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21)화 (21/235)

21화 

으드득, 아레스가 이를 갈고는 고개를 꾸벅였다.

“죄송합니다, 사제님.”

“아니요, 괜찮습니다.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뿐이니까요.”

요한은 아레스가 내뱉은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리스체가스의 후계자, 요한의 외삼촌이기도 한 그는 주먹을 꽉 쥐고는 몸을 돌렸다.

아레스가 기사들을 이끌고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유리한은 요한을 일으켜 세웠다.

“요한.”

“네, 유리한 씨.”

태연하게 대꾸하는 목소리에 울분이 차올랐다. 유리한은 얼굴을 찡그리며 요한의 옷을 털어주었다.

“하얀 옷이 아주 넝마가 돼버렸네! 당신도 발로 한 대 까주지 그랬어요?”

“태양교에서는 폭력을 금기하고 있거든요.”

“사람이 살다 보면 폭력도 행사하고 그럴 수 있지! 그렇다고 맞는 대로 가만히 있어요?”

요한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며칠 봤다고, 유리한은 요한 리스체가스의 습관을 몇 가지 파악했다.

하나, 그는 답하기 곤란한 상황에서는 이렇듯 소리 없이 웃으며 답을 피했다.

유리한은 한숨을 쉬었다. 이때는 그를 암만 닦달해도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유리한은 요한에게 잔소리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를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저랑 잠깐 은하의 언덕 쪽으로 가주실 수 있나요? 플레이어들에 관한 일이에요.”

“그렇다면 기꺼이요.”

플레이어들을 위해 움직이기만 하면, 몸에 새겨진 저주는 움직이지 않는다. 요한의 말에 유리한은 기꺼이 그를 도시 밖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유리한이 기껏 요한을 데리고 온 보람도 없이, 그녀가 마차에서 구해낸 열 명의 플레이어들은 모두 숨이 끊어져 있었다.

“…너무 늦은 것 같네요.”

“요한, 당신을 데리러 갈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말이에요.”

의식에 한해서는 괜찮았다는 거다. 그들의 상태는 하나같이 아주 엉망이었으니.

유리한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아무래도 공물로 바치면서 독약을 복용시켰나 보다. 오우거에게 먹히지 않더라도, 서서히 죽어가도록.

‘악질이라니까.’

유리한이 리스체가스 가문의 행동에 조용히 분노하고 있을 때, 요한은 죽은 자들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그 모습이 마치 신께 고해성사를 올리는 죄인같이 보여, 유리한은 잠깐 숨을 죽였다.

한참 동안 그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던 요한이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유리한 씨, 이분들이 이렇게 된 건 저 때문이에요.”

요한 리스체가스는 느닷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유리한은 가만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어릴 적에 가주님께 사랑받고 싶었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저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분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레스 리스체가스.

외삼촌인 그는 자신을 볼 때마다 때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트리샤 리스체가스의 앞에서는 요한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것을 공부해서 가주님께 알려드렸죠. 이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법이라거나, 몬스터의 위협에서 피하는 법.”

그렇게 한다면 사랑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트리샤 리스체가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런 줄 알았었다.

“그게 이렇게 돌아왔네요.”

고해성사를 올리는 죄인처럼 보였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입 안이 쓰다.

유리한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요한에게 말했다.

“당신 탓이 아니에요. 알죠?”

가식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요한은 저 목소리가 좋았다. 그렇기에 이따금, 마음속에 묻어뒀던 곰팡이 핀 과거를 유리한에게 꺼내는 건지도 모른다.

요한은 말없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서글픈 얼굴이었다.

‘왜 저렇게 아련하고 난리람.’

유리한은 요한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조심스레 쥐었다.

“요한, 어린 날의 당신을 후회하지 마세요. 당신은 그저 가족에게 사랑받고자 발버둥 쳤던 것뿐이니까요.”

나는 요한 리스체가스의 어린 날을 모른다. 하지만 그려볼 수 있었다.

그가 리스체가스 가문의 인간들한테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그 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요한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이 사람들을 죽인 건 당신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울지 마요.”

아이의 눈물에는 한없이 약해지는 유리한이었다.

요한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을 피한 후, 황급히 눈가를 가렸다.

“저 안 울어요, 유리한 씨.”

“울 것 같아서 그래봤어요.”

유리한이 키득거리며 요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한은 가만히 그 손길을 느끼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유리한 씨는 가끔 저를 너무 아이처럼 취급하시는 것 같아요.”

“제 나이에 비하면 아이가 맞으니까요.”

탄생 연도를 기준으로 하면 50이 넘는 나이다. 그러니 유리한의 눈에는 요한이 아이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암만, 그녀가 30년의 시간을 공백으로 날렸다고 해도 말이다.

유리한은 요한의 머리에서 제 손을 거두고는 말했다.

“머지않아 리스체가스 가문에서 저한테 사람을 보내올 거예요. 오해를 풀자느니, 뭐니. 그런 말을 지껄이면서요.”

