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275화 (275/285)

275화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우주와의 잦은 밀회로 인해 결근을 수시로 하던 수연을 두고 태평이 나무라자 그녀는 정색을 하며 쌀쌀맞게 쏘아주고는 자리를 떴다.

태평은 화가 단단히 난 얼굴로 차영웅을 찾아갔다.

“형님. 수연이 그년 아무래도 우리랑 갈라설것처럼 보여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요즘 하는 행동들을 봐요. 우리가 복제인간이라고 무시하는거야 뭐야. 예전에도 한 번 술 먹고 그랬잖아요 왜. 솔직히 말해서 형님과 내가 진짜 차영웅과 이태평인지 잘모르겠다고.”

“음...”

태평의 말을 듣고 차영웅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수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던 수연과 자신들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라 생각했고, 더욱이 복제인간으로 새로 태어난 자신이 가장 유대감이 드는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코 그녀였다. 태평도 있었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는 복제인간이다.

복제인간과 관련하여 무슨 문제가 발생한다면 도움을 바랄 수도 없었다. 인권도 없는데 무슨 힘이 있겠는가.

하지만 수연은 인간. 필요한 것들은 그녀에게 부탁하면 됐고, 문제 발생시 대변인 노릇도 해줄 수 있었다. 복제인간이 인간을 설득하는 것보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설득하는게 더 잘먹힐테니까. 곁에 두기만 해도 큰 힘이됐다.

이런 상황에 그녀가 떠나면 큰 배신감이 들 것 같았다.

이대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차영웅은 며칠에 걸쳐 그녀의 뒷조사를 했다.

그리고 결국 자신들 몰래 우주와 정분이 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즉시 태평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차영웅으로부터 모든 사실을 전해들은 태평은 분개했다.

“이 기집애 진짜로 우릴 버릴 생각이었네. 싸가지 없는 년. 기집년들은 역시 이래서 안된다니까. 우정이 없어 우정이.”

“수연이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우리 셋의 믿음과 신뢰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수 밖에.”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수?”

차영웅은 책상으로 걸어가더니 서랍을 열어 100개의 알약이 들어있는 투명한 유리병을 꺼내 태평에게 건넸다.

“이게 뭐요?”

“ANH-11. 사람을 환각에 빠뜨리거나 기분 장애를 일으키고 우울, 분노, 초조, 불안, 질투, 강박장애 등을 평소 느끼는 감정보다 더욱 부추겨서 기폭제 같은 역할을 하는 약이지. 부작용으로는 지능지수와 기억력을 떨어뜨리기도 하는게 좀 단점이지만.”

“이걸 어떻게 하게요? 설마, 신우주한테 먹이라고요?”

“그 반대야. 수연이한테 한알씩 이틀에 한 번 꼴로 물에 타서 먹이도록 해.”

“형님. 이건 아니잖아요. 수연이한테 이걸 왜 먹여요?”

“이대로 수연이를 잃고 싶은가?”

“......”

“이제 곧 우리가 세상에 나가게 되면 제일 먼저 신우주를 넘어서야 하네. 그런데 우리의 경쟁 상대인 그의 곁에 수연이가 서 있다고 생각해봐. 우리가 가장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적과 한편이 된 그 모습을 보고 싶은건 아니겠지?”

태평이 흥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진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분통이 터져 미쳐버릴지도...!”

“그러니까 이 약을 수연이한테 먹이라는 거야.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걸 먹여서 어떻게 할 작정인데요? 설마, 병신으로 만들어서 데리고 있을 생각은 아니겠죠? 수연이가 미친년이 되면 우리랑 같이 레이드도 못뛸거 아닙니까.”

“그건 걱정마. 신우주와의 관계가 정리 되는 것을 확인하는대로 바로 복용을 중단시키면 되니까.”

“부작용도 있다면서요? 지능지수? 기억력? 애가 바보가 되면 어쩔려구요?”

“그리 심하진 않을걸세. 부작용이 난다하더라도 15세 소녀 정도의 지능으로 떨어지는거야. 그 정도면 일상생활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어차피 중학생이면 다 큰게 아닌가.”

차영웅의 말이 끝나자 태평은 손에 쥔 약병을 쳐다봤다.

“수연이를 당분간 미친년으로 만들어서 신우주를 떼어내겠다라...”

그는 씨익 웃었다.

“매우 괜찮은 방법이네.”

***

다음날 태평은 회사로 출근한 수연에게 태연하게 다가가서 ANH-11 알약을 탄 커피를 건넸다.

“왠일이야? 니가 커피를 다 사주고.”

“우리가 뭐 커피 한 잔 갖고 생색내는 그런 사이도 아니고 귀찮게 감동할거 없어. 내가 마시고 싶어서 한 잔 샀는데 사고보니 너하고 영웅 형님 것도 생각 나지 뭐냐. 덩달아 사온거야 신경쓰지 마.”

“그래? 알았어 잘마실게. 별거 아니라니깐 나중에 한턱 쏘라느니 딴말하기 없기.”

“내가 무슨 쫌생이냐? 맛있게 마시기나 해.”

