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유리한이 헛숨을 들이마시고는 황급히 유서아의 가슴 부근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심장은 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한은 느꼈다. 유서아의 심장 옆에 자리한 마나 하트가 그녀의 심장을 대신하여 뛰고 있음을.
“하… 하하…….”
실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내 유리한이 서글프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키득거렸다.
“조카님, 내가 나중에 멀린이 쓴 책들 모두 구해다 줄게. 그러니까 일어나면 멀린만큼 훌륭한 마법사가 돼야 해. 서아야.”
유리한은 두 눈을 꼭 닫고 있는 유서아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망자의 아우성은 죽은 자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다.
그것도 그 죽음에 자신이 연관되어 있는 경우에만 사용이 가능한 스킬.
‘그런데 서아는 살아있어. 미래가 사라졌기 때문에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판단한 걸까?’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유리한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뒤 상태 창을 살폈다.
[칭호: 어둠을 지배하는 자(S)]
죽기 전에는 없던 칭호.
저게 갑자기 생겨난 이유는…….
“니르로르.”
어둠을 몰고 왔던 드래곤께서 귀한 선물을 주고 가셨다. 어제의 적은 오늘의 아군이라더니, 딱 그 꼴이군.
유리한이 피식 웃고는 바깥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 할 일이 생겼어. 우리 조카님 좀 업어줘.”
“네? 시우는 여기 없는데…….”
“시우 말고 서아.”
유리한이 제 품에 안겨있는 유서아를 가리켰다. 도웅이 유서아를 발견하는 깜짝 놀라 외쳤다.
“애… 앰뷸런스! 119!!”
“부르지 말고 어서 업기나 해줄래? 우리 조카님께서는 괜찮으시니까.”
그러니까 유서아가 왜 당신 조카예요! 유서아한테 가족이 없는 건 우리가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도웅은 유리한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대며 그리 외치고 싶었지만.
“넵.”
그는 아무 말 없이 유서아를 업었다. 유리한에게 개기기에는 그녀가 보여준 무력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유리한은 유서아의 위에 담요를 꼬옥 덮어주고는 인벤토리를 마저 살폈다.
니르로르를 처치하면서 폭발에 휘말렸기 때문인지, 꽤 많은 아이템이 파괴된 상태였다.
“용용이 새끼 죽이러 가기 전에 중앙 박물관에 몇 개 기부해 놓기를 잘했네. 나중에 챙기러 가야지.”
도웅은 두 귀를 의심케 하는 말에 두 눈을 잘게 떨었다. 하지만 유리한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인벤토리에 보관 중이던 아이템 중 겨우 쓸 만한 것을 발견했다.
“그래도 애들 보금자리였으니까 일단은…….”
이렇게만.
도웅은 유리한의 손에 들려있는 아이템을 보고는 경악에 찬 얼굴을 보였다.
혼란과 격변의 시대.
몬스터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멀린이 만들었다는 레전더리 방어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멀린을 지독하게 팠던 멀린 덕후인 도웅이 파르르 떨었다.
“다, 당신은 도대체……!”
“뭐야, 왜 그렇게 떨어? 떨지 마. 우리 조카님 떨어뜨리면 그대로 죽을 테니까.”
유리한이 제 조카들이 살았던 낡은 옥탑방에 아이템을 설치한 후 도웅에게 말했다.
“좋아, 이제 안내 좀 부탁할게.”
도웅은 옥상에 널려있는 수 명의 장정을 흘긋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십시오.”
* * *
해가 저문 지 오래인 시간이나, 환하게 불이 켜진 곳이 있었다. 바로 탑을 오르는 것을 중도 포기한 플레이어들이 탑의 바깥에서 모여 만든 곳.
[행복 머니]
사채업자들의 쉼터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의 사장인 백상철이 호탕하게 웃었다.
“아이고, 우리 막내! 같이 나간 형님들은 어디 가고, 돈 대신 애새끼를 잡아다가 왔네? 그런데 업고 있는 애는 누구래?”
도웅이 답할 새도 없이 백상철이 유리한의 미간을 톡톡 두드렸다.
“왜? 이자 상환 기간을 또 늘려달라고?”
유리한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백상철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 시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백상철이 너스레를 떨었다.
“안 돼~! 여기서 더 늘려주면 우리는 뭐 먹고 살라고. 그런데 얼굴을 좀 고친 것 같다? 아닌가? 내 착각인가?”
“착각 아니야, 아저씨.”
“응?”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백상철의 고운 이마를 향해.
빠악―!
손바닥을 날렸다.
얼얼하네.
백상철의 마빡을 찰지게 때린 유리한의 감상이었다.
‘그나저나 근력을 좀 길러야겠어. 체력도.’
마력이 무한인 덕분에 스킬을 사용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으나, 몸이 문제였다.
‘얼마나 움직였다고 몸이 벌써부터 삐걱거려?’
더군다나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몸을 만들어야겠다.
조카를 되살리고 동생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면 그래야 했다. 그렇게 유리한이 얼얼한 손바닥을 문지를 때였다.
“아오……!”
백상철이 울리는 골에 머리를 부여잡고는 소리 질렀다.
“이년이 돌았나!”
곧장 뺨을 향해 다가오는 주먹이 보였다. 유리한은 가볍게 이를 막았지만.
“이런 미친! 약해져도 너무 약해졌잖아!”
“……?”
주먹을 막은 유리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에휴,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거 급소를 공략한다.
