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 *
잠깐 시간을 되돌려, 유리한과 요한이 리스체가스의 만찬장으로 향하기 전.
“요한, 혹시 독을 감별하는 능력도 있나요?”
“네, 있습니다.”
나이스!
유리한이 환호했다. 그녀에게 약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게 바로 ‘독’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 온갖 독에 내성을 쌓긴 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잖아? 내성이 없는 독을 먹으면 어떻게 되겠어?’
꼼짝없이 세상 하직일 거다.
요한 리스체가스가 그 전에 어떻게든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할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비는 확실할수록 좋다.
“요한, 만찬장에서 나온 음식들을 유심히 살펴보신 후 알려주세요. 그 안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를요.”
“어떤 식으로 알려드리면 될까요, 유리한 씨?”
“포크와 나이프를 반대로 놓아주세요.”
그리하여 유리한은 리스체가스 가문의 인간들이 제 음식에 장난을 쳐놓은 것을 알게 됐다.
“기주님, 어쩜 이렇게 예상을 벗어나지를 않으세요? 당해주려고 해도 민망해서 못 당해주겠네.”
유리한이 보기 좋게 구워진 스테이크를 바닥에 버렸다.
트리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짙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 유리한. 자네는 이것 역시 예상했는가?”
후웅―!
끝이 뾰족하게 선 날붙이가 유리한의 목에 들이밀어졌다. 오우거를 잡으러 갔다는 리스체가스의 기사들이 어떠한 징조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에서도 기사단장.
바로 그가 유리한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누구라도 당황할 순간.
그러나 유리한은 이 순간 안도하고 있었다. 요한 리스체가스를 인질로 삼지 않아서.
제 손주라고 뒤늦게 품으려는 건 아닐 테고, 저주가 담긴 그릇이 상하면 곤란하니 이러는 거겠지.
유리한이 짙게 웃었다.
“당연히 예상했죠.”
우당탕―!
기다란 테이블이 유리한의 손에 순식간에 뒤엎어졌다. 허공에 튀어 오른 음식들에 칼 아렌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전원! 가주님과 아레스 님을 보호하도록!!”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한은 엎어진 테이블을 지지대 삼아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제 목에 들이밀어진 검이 있었는데도, 그녀의 행동에 거리낌이라고는 없었다. 어느새 유리한의 손에 그녀의 몸뚱이만 한 창이 쥐어졌다.
후웅, 챙―!
날붙이가 서로 맞부딪쳤다.
리스체가스의 기사단장, 칼 아렌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유리한 역시 마찬가지.
채앵―!
날붙이들의 힘겨루기에 유리한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 조금 밀리네.”
칼 아렌다의 검을 막아내고 있는 유리한의 두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스탯]
근력: 23 체력: 25 정신력: 23
속도: 9 명성: 1,055 마력: 1,043
오우거를 사냥하면서 능력치가 올랐지만 그뿐. 9층의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면 한참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물론, 마력과 명성은 논외.
유리한이 칼 아렌다를 비웃듯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가 보이는 명백한 비웃음에 칼 아렌다가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는 찰나.
“……!”
그의 두 눈이 떨렸다.
시야가 순식간에 멀어지는 듯하더니, 까맣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상황에 빠르게 적응했다.
‘침착해라.’
눈이 보이지 않으면 두 귀로, 두 귀가 들리지 않으면 촉각을 곤두세워서.
그것마저도 안 되면.
“와아… 내가 단장님의 실력을 너무 얕보고 있었나 보네…….”
기감(氣感)으로.
칼 아렌다는 유리한에게서 빠르게 물러난 후, 두 눈을 감고 오직 호흡에 집중했다. 신체가 존재한다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렴풋하게 그 자취를 더듬었다.
가슴 속 깊은 곳의 폐부를 열심히 움직여 대며 그는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유리한은 자세를 고쳤다.
눈앞의 기사단장께서는 까다로운 상대다.
어중이떠중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급소를 노리는 한 방을 생각했다가는 이쪽이 당한다. 이때, 칼 아렌다는 유리한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눈앞의 여자는 ‘강자(强者)’다.
단순히 탑을 오르고자 아득바득 싸워대는 플레이어로 여기면 안 된다는 말씀.
함부로 저 목을 노리려 했다가는 제 숨이 끊어지게 될 거다. 그러니 신중하게 저 목숨을 노려야만 한다. 저를 거둬준 트리샤 리스체가스의 영광을 위해서.
서로를 끊임없이 살피는 탐색전이 숨 막히게 이어졌다. 먼저 움직인 것은 유리한이었다.
타앗! 구둣발이 바닥을 박차며 칼 아렌다에게로 향했다. 리스체가스의 기사단장은 유리한의 움직임을 느끼고선 앞으로 검을 내찔렀다.
노리는 건, 창을 쥐고 있는 두 손 중 하나.
두 손을 모두 노릴 필요는 없다.
하나를 공략하여 상처를 입힌다면, 여자의 움직임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창을 쥔 순간, 드러난 약점.
때문에 칼 아렌다는 자신의 승리를 강렬하게 예감했다. 유리한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창이 아닌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용산 헌터 마켓, 비올라의 가게. ‘욜라(Oyla)’에서 산 바로 그 총이었다.
유리한의 손을 내찌르려던 칼 아렌다의 검은 허공을 베었고, 유리한은 몸을 낮춰 남자의 허벅지를 향해 총구를 들었다.
타앙―!
짧은 총성이 울렸다.
“크윽……!”
“단장님!”