태평은 딴청을 부리는 척 하면서 테이크아웃컵을 입가에 가져간 수연을 곁눈질로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쭈욱 들이켜 쭈욱. 쭈욱!’

수연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틀에 한번 꼴로 알약을 복용했고, 그 효과는 2주 뒤부터 슬슬 나타났다.

그녀는 갑자기 별거 아닌일에도 짜증을 내는 등 신경이 과민한 증상을 보였으며, 매일밤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기도 하고, 매일처럼 만나는 우주에게는 "평생 나만 사랑해줄거지? 올해 빨리 결혼하자.",

"사람들한테 알리고 공개 연애하면 안될까?"

하면서 점점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수연은 우주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자연스레 데바가 되었고, 덩달아 우주를 향한 집착은 그가 일상생활을 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대단히 심해졌다.

이런 와중에 약의 효과가 나타난것을 눈치 챈 태평은 이때다 싶었는지 따로 수연을 불러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갈색봉투를 건넸다.

“바빠죽겠는데 부르고 지랄이야. 그리고 이걸 나한테 왜 줘? 니가 하기 싫으니까 나한테 일시키는 거야?”

수연은 많이 변해있었다.

잠깐 이야기 하자고 했을뿐인데도 투덜투덜 신경질을 잘부렸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태평은 짐짓 웃으며 말했다.

“일 아니니까 안심하고 열어봐.”

“일 아니면 뭔데?”

“그냥 뭐랄까... 어쩌면 너한텐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려나? 각오하고 열어보는것이 좋을거야.”

“......?”

수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수십장의 사진.

우주가 다른 여성들과 만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여성들 얼굴 대부분이 수연의 눈에 익은 사람들이었다.

“강미라... 한소민... 그리고 이 여자랑 아이들은 대체 누구야?”

태평은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지었다.

“글쎄? 그런데 분위기를 보면 딱 감이오지 않아? 다들 신우주의 여친에다가 그의 아이들이 아닐까하는데 말이야. 한마디로 신우주는 여러 여자들과 만나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다는거지. 참 카사노바가 따로 없네.”

사진을 바라보는 수연의 눈은 더욱 커지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 밖에 모를줄 알았던 우주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니! 게다가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씩이나! 심지어 갓난 아이 두 명까지!

수연에게는 험난한 직장 생활을 수차례 헤쳐나오면서 그녀를 지탱하게 해준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족, 친척 없이 고아로 자란 그녀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때 자신을 한평생 잊지 못하며 매년 추모하고 그리워 해줄 수 있는 남자가 있길 바랐었고, 현시점에서 그 사람은 우주였다.

그런데 자신과 사귀고 있는 와중에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있었다니!

이래서야 우주의 기억에 남을 수 있을리가 없다. 그저 한때 즐기다 헤어진 스쳐지나간 여자로 남게되며 수년 뒤엔 까마득한 기억속에 얼굴조차 떠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개새끼가...!”

수연은 솟구치는 분한 마음에 사진을 쥐고 있던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해가며 우주와 합의점을 찾기에는 이미 그녀의 마음과 몸이 병들어 있었다.

“우리 임무는 늘 고되고 힘들어! 자칫하면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어! 그래서 나만 바라봐주고 영원히 날 기억해줄 사람이 필요했어! 그랬는데 이딴 놈과 같이 있다가는 난 그저 창녀 대접 받으며 흔한 여자가 될것 같네 빌어먹을...!”

그날 수연은 곧장 우주의 아이를 강제로 유산시켰다.

그리고 우주에게 농락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그를 향해 칼을 빼들었다.

“네가 이룬 모든 것을 다 부숴줄게. 기다려.”

그 다음날.

도주중인 한규만 회장이 수희와 현아의 스폰서였다는 스캔들이 터졌다. 더불어 수희에게는 한규만 회장과의 사이에 아이까지 있다는 유언비어까지 퍼졌다.

이 일로 인해 국민들이 서로 의견이 엇갈리며 진실을 찾아 헤매고 있을 무렵, 또다시 대형 스캔들이 터졌다.

우주에 대한 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영웅 신우주가 전범 재판을 받는 중인 한소라를 비롯해 세 명의 여성들과 문란한 성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소식.

우주에게는 이미지 타격이 매우컸다.

국민들은 천하물산이라는 기업을 질나쁜 변태집단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나마 지지해주던 여성팬들까지 끝내 등을 돌리며 그는 대한민국의 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 돌연, 신라그룹 이선주 회장이 고립될 운명에 놓여있던 천하물산을 지지하는 인터뷰를 자청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매출감소에다가 입사희망자도 사라져 힘들어하는 천하물산을 돕기 위해서 자사의 엘리트 수라인 수연을 임대형식으로 보내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다.