유리한이 단숨에 백상철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의 주먹은 어느새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백상철이 놀란 눈을 보였다가 이내 히죽거렸다. 유리한의 움직임이 눈에 훤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거야 뻔하지.’
남자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급소는 가랑이 사이.
아마 자신의 대를 끊으려고 할 터. 백상철이 씨익 웃으며 다리를 뒤로 물렸지만. 유리한이 노리는 곳은 가랑이 사이가 아니었다.
“컥……!”
그녀가 노린 곳은 백상철의 턱. 유리한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오, 몸이 좀 단단한가 봐? 다른 애들은 이거 한 방에 나가떨어졌는데, 멀쩡하네?”
그럼 가랑이도 차야지.
유리한은 그대로 다리를 들어 백상철이 후손은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어 줬다. 백상철은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입에 게거품을 문 것 같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을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도웅이 입을 뻐금거렸다.
“크… 큰형님…….”
“아저씨, 지금 아저씨네 큰형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아?”
유리한이 방긋 웃었다.
“우리 작은조카님 모시고 오셔야지.”
“네? 넵!”
“업고 있는 큰조카님은 저쪽 소파에 조심히 내려놓으시고.”
“네엡!”
도웅은 유서아를 소파에 눕히고는 허겁지겁 백상철의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그러기 무섭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도웅! 야! 야, 인마!!”
유리한이 옥탑방 옥상에서 때려눕혔던 행복 머니의 직원들이 정신을 차리고 돌아온 거다. 유리한은 도웅이 미처 닫지 못하고 나간 문을 활짝 열며 웃었다.
“저 아저씨는 지금 바빠.”
“와악! 시발!!”
그들의 손에는 무기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쇠몽둥이부터, 칼 등등. 유리한이 자신들의 아지트에 쳐들어왔을 것이라고 믿고 무기를 챙겨온 것이었다.
‘오, 눈치 좋고.’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것 하나.
자신들의 사장.
행복 머니의 주인인 백상철(특: 23Lv의 플레이어)이 유리한에게 깔끔하게 얻어맞았다는 거였다. 유리한이 몸을 살짝 틀어 그들의 사장이 어떤 식으로 바닥을 구르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
“…….”
꿀꺽.
누군가 침을 삼켰고, 유리한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한판 더?”
“아… 아니요…….”
유리한에게 된통 얻어터졌던 행복 머니의 사원들은 알아서 무기를 내려놓았다.
* * *
[스탯]
근력: 1 체력: 1 정신력: 1
속도: 1 명성: 1 마력: ∞
유리한은 상태 창을 끄고는 어깨 부근을 꾹꾹 눌렀다.
무한의 마력을 이용한 스킬과 착용 중인 아이템으로 여럿의 장정들을 해치운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스탯을 올려야 해. 근력과 체력 먼저. 그리고 속도도.’
피로가 너무 쌓였다.
당장에라도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있잖아요, 누나. 누나는 누구예요? 우리 누나는 어디 있어요?”
맞은편에 앉아있는 대여섯 살 정도의 어린아이와 대화를 나눠야 하기 때문이었다.
‘서아와 일곱 살 차이라면, 지금 열 살일 텐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이는 너무나도 작았다.
유리한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너희 누나는 잠깐 자는 중. 그리고 나 누나 아니야.”
“아닌데, 누나 맞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동생의 어릴 적 모습을 똑 닮았다. 유리한은 씁쓸하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유서아는 사장실에 딸린 방에 있는 침대로 옮겨진 상태였다. 눈앞의 유시우는 절대 모를 일.
유리한이 미소를 지었다.
“유시우, 네 이름 맞아?”
“네, 맞아요!”
“여기 형아들이 잘해줬나 봐? 무서웠을 텐데.”
“웅? 하나도 안 무서웠는데요?”
유시우가 유리한의 뒤에 서있는 도웅을 가리켰다.
“저기 형아는 시우한테 책을 사줬고요!”
그다음은 백상철이었다.
“저 형아는 시우한테 아이스크림이랑 사탕… 으음, 맛난 거 다 사줬어요!”
“그래……?”
유리한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베이비를 잃을 뻔한 백상철이 흠칫 몸을 떨고는 말했다.
“그, 저희도 상도덕이 있는 녀석들이라…….”
“그런데 서아한테는 그랬단 말이지? 상도덕이 너무 넘쳐나셔서.”
할 말이 없다.
백상철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저기요, 누나.”
“누나가 아니라 고모.”
“고모?”
유시우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그치만 고모는 돌아가셨다고 했는데요?”
“나도 그런 줄 알았거든.”
그리고 그랬었다.
“하나님이랑 하이 파이브 한 번 하고 이렇게 돌아왔지. 조카님들 보러.”
유리한이 유시우를 보며 방긋 웃었다. 유시우는 두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네 고모가 정말 멋진 일을 하고 너희 보러 돌아왔다는 말이야.”
“우움.”
유시우가 그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두 뺨을 빵빵하게 부풀렸다가 말했다.
“그러면 고모. 시우 TV 보고 싶은데 봐도 돼요? ‘뚜비야, 놀자’ 재방송하고 있을 텐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유시우는 좋아라 하며 TV를 틀었다. 그러나 화면에 나온 것은 유시우가 평소 즐겨 보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웅? 안 하네. 그냥 꺼야겠다.”
“잠깐.”
유리한이 아이의 행동을 저지한 후 비릿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