞에서는 수많은 적들이 개떼처럼 몰려오고 있소.”
“정말로 짜릿한 상황이네요.”
“그때 이 기술을 쓰는거요. 어차피 적들에게 둘러싸인 채 놈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치욕을 당할바에야 조금이라도 발악을 하고 죽어보자는 거지. 자신이 가진 모든 아트만 에너지를 일순간 다 쏟아부어서 주변을 초토화시키는거요. 운좋으면 적을 섬멸할 수도 있는 일이고.”
“와우. 그럼 위자처럼 범위 공격이군요. 한 번 밖에 못쓴다는 게 단점이지만. 폭발 반경은 얼마나 된다던가요?”
“체내에 남아있는 아트만 에너지의 잔량에 따라 다르다 그러오. 하지만 손톱만큼의 양만 남아있어도 반경 10M는 다 쓸어버릴 수 있다더군.”
미라가 슬며시 미소지었다.
“과연 써볼일이 있을까요?”
“제발 없길 바라오.”
다시 현재.
미라는 눈을 감은 채 해맑게 웃어보였다.
그녀는 충격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 무의식 상태에서 말했다.
“틀렸어. 나의 승리야.”
“......?”
순간 미라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나며 덩달아 차영웅의 얼굴도 환해졌다.
그 직후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한 대폭발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