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천하MSC는 함경남도 장진군 상공에 떠있는 세이비어와 접촉을 하기 위한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남은 것은 집으로 돌아와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뿐.
료코의 방.
우주와 부인들이 산소호흡기를 착용한 채 누워 있는 료코를 바라봤다.
잠을 자는 듯한 그녀의 얼굴은 18개월 전에 보았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이라도 이름을 부르면 당장 눈을 뜨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깨어날 것 같았다.
우주의 옆에 서 있던 소라가 말했다.
“드디어 내일이군요.”
“내일이오.”
우주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료코의 한 손을 잡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쌌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손에 힘이 없어 살짝만 놓아도 스르르 미끄러졌다.
가슴이 아팠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견디느라 고생했어. 이제 내일이야. 오늘만 참으면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사랑하는 미소도 다시 볼수 있고.)”
우주는 료코의 귓가에 대고 일본어로 속삭이듯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료코의 발쪽을 보니 두 발이 훤히 보이도록 이불이 젓혀 있었다. 올해 여섯 살이 되는 미소가 제 어미의 발을 정성스레 물수건으로 닦아주는 중이었다.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애써 웃음 짓고 말했다.
“내일 엄마를 꼭 데려올테니 안심하거라.”
미소는 료코의 발을 닦다 말고 우주를 바라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알겠사옵니다 아버님.”
미소의 외모를 비롯해 행동이나 말투가 료코를 빼다 박았다.
우주는 순간 료코를 떠올리며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뒤를 돌아보았다.
소라, 소민, 미라, 수희, 현아, 영애, 하나, 지연이 모두 자신을 쳐다봤다.
무표정, 슬픈표정, 지루한 표정, 분위기에 동요하는 표정, 멍한 표정, 내일 전투를 생각하는 표정, 우주를 걱정하는 표정, 파워드 슈트의 고장을 염려하는 표정, 저마다 표정은 달랐지만 각자 가슴 한켠에 료코를 그리워하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우주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이제 거실로 나갑시다. 배도 출출하니 얼른 자야겠소. 저녁을 일찍 먹어서 그런가.”
슬퍼하고 그리워 하고만 있을때가 아니다.
료코는 죽은 사람이 아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희망이 있다. 그러니 지금은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어서 내일을 준비하는게 먼저다.
부인들이 하나둘씩 거실로 나가고 제일 뒤에서 가던 지연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녀가 무심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몸은 어떠하오?”
“오늘 오전에 병원에 갔다왔는데 우리 줄리엣이 자리도 잘잡았고, 심장도 뛰고 잘있데요.”
지연은 우주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직장 일로 서로 잦은 만남을 갖다보니 그녀도 어느새 우주와 깊은 관계를 맺게되었다.
그녀는 임신 석달째였다.
지연을 제외하고 다른 부인들은 모두 출산을 해서 집안에 아이만 무려 열명이다. 거기에 따로 살고 있는 연화와 현주까지 합하면 우주의 아이는 총 열 두 명이나 되었다.
“내일은 집에서 쉬고 있으시오. 네오 라바 슈트의 성능 테스트는 다 끝내놨으니 따로 할 일이 없을거요.”
“그래도 저도 현장에 가보려고 해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위험하오. 뱃속에 있는 줄리엣을 위해서라도 편히 쉬어주길 바라오.”
우주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는 거실로 나갔다.
지연은 미소와 함께 방안에 남아있었다.
작은 손으로 제 어미의 발을 닦아주는 미소를 아무 생각없이 바라봤다.
아이가 귀여웠다.
나도 미소처럼 귀엽고 예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나온 배를 무심코 어루만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뭘 갖고 놀지?”
과학자의 입장에서 아이의 장난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남들이 만든 장난감보다는 자신이 직접 만든 장난감을 줄리엣에게 전해주고 싶어졌다. 아이가 분명 기뻐할 것이다.
“현실처럼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가상 현실 공간이라면 아이가 다칠 우려도 없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어서 재밌어 할것 같긴한데...”
그녀는 얼른 자신의 방으로가서 PC를 켰다.
인터넷으로 시중에 나와있는 가상현실게임에 대해 알아보았다.
