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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25)화 (25/235)

25화 

혼란과 격변의 시대, 말했듯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그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은 흔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죄책감을 가득 떠안고서 행한 일.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그런 것이다. 그 누구도 트리샤 리스체가스처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혈육의 목숨을 앗지는 않았다.

리스체가스의 가주는 총탄을 갈아 끼우고선 유리한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당장에라도 방아쇠를 당길 모습에 유리한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이대로 죽으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여기서 어떻게 나가시려고요?”

아레스 리스체가스의 죽음과 동시에 위에서부터 홧홧한 열기가 느껴졌다.

플레이어들이 뿌린 기름에 불이 붙은 것이리라.

‘아레스의 죽음이 신호였나.’

유리한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녀가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는지, 트리샤가 희열에 찬 얼굴로 낄낄거렸다.

“다 방법이 있지.”

트리샤 리스체가스가 총을 쥐지 않은 한 손으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유리한, 자네. 오광에 대해 물은 적이 있지?”

청의 기사단과 혈맹, 천하태평과 뮤즈. 그리고 만물.

트리샤 리스체가스는 그들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줬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만한 족속들이지만, 개중에는 쓸모 있는 녀석들도 있거든.”

트리샤가 꺼낸 것은 이동 마법진이 새겨진 스크롤이었다. 파라오의 눈과 닮아있는 금색의 눈이 왼쪽 모퉁이에 그려져 있는 스크롤.

멀린 아서의 표식을 발견한 유리한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멀린 아서의 표식.

더는 볼 수 없다고 여긴 것이 쓰레기의 손에 쥐어져 있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들끓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기 전, 유리한은 머리를 차게 식혔다.

그러고는 걸음을 박차 단검을 휘둘렀다.

“내 친구의 물건을 더러운 손으로 잡지 마, 트리샤 리스체가스.”

리스체가스 가주의 귀에 그 말이 들렸을 때, 그녀의 목에는 이미 깊은 자상이 남은 뒤였다.

“컥… 크흐, 윽…….”

트리샤 리스체가스가 제 목을 붙잡고는 피를 토해냈다. 동시에 저주의 말을 유리한에게 쏟아냈다.

“죽을, 으, 죽을 것이다! 네년은 죽을 것이야! 쿨럭……!”

우르르―

화염에 휩싸인 저택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유리한 씨!”

요한이 다급히 그녀를 보호하고자 다가왔다. 그러나 유리한은 태연했다.

“미안하지만, 난 안 죽어. 요한도 죽지 않을 거야.”

유리한의 시선이 트리샤 리스체가스에게로 향했다.

[칭호, 유리한 세계를 여는 자(S)가 효과를 발휘합니다.]

이미 숨이 끊어진 9층의 지배자를 향해 유리한은 미소 지었다.

“내가, 이 모든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거니까.”

화염에 휩싸인 저택의 불길이 순식간에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점점 숨을 채우고 있던 매캐한 연기도 빠르게 사라져 갔다.

대신 채우는 것은 비였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쏟아져 내리는 비.

[축하드립니다, 9층의 특별 시험 ‘구원’을 통과했습니다!]

유리한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단숨에 34층으로 진입할 문이 생겼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제 앞에 나타난 문을 여는 대신, 주저앉아 있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할래요, 요한? 같이 갈래요?”

요한의 앞에 두 가지의 선택지가 놓였다.

머무르느냐, 가느냐.

요한은 무릎을 일으켰다.

답은 정해졌다.

【 5. Welcome! 】

소망의 탑, 9층.

밤이 늦은 시간의 리스체가스에 규격 외의 손님이 여럿 올라왔다.

“허어, 이게 무슨 일이야.”

“엘던스, 저기가 리스체가스 대저택 맞지?”

“어어, 맞아. 맞는데…….”

불타고 있네? 그것도 아주 활활?

청의 기사단, 제1사단 소속의 34층 지배자. 엘던스 테레시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와 함께 9층에 올라온 혈맹의 서율 역시 그와 같았다.

리스체가스는 아주 난리였다. 도시의 사람들은 저택의 불을 끄고자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고 다급하게 돌아다녔다.

몇몇은 가주의 안위를 걱정하며 울기까지 했다.

엘던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원래라면 이곳에 정말 ‘유리한’이라는 플레이어가 있느냐고, 그들 중 하나를 붙잡아 물어야 했지만.

“좀 도와줘야겠는데.”

“그러게.”

서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탑의 마법사분들께서는 아무래도 움직이실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야.”

“저 녀석들이야 원래 그렇지.”

9층에 찾아온 규격 외의 손님은 총 열다섯.

그들 모두 오광이었다.

오광의 플레이어들은 2층을 넘어 5층까지, 유리한의 행방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그녀가 9층에 있다는 것.

‘9층이라니! 그게 말이 돼?!’

‘오, 서율. 그렇게 흥분하지 말라고. 상대는 튜토리얼을 말 그대로 깨부순 영웅이야. 탑이 어떤 편의를 봐줘도 이상하지 않다고.’

그렇게 부랴부랴 9층으로 왔건만, 출입이 제한됐다.

[특별 시험이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특별 시험이라니?

9층으로 향했던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 중에 서율이 말했다.

“도시 괴담으로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기는 해. 2년 전에 탑에 들어온 슈퍼루키가 치른 적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 나는 왜 처음 듣는 이야기지?”

“그거야 청의 기사단이 우리 혈맹보다 정보력이 달려서?”

서율이 킬킬거렸다.

그러다 출입의 제한이 풀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리스체가스로 진입했더니 지금 이 상황이다.