트리샤 리스체가스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쯤 그녀의 귀에는 마차가 강탈당한 일뿐만이 아니라, 아레스와 있었던 일까지 들어갔을 터.

“초대장이 오면, 같이 가지 않을래요?”

“저는…….”

“수업받아야죠, 요한. 저는 찾아가는 방문 서비스를 제공해 드리지 않거든요.”

유리한은 참으로 능청스러웠다. 때문에 요한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 정도면 꽤 훌륭한 학생 아닌가요?”

“아직 부족해요. 사람은 자고로 맞는 것을 그대로 돌려줄 줄 알아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태양교에서는…….”

“몰라요, 몰라! 아아, 아무것도 안 들리네!”

유리한이 두 귀를 틀어막았다. 이번에 요한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가 황급히 입가를 가렸다.

죽은 자들 앞에서 너무 예의가 없었다.

유리한과 함께 있을 때면, 종종 이렇게 주변을 잊고는 했다.

요한은 몸짓을 바로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레이어분들을 수습해 드려야겠네요.”

“그건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죠.”

유리한이 기지개를 쭉 켜고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요한, 심화편에 걸맞은 수업을 지금 진행하도록 할게요.”

사제인 그는 감당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주어진 것을 모두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답니다.”

그것이 암만 동족의 시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 * *

스텔라 거리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골목길 어귀.

리스체가스의 사람들만 찾는 맛집, ‘별무리’는 저녁에 몰린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봐, 그거 들었어? 은하의 언덕으로 향하는 길에 시체가 여러 구 발견됐대!”

“시체라니! 도대체 누가 죽었다는 거야?”

그리고 그만큼 오가는 이야기도 다양했다.

별무리의 사장은 범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건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리스체가스의 사람이 아니라 플레이어들이래. 그런데 그게…….”

별무리의 단골인 남자가 제 친구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를 꺼냈다.

“리스체가스 가문에서 죽인 것 같다는 거야!”

그의 친구는 얼굴을 찌푸렸다.

“요새 많이 힘든가 봐?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리스체가스에서 트리샤 리스체가스의 명망은 두터웠다. 친구가 한심스럽다는 듯이 저를 쳐다보자,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아니, 이 친구야! 내가 괜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그럼?”

“이번에 발견된 시체들. 가주님께 만찬 초대를 받고 저택으로 떠났던 플레이어들이래.”

“그 말은…….”

“가주님과 만찬을 가진 후, 틀림없이 다음 층으로 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플레이어들이 시체로 발견된 거라고!”

별무리의 사장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탄식을 집어삼켰다.

가게의 단골손님들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 다들 가주님께서 만찬을 핑계로 플레이어들을 붙잡아 그들을 몬스터의 먹이로 바친 것이 아닌가 수군거리고 있어.”

“에이, 가주님께서 얼마나 여리시고 상냥하신 분인데 그런 짓을 벌였겠어?”

남자의 친구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만에 하나 정말 그러셨다고 해도 플레이어들의 일이잖아?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후우, 답답해라. 플레이어들이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겠어?! 그리고…….”

남자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고서는 내뱉었다.

“플레이어가 아닌, 우리들은 먹이로 바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어?”

일순, 가게가 조용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별무리는 여전히 저녁에 몰린 사람들로 시끌시끌했다. 별무리의 사장은 리스체가스 가문에 속해있으나 모두의 외면을 받고 있는 남자를 떠올렸다.

‘요한 님께서는 괜찮으시려나.’

도시의 소문에 피해를 입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 * *

리스체가스에 퍼진 소문은 트리샤의 귀에도 들어간 지 오래였다.

트리샤는 분노하며 외쳤다.

“당장 성명을 발표해라! 그 시체들은 우리 리스체가스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가주님,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소문이 퍼졌습니다. 시민들에게 직접 얼굴을 보이셔야 그나마 민심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몇몇의 플레이어들이 거리의 소문이 사실인지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거절하도록.”

트리샤가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렸다.

“주제도 모르는 녀석들이 감히 나와 독대를 하고자 해?”

플레이어.

트리샤는 그들을 혐오했다. 본디 리스체가스는 탑 밖에 존재하던 세계였다.

먼 과거, 리스체가스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왕국에 속해있던 시절. 리스체가스의 가주가 탑의 주인과 거래를 했다고 한다.

그가 원한 것은 영지민의 안전. 탑의 주인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세계에 속하는 것. 그렇게 리스체가스는 소망의 탑, 9층에 자리하게 되었다.

“탑의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아득바득 올라가려고 하는 녀석들이, 감히……!”

나를 농락하려고 들어?

주름진 얼굴이 마귀처럼 일그러졌다. 아레스는 제 어머니의 분을 달래고자 했다.

“어머니, 소문을 퍼트린 자는 유리한. 그자일 겁니다.”

“그렇겠지.”

모든 정황이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분한 것은, 그럼에도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아레스가 말했다.

“이용합시다.”

트리샤가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이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아레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입을 열었다.

“플레이어들을 죽인 자가 유리한, 그 여자라고 하는 겁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