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유리한을 죽이면 이 저택을 벗어날 수 있다.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다. 아니, 탑 밖으로 영영 떠날 수 있다.
“으아아악!”
“죽어! 죽어어!!”
그들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지독하게 삶을 붙잡고자 하는 몸부림이 가련했다.
유리한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오감 지배자(A)를 통해 모든 감각을 빼앗고는, 죽어가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해주었다.
유리한이 베푼 아주 조그만 호의였다.
이제 남은 숫자는 다시 열 아래.
유리한은 패색이 짙은 칼 아렌다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유리한 씨, 리스체가스의 가주와 그의 아들이 도망쳤습니다.”
요한의 말대로 트리샤와 아레스 모자(母子)의 모습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한은 혀를 차고는 말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일부러 그들 쪽에 눈길도 주지 않고 싸웠으니까요.”
인간은 궁지에 몰렸을 때, 두 가지 모습을 보인다.
제 추악함을 모두 드러내거나, 제 용기를 모두 드러내거나.
트리샤 리스체가스와 아레스 리스체가스의 경우에는 전자. 그들은 곧 제 추악함을 모두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리스체가스가 몰락할 때.
“요한.”
유리한이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당신 가족들 좀 붙잡아 줄 수 있어요? 멀리 가지는 않았을 텐데.”
요한은 유리한이 원하는 것이 단순한 결박과 포박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제 손에 붙잡히는 순간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요한은 말했다.
“그 사람들은 제 가족이 아니에요, 유리한 씨.”
바닥에 흩뿌려진 붉은 핏물에 제 얼굴이 비친다. 요한 리스체가스는 아련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죄 없는 플레이어들을 우롱한 범죄자들일 뿐이지.”
유리한은 그의 결심에 미소를 보냈다.
“좋아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요한 리스체가스는 만찬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쫓아라!”
칼 아렌다가 급히 외쳤으나, 우르르 무너진 벽에 그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유리한이 무너진 입구에 앞에 서서는 방긋 웃었다.
“요한 리스체스가를 쫓고 싶으면 죽어서 쫓아가도록 해. 나는 아무도 안 보낼 거거든.”
유리한은 짙게 웃으며 다시 창을 들었다.
* * *
리스체가스 대저택이 무너질 듯 크게 울렸다. 요한은 달리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만찬장에 두고 온 유리한이 걱정이 되었다.
‘요한, 당신 가족들 좀 붙잡아 줄 수 있어요? 멀리 가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나 다시 앞을 보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유리한, 그녀가 부탁한 것이 있다. 함께 싸울 수 없다면 이렇게라도 도와야 했다. 요한 리스체가스는 그렇게 트리샤와 아레스의 행방을 쫓았다.
저택 곳곳을 돌아다녔으나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리스체가스의 고용인들이 여기저기에 뭔가를 뿌리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 바로 기름이었다.
요한은 표정을 굳히고서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던 그들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어, 어어. 이렇게 하면 된다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같은 말이 여러 번 반복됐다.
요한에게 답을 들려준 고용인은 정상이 아니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 푸석한 머리칼.
그는 제 옷에 기름이 튀는 줄도 모르고 다시 사방에 그것을 뿌리기 시작했다.
저택의 모두가 똑같았다.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저택 구석구석에 기름을 뿌려댔다. 그들 중에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도 섞여있었다.
요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요한, 틈새 교육을 들어갈게요.’
‘틈새 교육이요?’
‘네, 사람은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악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세요.’
요한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자들은 리스체가스의 사람들이 아니다. 플레이어들이다. 소원을 품고, 탑을 오르기 위해 들어온 플레이어들.
요한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들을 저택 밖으로 대피시키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기름을 붓고 있는 이유가 뭐겠는가?
‘분신(焚身).’
트리샤 리스체가스는 저택 내에 감금되어 있던 플레이어들에게 자유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신한 후, 유리한과 함께 저택을 통째로 불태울 생각이었다. 칼 아렌다가 유리한에게 밀리는 것을 보자마자 결심한 생각.
요한 리스체가스는 어렵지 않게 제 할머니의 계략을 알아차리고는 두 손을 주먹 쥐었다.
미친 지 오래인 플레이어들을 저택 밖으로 대피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막는 것.’
리스체가스 가문의 인간들이 저택을 빠져나가기 전에 그들을 붙잡는 거다.
요한은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트리샤 리스체가스와 아레스 리스체가스의 흔적을 쫓았다. 대문은 굳게 닫혀있고 다른 곳을 통해 밖으로 나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은 곳이 하나 있었다.
지하.
어릴 적, 어머니가 돌아가자마자 자신이 갇힌 곳.
요한은 저택의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를 떠올리고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 * *
리스체가스 대저택의 지하.
어둠을 횃불로 밝히고 있는 복도에 두 사람의 걸음이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트리샤 리스체가스와 아레스 리스체가스였다.
“어머니, 조금만 천천히 가십시오. 그러다 넘어지겠습니다.”
트리샤는 고개를 저었다.
“아렌다 경이 그년을 붙잡고 있을 때 저택을 빠져나가야 한다.”