칼 아렌다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그가 쥐고 있던 검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후우, 유리한이 총구에서 피어오른 연기를 입으로 불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명중.”
그녀의 얼굴에 걸린 비열한 웃음이 보일 리가 없는데도. 칼 아렌다는 악에 차 비명을 내질렀다.
“이, 비겁한……!”
“비겁하든 말든 싸움은 이기면 끝인지라. 안 그래요, 단장님? 아, 물어봤자 답해주기 어려우려나?”
오감 지배자(A)는 여전히 발휘 중.
유리한은 웃으며 칼 아렌다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들었다.
타앙―! 탕, 타앙―!
허공을 울린 총탄이 바닥에 박혔다. 칼 아렌다는 제 기사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유리한이 짜증스레 웃었다.
“리스체가스의 기사들한테는 기사도란 게 없나 봐요? 성스러운 싸움에 끼어들다니.”
그리고 너희 가주님과 그분의 아드님은 어쩌고? 기사단장께서 지키라고 하지 않으셨나?
그러나 유리한은 구태여 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칼 아렌다의 기사들이 제 상관을 보호하듯이 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플레이어이지 않습니까? 기사도를 논할 수 없는 상대이니 괜찮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는 무슨.
유리한이 피식 웃고는 총 대신 다시 창을 꺼내 이를 바로 쥐었다. 기사들은 유리한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칼 아렌다와의 대결 때처럼 탐색전은 없었다.
유리한은 어떠한 준비 동작도 없이 기사들에게 달려들었고, 기사들은 그녀가 휘두르는 창에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졌다.
적이 하나에서 수십 명으로 늘어났음에도 유리한은 거침없었다.
오감 지배자(A)를 활용해 그들의 감각을 빼앗아 버리고, 그 목숨을 빼앗는다. 우수수,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리스체가스의 기사들은 바닥을 굴러다녔다.
“윽… 크헉……!”
치명상을 입은 기사가 기둥 뒤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치료를 해달라는 손짓이었으나, 남자, 요한 리스체가스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전투가 한창인 지금, 자신은 밖으로 나서면 안 됐다.
때문에 요한은 죽어가는 기사를 향해 의례적인 기도를 올려주고는 유리한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리스체가스 대저택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을 때 잠깐 나눈 대화였다.
‘요한, 트리샤 리스체가스는 어떻게든 저를 죽이려고 할 거예요. 독이 안 되면 다른 방법으로 저를 그 자리에서 죽이려고 하겠죠.’
‘물론 저는 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꽤 요란하게 몸을 움직일 생각이라서요.’
‘그러니 요한, 당신은 숨으세요. 당신 몸 하나는 스스로 지킬 줄 아시죠?’
그래서 이 상황.
요한은 제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치유 능력으로 따지면, 태양교 내에서도 으뜸이라고 불리나 싸움에서는 글쎄.
그러나 유리한은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창을 휘두르다가 단숨에 총을 쏘아대기도 한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더니, 쓰러진 기사의 검을 주워 그의 동료를 베어냈다.
수십이었던 숫자가 열 아래로 줄어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들 중에서 유리한이 곤란하다고 여기는 상대는 하나.
리스체가스의 기사단장, 칼 아렌다뿐. 허나 그는 허벅지에 총상을 입어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았다.
승기가 완전히 유리한 쪽으로 기운 순간, 요한은 리스체가스 가문의 인간들이 만찬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목도했다.
붙잡아야 한다.
요한의 머릿속을 강렬하게 울린 직감이었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트리샤 리스체가스와 아레스 리스체가스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유리한 씨!”
“어이쿠.”
요한 리스체가스가 아니었다면 어깨를 내어줄 뻔했다.
“큰일 날 뻔했네!”
유리한은 제게 달려들었던 여자를 가볍게 제압한 후, 동시에 저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던 기사의 복부를 걷어찼다.
“요한, 괜찮아요?”
그러면서 저를 보호하고자 했던 남자의 안부를 확인했다. 요한은 두 눈을 데굴 굴렸다.
분명, 유리한을 지키고자 몸을 날렸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니 오히려 유리한의 아래에 깔려 보호를 받는 꼴이다.
“요한?”
“아, 네. 괜찮습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요한은 붉게 타오른 얼굴을 아래로 숨겼다. 그사이 유리한은 몸을 일으키고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래, 너희가 있었지.”
열 아래의 숫자가 순식간에 배로 불어났다.
리스체가스의 고용인 흉내를 내던 플레이어들이었다.
“너, 너만 죽이면… 여기서 나갈 수 있어. 자, 자유. 자유를 준다고 리스체가스의 가주가……!”
“그랬어? 그런데 이거 어쩌나.”
유리한은 단검을 쥐었다.
리스체가스의 기사 중 하나가 흘린 것.
그녀는 제게 이를 드러냈던 플레이어를 향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빠르게 내던졌다. 당장에라도 유리한에게 달려들 것처럼 굴었던 플레이어는 맥없이 쓰러졌다.
유리한은 이름 모를 플레이어의 죽음에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내 목숨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서 네놈들 자유를 위해 죽어줄 수가 없거든.”
조카, 유서아.
그 아이의 미래와 맞바꿔 살아난 몸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자들의 자유를 위해 희생당해 줄 생각 따위 있을 리가 없다.
플레이어들은 유리한의 기세에 주춤거렸다.
암만 리스체가스의 대저택에 오랫동안 감금당해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라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달려들면 죽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악을 내지르며 유리한에게 달려들었다.
“싸워라, 싸워! 가주님께서 너희 버러지들과 했던 약속을 잊지 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