모두가 폭력성과 선정성이 난무하는 것들 뿐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용 프로그램 같은 것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아무래도 가상현실게임 안에서의 아이템이 현실에서도 가치가 있는 만큼 언제든 지갑을 열 수 있는 중고등학생과 성인층을 타겟으로 삼은게 많아보였다.
지연은 모니터를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다 이런것들 뿐이구나. 안되겠어. 우리 줄리엣을 위한 게임을 만들어줘야겠네.”
***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우주가 이끄는 천하MSC는 곧장 전방주둔지로 향했다.
이번 일정에는 1군과 2군 모두 동원되었다.
전방주둔지는 국내외 취재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팀원들의 별거 아닌 행동 하나하나에 여기저기서 플래쉬가 터질정도로 비상한 관심사였다.
천하그룹의 대변인은 기자들 앞에 나서서 이번에 동원된 인력과 물자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세이비어에 접근하려 한다는 전 세계 초미의 관심사인 만큼 불필요한 브리핑도 해줘야만했다.
“1군, 2군 합쳐 50명이고 전원 나노슈트로 무장했습니다. 여기에 지원을 위한 보조 인력이 2백여명이 넘고, 최첨된 탐지장비 및 전술차량, 전차와 장갑차, 구급차를 포함해 다연장 로켓포를 실은...”
이번 일정에 앞서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이 심했다.
그들은 세이비어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고, 레지스트 쉴드라는 금맥에 이상현상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한국 정부와 천하그룹이 벌이려는 행동은 무모하고 쓸모없는 짓이라며 공개적으로 폄하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세이비어를 향해 그 어떤 공격도 하지 않을 생각이며 그녀의 신체 중 우리 영토에 속한 부분만 연구를 위해 살펴볼 계획이라고만 밝혔다.
그동안 세 나라는 세이비어의 정수리를 기준으로 삼등분 해서 레지스트 쉴드 지역을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고 있었다. 레지스트 쉴드 안에도 국경선이 있었고, 해당 국가의 국민이 아니면서 함부로 넘어가서 생산활동을 벌였다간 체포되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연구 목적으로 자국 영토 안에서만 있겠다는데 중국이나 러시아가 나서서 직접적인 제재를 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현시대는 한국, 중국, 러시아가 연합해 세계를 주도 하고 있으며 한국은 우방국이다. 그들은 섣부른 행동을 하기보다는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현재로서는 천하MSC가 세이비어에게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 훼손하는지 인공위성을 통해서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따지는 것은 그 뒤에 하기로 했다.
“고생해주시오.”
“료코를 꼭 데려와주세요. 걔가 없으니까 요몇년 입이 심심하지 뭐예요.”
소라가 전방주둔지에 남아 모든 작전 상황을 통제하도록 하고, 우주와 지연을 제외한 다른 부인들은 함께 레지스트 쉴드로 향했다.
“출발합시다.”
우주의 신호로 레지스트 쉴드로 진입한 천하MSC는 잘 깔린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시야 확보 및 안전을 위해 도로 양쪽에 울창하게 자라있던 나무들을 먼 곳까지 모두 쳐낸 까닭에 들판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달리는 기분이었다.
중간중간 돌연변이 생물들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이럴때를 대비해 미리 대기 하고 있던 팀원들이 달리는 차량 위에서 즉각 처리를 했다. 요즘은 토끼급 돌연변이 생물 한 마리도 버거워 하던 옛날이 아니다.
가끔 코끼리급 사탄과 마주칠때만 차량에서 뛰어내렸을 뿐, 나머지는 나노슈트를 입은 채 대충 쏴맞춰도 알아서 고꾸라졌다.
원샷원킬,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식으로 목표 지역인 장진군까지 무난하게 달려나갔다.
사실 가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문제지 이전에 공사때문에 몇차례나 오가던 길이다.
세이비어는 계속 눈부신 빛을 발하며 상공에 떠있었다.
몇시간쯤 지나 작게만 보이던 그녀가 점점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오가 지나 고속도로는 끝이 보였고 마침내 장진군에 도착했다.
우주는 만약을 대비해서 세이비어와 3km 거리를 둔 채 작전지휘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흙을 파내 만든 널따란 빈 공터에는 도로를 깔기 위해 동원되었던 건설 중장비 차량들과 자재들이 널려있었다. 참고로 인부들은 오늘 쉬는 날이었다.
“하차!”
상관의 명령으로 모두가 차에서 뛰어내렸다.
