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블러드 고블린의 무리를 이끌고 있는 킹 블러드 고블린은 지금 매우 언짢았다.
웬 인간 두 명이 쳐들어왔다고 하더니, 그들을 처리했다는 소식이 아직까지도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크르으으(이제 인간 마을 좀 약탈하러 가볼까 했더니)!
킹 블러드 고블린이 두 손 주먹 쥐어 낡은 옥좌를 내리쳤다.
그때였다.
- 키륵! 키르으윽(왕이시여! 대왕이시여)!!
- 크르아(뭐냐)!
- 키르! 키르륵(피하셔야 합니다! 지금 당장)……!
툭, 데구르르.
저를 향해 다급하게 뛰어오던 블러드 고블린의 자그마한 머리통이 발치에 굴러왔다.
킹 블러드 고블린은 커다란 눈을 멍하니 끔뻑였다. 그러다 이내 들려오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이를 드러내며 분노했다.
“세상에,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나 했더니! 친절하게도 킹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 줬네?”
- 크르으으(네가 그 인간이냐)!
“음? 킹도 사람 말을 못하네? 뭐야, 얘네들. 사람 한둘은 잡아먹은 줄 알았더니, 동굴 앞에 있던 그 피는 도대체 뭐였지?”
몬스터와 날짐승들의 피였다.
킹 블러드 고블린도, 그 휘하의 블러드 고블린들도 아직 사람을 잡아먹은 적 없었다. 하지만 킹 블러드 고블린은 유리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다분히 저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킹 블러드 고블린은.
- 크르아아아!
유리한을 노리는 대신, 그녀 뒤의 남자를 노리기로 했다. 인간은 저로 인해 누군가가 죽거나 다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한다고 했다.
영악한 몬스터는 이 점을 노리기로 한 것이다.
킹 블러드 고블린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묵직한 쇠몽둥이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노리는 건, 남자의 머리.
- 크르윽……?
그러나 남자는 멀쩡했다. 말간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저를 쳐다보기까지 했다.
뒤늦게 킹 블러드 고블린은 남자의 주위로 검은 막이 옅게 쳐져있는 것을 보았다.
거룩한 밤(A).
고요한이 제 주위로 펼친 보호막이었다.
- 크르아아!
킹 블러드 고블린이 분한 마음에 포효했다. 그 소리를 뚫고서 유리한이 키득거렸다.
“나이스, 요한.”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킹 블러드 고블린의 몸을 사선으로 베었다. 그가 반응할 수 없는, 찰나의 순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몬스터의 상반신이 하반신과 어긋나 천천히 아래로 기울어졌다.
쿠웅―!
이내 쓰러진 것의 위로 피가 솟구쳤다. 비처럼 쏟아지는 것은 검은 우산에 의해 가로막혔다. 고요한이 유리한 대신 검은 우산을 들며 그녀에게 물었다.
“우산은 어디서 나셨어요?”
“인벤토리에 있더라고요. 제 건 아니에요.”
디에스 라고.
이 탑에 있을지도 모를 남자의 것이었다.
언제나 몬스터의 피로 흠뻑 적셔지는 유리한에게 디에스가 선물해 준 것.
하늘에서 내리는 것을 굳이 맞을 필요는 없지 않냐면서, 그리 걱정하며 디에스는 유리한에게 자신의 우산을 선물해 줬었다.
그러나 모두 옛일.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다.
“가지실래요, 요한?”
비처럼 내리던 핏물이 멈췄다. 요한은 우산을 접어 들고는 미소 지었다.
“주신다면 감사히 받을게요.”
언제인가 이런 상황이 또 벌어진다면, 그때 다시 이 우산을 유리한에게 펼쳐주리라.
고요한은 남몰래 다짐했다.
“흐음.”
유리한의 관심은 킹 블러드 고블린의 상반신에 가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
인간을 약탈한 적 없는 몬스터가 어떻게 저런 장신구를 손에 넣게 된 걸까? 버려진 것을 주웠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상태가 좋아 보인다.
유리한은 입꼬리를 올렸다.
‘좋았어, 저거 이제 내 거.’
유리한은 킹 블러드 고블린의 손에서 반지를 빼내고는 말했다.
“이제 돌아갈까요, 요한?”
블러드 고블린 무리를 토벌하면서 얻은 총 스탯은 ‘15’. 여기에 이후 보상으로 받을 스탯 능력치를 계산하면…….
유리한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 * *
“미안해, 요한! 정말 미안하다! 설마 블러드 고블린 무리일 줄은 몰랐어!”
게일 요한스는 두 손 모아 고요한에게 사과했다.
“저는 괜찮아요, 게일. 그리고 사과는 제가 아니라 저분께 하도록 하세요.”
“아……!”
게일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헛숨을 들이마셨다.
“허억! 혹시 유리한 씨?!”
“오, 정답. 제 이름을 어떻게 아셨을까요?”
“이곳, 34층까지 명성이 자자하니까요! 그리고 1층에서의 시험을 저도 봤거든요!”
게일이 넉살 좋게 웃으며 유리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탑에 들어오신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으셨을 텐데, 벌써 34층이라니요!”
특별 시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리한은 아무 말 없이 게일의 손을 잡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요한, 이 녀석과 함께 탑을 오르기로 했다지요? 도움이 크게 될 겁니다! 요한은 대주교님께서 인정한 훌륭한 사제였으니까요! 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요한!”
게일이 잡고 있던 유리한의 손을 놓고는 말했다.
“대주교님께서 네 퇴단을 알고 완전 난리 나신 모양이야. 그분께서 너를 엄청 아끼셨잖아.”