“신우주 씨는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입니다. 전 천하물산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것은 저의 바람이지만 현재 우리 신라그룹은 팀 정비를 하고 있는 중이라서 레지스트 쉴드 내에서의 생산 활동이 전부 올스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무한대로 쉬고 있는 한편 자사의 실력 있는 수라들의 컨디션과 임무 감각이 나빠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기도 하고, 이런 와중에 최근 천하물산이 인력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우리 신라그룹은 자사 수라의 임무 감각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도 하고, 또 천하물산의 신우주 사장님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어떻습니까? 우리 신라그룹이 생산활동을 재개하는 시점까지 오수연 씨를 비롯해 신라그룹 직원 여럿을 천하물산에 임대 보내고 싶습니다.”

그 광경을 TV로 지켜보고 있던 우주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더니 역시 장모님인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그는 미끼를 덥썩 물었다.

우주는 평소에도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수연이 천하물산에 영입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녀와 늘 같이 있고 심정 뿐이었다.

그러니 이선주 회장의 제안을 마다할리가 있겠는가.

수연은 능글맞은 구렁이처럼 자신의 속내를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

우주는 그녀의 본심을 모르고 신라그룹의 거짓된 선의를 혼쾌히 받아들이며 당장 계약서에 싸인 했다.

수연은 다음날부터 바로 천하물산으로 출근했다.

그녀는 당시 천하물산 직원이던 수희, 현아와 매우 친하게 지냈으며 누가봐도 전폭적인 우주의 지지자였다.

천하물산은 그녀를 포함해 함께 임대되어온 신라그룹 직원들의 도움으로 인해 다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날 새벽.

천하물산 소유의 가공 공장이 불타올랐다.

방화범은 성일로 지목되었고, 며칠 후 은행 앞에서 발견된 그는 곧바로 구속되었다.

우주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러는 사이 이선주는 몰래 수연을 호출했다.

“어때요? 공장에 불지르니까 만족했나요? 수연 씨가 천하물산에 들어갈 수 있게 힘쓴건 나고, 이젠 당신이 날 도와줄 차례입니다. 천하물산을 괴롭힐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수연 씨가 하려는 복수와 일맥상통하기도 해요. 무척 쉽죠. 누굴 죽여달라는 것도 아니고 이번처럼 불지르라는 것도 아닌 그저 못된 것들한테 따끔한 고통을 줄 생각에 그들이 쓰던 물건을 몇개 가져오기만 하면 됩니다.

이선주의 부탁은 간단했다. 수희와 현아의 집에 침입해 그녀들의 개인물품만 훔쳐오면 그뿐이었다.

그렇잖아도 수연은 의도적으로 수희와 현아와 친하게 어울렸었다. 가끔은 두 사람의 집에 놀러가기도 했고, 집에 누가 있고, 언제 집을 비우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대한민국 전체가 들썩였다.

한규만 회장의 비밀별장에서 수희와 현아의 물품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속보로 보도된 것이다.

동시에 인터넷에서는 미국의 어느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7살짜리 아이 사진이 올라왔다. 아이의 쌍꺼풀진 눈매가 수희와 닮은것을 본 국민들은 그녀의 아이로 의심했다.

수희는 이혼한 친언니의 자식이라고 부인했으나 한 번 터진 유언비어는 나날이 증폭됐고, 그녀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울러 우주와 관련된 일이 또 터졌다.

수연은 작심하고 경찰서를 찾아가서 그를 강간범으로 고소했다.

이는 신라그룹조차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고, 이성을 잃은 그녀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그녀의 지능은 지난날 자신도 모르게 복용했던 약으로 인해 퇴화 됐고, 남을 믿지 못하게 되었으며 시기와 질투만 늘어 있었다.

훗날, 우주는 수연과 휴대폰으로 주고 받은 메세지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들을 증거를 제출한 끝에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고 혐의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은 우주와 수연의 사이가 완전히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현재.

흐느껴 울던 수연의 배를 깔고 앉아 있던 우주는 그녀의 목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예전 일들은 이미 다 잊었소.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나와 관련된 일뿐이고, 지난날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망친 죄와 이번 레이드에서 행한 짓들에 대한 대가는 치뤄야 할거요.”

“우주야...!”

수연이 구슬프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우주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죽음으로 속죄하시오. 그리고 이것이 비록 거짓된 죽음이지만 나중에 다시 눈을 뜨거든 그땐 부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주길 바라오. 나와 처음 만났을때의 누님처럼, 사탄에게서 날 구해주려 노력하던 그때 그 사람으로.”

“크윽!”

우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수연이 바둥거리지 못하도록 양다리에 힘을 꽉 주어 조이면서 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목을 졸랐다.

발버둥치면서 우주의 팔을 붙잡던 그녀가 컥컥 숨을 몰아쉬더니 곧 잠잠해졌다.

그녀의 심장박동이 멈췄으며 몸은 서서히 차가워져갔다.

우주는 수연의 벌려진 입을 조심스레 닫아주고 초점없는 두 눈도 감겨주었다.

“미안하오...”

그리고 일어섰다.

벗꽃 나무로 가득한 아름다운 풍경을 둘러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나만 남은것인가.”

쓸쓸한 목소리.

이어서 눈에 힘을주고 말했다.

“모두를 꼭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난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얼마든지 덤벼봐라 바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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