지원팀은 이것저것 옮겨다 자리 배치를 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본격적인 작전이 실시되기 전 우주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챙기면서 대략 1시간 정도를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군팀으로 하여금 지원팀을 지키게끔 지시한 뒤에 그 자신은 1군팀을 이끌고 세이비어가 있는 곳으로 곧바로 향했다.
“출발! 서두르기보다는 안전이 최우선이오!”
개마고원의 남서부를 차지 하는 장진군의 지형은 말그대로 험난했다. 그렇다고 수라나 데바인 이들에게 숨이 차오를 정도 힘든 지형은 아니었다.
산 두 개를 돌아서 마침내 세이비어의 발밑에 다다르자 커다란 호수가 보였다.
호수 주변에는 물을 마시러온 몇몇 돌연변이 짐승들이 보였으나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지 않는 이상 팀원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놀랄만한 뭔가가 있을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산하네요. 한산하다 못해 다큐보는 것처럼 지루하네.”
미라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애초 계획한 곳이 이 지점이었죠?”
연화가 그렇게 말하고 뒤이어 소민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우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혼자서 가실 수 있겠어요?”
“그럴 수 밖에 없소. 네오 라바 슈트가 있으니 걱정마시오.”
인공위성을 통해 몇달전부터 이곳 지리를 전부 파악해둔 상태였다. 위협이 될만한 사탄이 없다는걸 진즉에 알고 있었으며 상공에 떠있는 세이비어를 지상으로 데려오는 것이 목표였다.
이런 와중에 팀원 모두가 현재 걱정하는 것은 우주가 세이비어와 접촉하는 순간 위험한 일이 발생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세이비어가 내뿜는 찬란한 빛이 인체에 해롭다든지 인간을 녹여버릴 만큼 뜨겁다든지 하는.
우주는 홀로 떠나기 전 팀원들에게 말했다.
“다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세이비어를 안고 곧 돌아오겠소.”
수희가 우주를 가볍게 껴안아 주었다.
“세이비어한테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면 바로 도망치도록해.”
“알겠소.”
그녀에 이어서 영애가 우주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울상을 지었다.
“내래 첫남자가 서방님이라우. 서방님 없인 못사니까 꼭 살아서 돌아오라우. 아직 꽃다운 20대인데 벌써부터 과부되기눈 싫습네다.”
“만약 소생이 죽거든 새 남자를 만나 결혼하시오. 절대 외롭게 지내지 마시오.”
“서방님은 참으로 시원하십네다. 그러니까 부인도 여럿이겠지마는 내래 서방님과 성격이 달라서 그런지 그 말씀이 참 답답하구만요. 내는 일편단심입네다. 절대 그렇게 못합네다. 은장도로 가슴팍을 푹 쑤셔서 죽을기라요.”
우주는 피식 웃으며 영애의 등을 토닥였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보다못한 현아가 나서서 영애를 조심스럽게 떼어놓으며 우주를 바라봤다.
“우리 사이 뻔하잖아. 별거 있어? 잘갔다와. 난 여기 있을테니까.”
“그래 고맙다.”
“울거나 그런건 바라지마.”
“아무일 없을테니까 바라지 않아.”
“흥.”
현아가 짐짓 새침하게 콧방귀를 뀐 뒤 우는 영애를 달래며 뒤돌아섰다.
그 다음으로 하나가 눈앞에 섰다.
“제가 지금 관측장비로 세이비어가 내뿜고 있는 저 빛에 대해서 조사해봤는데 열도 없고, 그렇다고 영하의 온도도 아니고 그 밖에 특이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네오 라바 슈트까지 착용하고 계시니까 갑작스러운 폭발이나 공격을 받더라도 최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을거예요.”
우주는 엄지를 추켜 올렸다.
“응. 고맙소.”
그 말을 끝으로 즉각 헬멧을 착용했다. 팀원들과 더 같이 있다가는 시간만 지체될것 같았다.
얼른 다녀올 생각이다.
그는 네오 라바 슈트의 기능 중 하나인 비행 모드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수천개의 나노조각들이 등쪽으로 모여 한쌍의 로켓 부스터를 만들었다.
이어서 로켓부스터가 점화되며 우주의 몸이 상승을 시작했고, 그는 그대로 세이비어가 있는 곳을 향해 음속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