“저를 아낀 게 아니라, 제 능력을 아끼신 거죠.”
차갑게 일갈하는 목소리였다.
게일 요한스는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을 얼버무렸다.
“어쨌든 조심해, 요한. 그분께서는 너를 어떻게든 태양교로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시는 것 같거든.”
“…그래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게일.”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럼 나는 이만 간다. 윗분들께 토벌 사실을 알려야 하거든. 유리한 님도 살펴 들어가십시오!”
게일 요한스가 금빛이 수놓인 하얀 사제복을 휘날리며 멀어졌다. 유리한은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요한에게 속닥거렸다.
“게일이라는 저 친구분, 엄청 싹싹하네요.”
“저도 그런데요.”
“네?”
고요한의 눈꼬리가 처연하게 내려갔다.
“저도 게일 못지않게 눈치 빠르고 사근사근해요, 유리한 씨.”
그러니까 자신도 칭찬해 달라는 말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유리한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온 듯, 고요한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보다 벌써 점심시간이네요. 드시고 싶은 것 없으세요? 제가 리스체가스의 맛집은 몰랐지만, 34층의 맛집은 많이 알고 있답니다. 뭐든 말해주세요, 유리한 씨.”
그녀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심산이었다.
“오오~!”
유리한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오므렸으나.
“하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네?”
“여기요. 벽곡단이라고 하는 건데, 아실지 모르겠네요.”
“이건 왜…….”
“제가 말했죠? 앞만 보고 달릴 거라고.”
유리한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퀘스트 받으러 가요, 요한!”
* * *
소망의 탑, 34층.
중앙 광장에 위치한 플레이어들을 위한 안내소는 퀘스트를 받으러 온 플레이어들로 시끄러웠다.
“아오! 도대체 누구야! 어떤 새끼가 A급 이상의 퀘스트를 모두 독식하고 있는 거야!”
유리한이었다.
“하아, 비명 토끼 잡는 것도 나갔네. 겨우 파티 꾸려서 퀘스트 얻으러 왔더니.”
“달맞이꽃 채집하는 것도 나갔어. 난이도에 비해 개꿀이라는 말 들어서 퀘스트 뜨는 것만 기다렸는데.”
“도대체 이 새끼 정체가 뭐야? 내가 놓친 퀘스트만 벌써 다섯 개째야!”
어디 낯짝 한번 구경하고 싶다면서, 험상궂게 생긴 플레이어가 구시렁거릴 때였다. 벌컥, 안내소의 문이 열리며 유리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한, 빨리 와요! 퀘스트 끝내고 저녁 먹으러 가야죠!”
“저녁은 벽곡단이 아닌가 봐요?”
“벽곡단으로 때울까 했는데, 그래도 저녁은 맛난 거로 채우고 싶어서요. 그보다 34층의 낮은 정말 짧네요? 벌써 해가 지다니.”
안내소에 모여있던 플레이어들이 유리한과 고요한의 등장에 숨을 죽였다.
‘저거 유리한 아니야?’
‘에이, 설마. 탑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된 양반이 어떻게 34층에 있겠어?’
‘저 양반이 보통 양반이냐? 영웅이잖아. 그것도 튜토리얼에서 애들 다 학살하고 올라온 영웅님.’
‘맞아, 그리고 소문으로는 튜토리얼 끝내자마자 탑의 안배로 9층으로 직행했다는 말이 있어.’
‘그 소문대로라면, 한 달 만에 34층도 올라올 수 있지 않을까?’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암만 영웅님이라도 설마 그럴 수 있겠어?’
옛말에 그런 말이 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플레이어들은 굳이 나서서 유리한의 정체를 캐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유리한은 몰리는 시선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데스크에 당당히 걸어가 안내원에게 자신이 수행한 퀘스트를 알려주기만 했다.
“브리만 사제님이 의뢰하신 비명 토끼 처치, 그리고 완즈 꽃집의 사장님께서 의뢰하신 달맞이꽃 채집하기 모두 끝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브리만 사제님과 완즈 꽃집의 사장님께서 안내소로 넣으신 의뢰들이 모두 무사히 수행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안내원은 해당 퀘스트의 보상을 정산해 준 뒤, 그녀에게 물었다.
“또 다른 퀘스트를 수행하시겠습니까, 플레이어님?”
“아니요, 오늘은 이걸로 끝! 내일 또 뵐게요.”
유리한은 안내원에게 눈웃음을 지어준 뒤 고요한과 함께 안내소를 빠져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기 무섭게 안내소 안의 플레이어들이 막힌 숨을 터트려 댔다.
“유리한 맞지?”
“분명, 유리한이야.”
“와아, 퀘스트를 독식하고 있던 인간이 유리한이었다니!”
“아니, 그 인간은 왜 34층에 있는 거야? 더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야?!”
언제는 유리한이 34층에 올라온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지금은 태도를 바꿔 왜 34층에 있느냐고 툴툴거리는 플레이어들이었다.
* * *
유리한은 콧노래를 부르며 상태 창을 확인했다.
[STATUS]
플레이어 : 유리한(Yu Rihan)
레벨: 30Lv
칭호: 유리한 세계를 여는 자(S), 어둠을 지배하는 자(S), 드래곤 슬레이어(A), 고블린 숲의 학살자(A)
스킬: 유리한 세계(S), 오감 지배자(A), 뛰어난 암기왕(A), 냉철한 심판자(A), 망자의 아우성(B), 진실 감별(B), 뜻밖의 기연(C)
[스탯]
근력: 70 체력: 62 정신력: 55
속도: 45 명성: 1,080 마력: 1,055
온종일 퀘스트를 죽어라 수행한 보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