트리샤는 유리한을 제거한 후, 그 죽음을 이용하기 위해 여러 계책을 세웠었다.
독살이 실패하면 리스체가스의 충성스러운 기사를 이용해 그 목을 베어낼 생각이었고, 그마저도 안 될 것 같으면 저택째로 불태워 죽이기로 했다.
때문에 리스체가스의 가주는 칼 아렌다가 유리한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저택을 저버리기로 한 것이다.
아쉬운 건, 요한 리스체가스.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제 딸과 닮은 것이라고는, 그 아이의 색밖에 없는 벌레.
플레이어들의 원한을 담아내던 쓰레기통을 새로 갈아야 하는 것이 못내 아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남아, 제 명예를 되찾는 것이 우선.
트리샤 리스체가스는 훗날을 기약하며 저택과 연결된 비밀 통로로 향했다.
“트리샤 리스체가스! 아레스 리스체가스!”
그러나 듣기 싫은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트리샤는 사납게 얼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요한 리스체가스.
딸아이의 간절함으로 ‘리스체가스’의 이름을 붙여준 제 피붙이가 횃불 가운데 서있었다. 요한이 가쁜 숨을 다듬은 후, 결연한 얼굴로 나지막이 경고했다.
“비겁하게 도망가지 마십시오.”
“허어.”
트리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부터 버러지가 말을 할 줄 알았지?”
“…….”
요한은 말없이 트리샤를 노려보았다. 올곧기 그지없는 시선. 그것이 나타샤는 불쾌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비밀에 부치려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내 재미난 사실을 하나 알려주마.”
요한이 미간을 좁혔다.
“네 아비는 말이다. 사실 탑을 올라가지 않았단다. 이곳에서 영원히 나타샤와 살고자 했지.”
거짓말.
요한은 소리 없이 트리샤의 이야기를 부정했다. 그러나 리스체가스의 가주는 그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민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딸아이의 곁을 차지하려고 했어! 그 망할 놈이!”
트리샤는 제 딸아이를 그 무엇보다도 아꼈다. 사랑했다. 오죽하면 시내의 거리 중 하나를 ‘나타샤’라 이름 붙일 정도였다. 그런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플레이어가 채갔다.
“그래서 죽였단다.”
옳다구나 죽였지.
나지막하게 이어진 말에 요한의 두 눈이 떨렸다. 트리샤는 요한 리스체가스의 동요에 웃음을 지었다.
“그래, 요한. 내 아이를 앗아간 증오스러운 손주야.”
일그러진 웃음이 요한에게로 향했다.
“나는 네 아비를 가장 먼저 제물로 바쳤단다.”
요한 리스체가스가 9층의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방법을 전해줄 때,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이야기해 줄 때.
트리샤 리스체가스는 지하에 가두어 뒀던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목을 베어 그 피로 리스체가스의 땅을 적셨다.
트리샤의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요한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거짓말.”
전해진 진실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레스 리스체가스, 그의 외삼촌이 자신을 향해 검을 들이미는 것도 모르고.
“거짓말하지 마요.”
요한은 부정했다.
속절없이 꺾이는 무릎에 검이 가까워진다. 요한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떨궜다.
쿠르릉―!
그 순간,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요한의 정신을 일깨웠다.
“아레스!!”
무너진 벽돌이 아레스 리스체가스의 몸에 쏟아졌다. 그 위로 누군가 착지했다.
“나이스 타이밍.”
유리한이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나타난 시대의 영웅이 제 아래에 깔린 아레스의 등을 발끝으로 두드렸다.
“안 죽었죠, 아레스 님? 이렇게 쉽게 가시면 곤란해요?”
“이… 이익……!”
아레스가 분에 찬 신음을 내지르며 유리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칼 아렌다와 비교했을 때, 확연히 느린 속도.
유리한은 가볍게 이를 피하며 요한의 뒷덜미를 잡아 제게 끌었다.
“요한, 정신 차리세요.”
“유, 유리한 씨. 저는, 그러니까 죄송…….”
“하다는 말 금지.”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으며 요한을 달랬다.
“저 쓰레기들을 붙잡아 주셨잖아요? 사과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런 말을 하세요?”
그래, 사과할 대상은 유리한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제 아버지.
어머니와 저를 버리고 떠났다고 비겁하다 수십 번 욕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해야 한다. 요한은 입술 안쪽을 꾹 깨물고는 고개를 떨궜다. 유리한은 말없이 요한을 쳐다보고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일이 조금 있었던 모양이네.’
아마 요한 리스체가스의 치부를 들쑤시는 말을 한 거겠지.
‘저 쓰레기들이.’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사이, 아레스 리스체가스는 몸을 가누며 제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머니.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타앙―!
짧은 총성과 함께 아레스 리스체가스의 몸이 기울어졌다.
“쿨럭……! 어, 어머니……?”
리스체가스의 가주가 제 아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죽지 그랬느냐, 아레스. 그럼 내 손으로 네 목숨을 거둬가지 않아도 됐을 것을.”
조금 전까지 아들을 걱정했으면서, 트리샤는 안타깝다는 듯이 그리 말하였다.
“와아, 진짜 쓰레기.”
유리한은 진심으로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