“저 정도 불을 끄려면 물이 꽤 많이 필요하겠지. 영웅분을 만날 때를 대비해서 마력 좀 아끼려고 했더니.”

서율은 마법사였다.

그녀가 심장 옆의 마나 하트를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쏴아아―!

보랏빛 달만이 환한 밤하늘 가운데서 세찬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서율이 마법을 부리려던 손을 거두었다. 엘던스는 웃었다.

“천운인데? 이 정도 비면 불길은 금방 잡히겠어.”

“인명 수색이나 도와줘야겠네. 9층의 지배자가 분명 리스체가스 가문이었을 텐데.”

“정확히는 트리샤 리스체가스라고, 딸 바보 할망구였을 거야.”

엘던스가 그리 말하고는 무너진 리스체가스 대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9층의 지배자 자리가 공석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9층 내 모든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지배자’를 뽑는 시험을 시작합니다!]

이건 또 뭐람?

엘던스 테레시가 당황해하며 얼굴을 굳혔다.

“엘던스.”

나지막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엘던스는 울상을 지으며 칭얼거렸다.

“오, 서율. 이거 네 눈에도 보인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줄래?”

“안타깝게도 내 눈에도 보여.”

서율이 피식 웃었다.

지배자.

한 층의 시험을 주관할 수 있게 되는 자리. 넓게는, 하나의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자리다.

“안됐지만 지금부터는 서로 적으로 싸워야겠는걸.”

유리한 영입하러 왔다가, 지배자 자리를 놓고 싸우게 생겼다.

‘내 팔자야.’

엘던스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유리한의 영입을 위해 탑의 최하층으로 향했던 오광의 플레이어들이 9층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시험에 임하게 되었을 때.

[소망의 탑, 34층이 플레이어 ‘유리한’의 입장을 환영합니다!]

유리한은 잔디밭에 드러누운 채,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플레이어, 유리한의 근력이 ‘41’ 올랐습니다.]

[플레이어, 유리한의 체력이 ‘35’ 올랐습니다.]

[플레이어, 유리한의 정신력이 ‘18’ 올랐습니다.]

[플레이어, 유리한의 속도가 ‘22’ 올랐습니다.]

[플레이어, 유리한의 명성이 ‘15’ 올랐습니다.]

[플레이어, 유리한의 마력이 ‘9’ 올랐습니다.]

스탯의 능력치가 크게 올랐음에도 유리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기쁘기는 했다. 하지만 그보다 피곤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찾아온 짙은 탈력이 온몸을 짓눌렀다.

“고작 이 정도로 지치다니.”

내가 많이 약해지기는 했나 보다. 어쨌거나, 스탯 좀 확인해 볼까?

[STATUS]

플레이어 : 유리한(Yu Rihan)

레벨: 27Lv

칭호: 유리한 세계를 여는 자(S), 어둠을 지배하는 자(S), 드래곤 슬레이어(A), 고블린 숲의 학살자(A)

스킬: 유리한 세계(S), 오감 지배자(A), 뛰어난 암기왕(A), 냉철한 심판자(A), 망자의 아우성(B), 진실 감별(B), 뜻밖의 기연(C)

[스탯]

근력: 64 체력: 60 정신력: 41

속도: 31 명성: 1,070 마력: 1,052

진입한 층은 34층.

레벨대가 맞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27레벨에 걸맞은 능력치기는 했다.

“그보다 이번에도 명성이 올랐네. 참 신기하단 말이야…….”

악명이라면 몰라도, 명성은 또 왜 올랐는지 모르겠다. 유리한은 지친 낯을 한 번 문지르고는 몸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제 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남자를 확인하고는 다시 몸을 눕혔다.

요한 리스체가스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쉴까…….”

아주 조금만.

찾아드는 햇볕이 눈부실 텐데도, 유리한은 기어코 두 눈을 감았다.

* * *

“으아아악!”

유리한은 떴던 해가 지고, 다음 날의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나서야 다시 눈을 떴다.

잔디밭이 아닌, 푹신한 침대 바로 위에서.

뭐야, 여기는 어디야? 나는 또 누구는 너무 나갔고.

“유리한, 이 바보야!”

시대의 영웅이 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움직였어야지! 거기서 쉬면 어떻게 해!

“미쳤어, 유리한! 특별 시험으로 스탯 능력치가 암만 올랐다고 해도 아직 허접인데! 누가 뒤를 노리면 어쩔 뻔했어!!”

물론, 그런 일이 벌어졌었다면 유리한은 순식간에 잠에서 깨어나 적을 상대했을 거다.

그녀는 살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반응했으니.

하지만.

“진짜 바보…….”

한순간,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건 사실.

유리한이 앓는 목소리를 내며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궁금하지만, 누가 자신을 여기다 눕혀놨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누구인지 뻔했기 때문이다.

“유리한 씨, 일어나셨어요?”

“아, 요한.”

요한 리스체가스.

저와 함께 34층으로 올라온 태양교의 사제, 리스체가스의 마지막 생존자.

플레이어와 탑의 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기도 한 그가 자신을 침대 위에 눕혀줬을 거다. 유리한은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갔다.

“요, 요한? 무슨 일이에요? 그, 옷이…….”

바뀌었다.

금색이 수놓인 하얀 사제복은 어디 가고, 요한 리스체가스는 회색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유리한이 제 위아래를 훑어보자 요한이 멋쩍게 웃었다.

“역시 이상한가요?”

“네? 아니요! 잘 어울려요! 진짜 완전 최고!”

자고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다.

요한이 암만 겨드랑이에 땀 나면 바로 보일 색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다고 해도, 그의 얼굴을 훌륭했다.

고로 요한 리스체가스의 패션은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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