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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26)화 (26/235)

26화 

유리한은 기가 막힌 삼단 논법을 펼친 후 요한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디예요? 요한이 저를 이곳에 데리고 오셨죠?”

“네, 유리한 씨. 이곳은 34층. 태양교의 대신전이 있는 곳으로, 여기는 제집이에요.”

“집이요?”

요한이 미소를 지었다.

“리스체가스 가문의 부름으로 9층에 내려가기 전, 제가 머물렀던 곳이죠. 다행히도 아직 처분되지 않았더라고요.”

“아하, 그런데 옷은 왜 그래요?”

“태양교를 퇴단했거든요. 이제 사제가 아닌데, 사제복을 입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벗었답니다.”

“그렇군요.”

가 아니지.

“네엣?!”

저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 태양교에서 요한을 놓아줬어요? 제가 요한이 가진 능력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면서요!”

태양교의 사제는 태양이 떠있을 때, 치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요한은 예외.

그런 그를 태양교에서 쉽게 놓아줬을 리가 없다.

유리한의 말에 요한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제 입가를 톡톡 두드렸다.

“입을 살짝 놀렸어요. 유리한 씨가 그러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요한 리스체가스는 아가리 파이터에 빙의해 교단 관계자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는 말이렷다.

“뭐라고요? 세상에, 요한!”

유리한이 배를 잡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수업한 보람이 있네요, 보람이 있어!”

들리는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

요한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제 앞에 나타났던 두 개의 선택지를 떠올렸다.

* * *

유리한의 손에 의해 트리샤 리스체가스의 숨이 끊어졌을 때, 요한의 두 눈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요한 리스체가스를 9층의 지배자로 임명합니다.]

[지배자의 신분은 자의에 따라 포기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겠습니까?]

입술이 살짝 떨렸다. 동시에 머리 위에서 또 하나의 선택지를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할래요, 요한? 같이 갈래요?”

내밀어진 손이 보였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시야가 혼탁해지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유리한의 모습은 선명했다.

태양 같았다.

내리는 빗줄기 가운데서 모습을 드러낸 자신의 해님.

그렇기에 요한은 망설임 없이 유리한의 손을 잡았다.

[요한 리스체가스가 지배자의 신분을 포기했습니다.]

[9층의 지배자 자리가 공석이 되었습니다.]

유리한과 함께 도착한 곳은 34층, 태양교의 대신전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잠든 유리한을 제 방에 눕힌 후 그대로 태양교의 대신전으로 향했다.

“퇴단하겠습니다.”

“뭐라?”

“탑의 주민과 플레이어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제 신분을 선택할 수 있죠.”

탑의 주민으로 살아가느냐, 아님.

“저는 탑을 오를 겁니다.”

플레이어로 탑을 오르느냐.

* * *

“요한? 요한!”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34층에도 플레이어들을 위한 안내소가 있죠? 혹시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네? 네, 물론이죠. 그 전에 유리한 씨.”

요한이 침대 아래쪽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는 야살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저 수업 열심히 배웠잖아요. 유리한 씨도 가르친 보람이 있다고 했고요.”

“그렇죠?”

유리한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사탕이라도 드릴까요, 요한?”

“아니요.”

요한 리스체가스가.

아니, 플레이어 ‘고요한’이 유리한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는 제 뺨에 가져다 대었다.

“더한 것을 원해요, 유리한 씨.”

더한 것을 원한다니?

잡힌 손, 닿은 뺨. 제삼자가 방을 착각하여 들어오면, ‘어이쿠 죄송합니다!’라고 외치며 다급히 나갈 묘한 분위기. 유리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 순간, 요한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쏟아냈다.

“그……! 성적인, 그런 거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유리한 씨!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아무렴요.”

유리한이 방긋 웃었다.

그녀는 진실 감별(B)을 통해 그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진실 감별(B)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됐을 거다. 요한 리스체가스는 제 치부를 드러낼지언정, 거짓을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

유리한이 요한에게서 제 손을 빼내어 그에게 다정스레 물었다.

“그래서 요한이 원하는 건 뭔가요? 사탕보다 더 좋은 것이어야 할 텐데.”

요한은 텅 빈 손바닥을 몇 번 쥐었다 펼치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바람을 꺼내었다.

“함께 탑을 올라가게 해주세요.”

“네……?”

잘못 들은 거겠지?

그러나 이어 들린 말에 유리한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플레이어로서 유리한 씨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유리한이 그런 의문을 내뱉기도 전에 요한이 말했다.

“탑의 주민과 플레이어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은 신분을 선택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요한.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다른 플레이어분들처럼 1층으로 내려가 다시 시험을 치를 필요는 없답니다.”

요한이 유리한의 눈치를 살피며 설명을 이어갔다.

“일종의 혜택이에요. 저 같은 혼혈은 탑의 주민인 부모를 잡아먹고 태어난다고 했잖아요. 그 죽음으로 얻게 되는 보상이죠.”

끝에서 들린 목소리가 자조적이다. 요한은 유리한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플레이어이기를 선택한 혼혈의 대부분은 1층으로 다시 내려간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게는 좋은 선생님이 계시니…….”

“빡셀 텐데요.”

“네?”

유리한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 수업, 9층에서 받으셨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빡셀 거라고요. 그래도 괜찮아요, 요한?”

요한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유리한의 말을 이해하기에 잠깐의 시간이 걸렸던 탓이다.

“네, 괜찮아요!”

그는 유리한이 혹여나 말을 바꿀까 싶어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유리한 씨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게요. 쓸모를 증명해 보이라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

파르르, 입술이 떨렸다.

“버리지만 말아주세요.”

애끓듯, 간절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유리한은 미소 지었다.

“안 버려요, 요한. 하지만 정말 따라올 수 있겠어요?”

내뱉은 말을 주워 삼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고민이 되었다.

유리한의 말에 요한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한 씨가 어디를 가든, 저는 따라갈 수 있어요.”

설사 그 길이,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더라도 말이다.

유리한은 말없이 요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혼란과 격변의 시대, 많은 사람이 제게 보내오던 감정이 그의 시선에 깃들어 있었다.

찬양. 그러나 삐끗하면 광기가 되기 십상인 것이 요한의 두 눈에서 보였다.

“요한, 당신은 제가 이 탑에 왜 들어왔는지 모르죠?”

“소원을 위해서 아닌가요?”

“소원이라…….”

그래, 이곳은 소망의 탑. 어떤 소원이든 이뤄준다던 탑이다. 유리한은 씁쓸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펼쳐 들었다.

“첫 번째는 복수, 두 번째는 진실. 세 번째는 희망.”

펼쳐진 손가락은 세 개.

“동생이 하나 있어요. 아마, 요한 당신과 비슷한 나이 때에 죽었을 거예요.”

두 눈을 감으면, 제 조카의 기억 속에서 엿본 동생의 죽음이 선명하게 떠올라 저를 졸라맨다.

“저는 제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오광에게 복수할 거예요. 하지만 모르죠.”

유리한이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들 모두가 동생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 건지, 아닌지. 때문에 알아볼 거예요. 그 죽음에 얽힌 진실을.”

그녀는 다시 요한을 보며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동시에 저는 힘을 얻어야 하거든요.”

정확히는 이미 얻은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했다.

[칭호: 어둠을 지배하는 자(S)]

유리한은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리스체가스 대저택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하 감옥에서 리스체가스의 기사들에게 모습이 발각될 위험에 처했을 때, 칭호는 제멋대로 힘을 발휘했었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고민한다고 해도 알 수 없는 일.

“그래서요, 요한. 저와 함께 탑을 오르는 건 굉장히 힘들 거예요.”

“괜찮아요.”

요한은 고민도 없이 답했다.

“뒤처지지 않도록 할게요. 그저 한 발자국 뒤에서 곁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함께…….”

“가요, 요한.”

유리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와 함께 탑을 오르고자 신분을 바꾸기까지 한 사람이다.

“대신 약속 지키세요. 뒤처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뒤처지는 순간, 제 앞의 여자는 돌아보지 않고 저를 버릴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요한은 그리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유리한 씨……!”

요한 리스체가스와 함께하기로 결심한 이 순간을, 훗날 돌이켜 보지 않기를.

유리한은 그 몰래 바라며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제 플레이어들을 위한 안내소로 가볼까요?”

“그 전에, 유리한 씨. 이걸 먼저 복용해 주세요.”

요한이 내민 것은 피로 회복제였다. 리스체가스에서 그가 유리한에게 만들어 준 바로 그것.

유리한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요한, 저 괜찮아요.”

하지만 요한은 완고했다.

“하루 꼬박 주무셨다고 해도 아직 피로가 덜 풀리셨을 거예요.”

그러니 드셔야 한다며, 요한은 유리한의 손에 억지로 제가 만든 물약을 쥐여주었다.

유리한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이걸 어떻게 버리지?’

남의 호의를 무시하는 취미 따윈 없지만, 요한이 제게 쥐여준 것은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요한의 눈을 피해서 밖에다 버리든가 하자.’

하지만 유리한은 그럴 수 없었다. 요한의 시선이 너무나도 끈질기기도 했고.

“34층의 안내소는 외진 곳에 있죠. 현지인의 소개 없이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지금, 여기서 그걸 마시지 않으면 안내소까지 안내해 주지 않겠다는 은근한 압박 때문이기도 했다. 유리한은 결국 두 눈 꼭 감고 세상에 둘도 없을 쓰레기 맛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 * *

“저를 속였군요, 요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지언정, 거짓말은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던 남자는 사실 거짓말에 있어 선수였다.

태양교의 대신전이 위치한 소망의 탑, 34층.

그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위한 안내소는 중앙 광장에 위치해 있었다.

즉, 외진 곳은커녕 가장 번화한 거리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요한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9층에 내려가 있는 사이에 자리를 옮겼나 보네요.”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한다.

탑에 입성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유리한이었지만, 그녀는 요한의 말이 거짓임을 확신했다.

어쨌거나 피로 회복제는 이미 배 속에서 소화된 지 오래. 더욱이 분하게도 효과 하나는 만점인지라 유리한은 요한에게 되도 않는 화는 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요, 요한.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네, 무엇이든지요.”

“탑의 주민은 어떻게 탑을 오르나요? 요한은 원래 9층의 사람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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