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소망의 탑을 오르고자 했던 구시대의 플레이어들은 모든 레벨이 초기화됐다고 했다.
그래, 레벨만.
스탯 능력치는 그대로인 상황에서 계속 성장을 했을 거다.
그 격차를 알고 줄여야 한다.
“리프탄 대주교!”
유리한이 그의 대답을 촉구했다.
그에 리프탄 라올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며 나불대기 시작했다.
“플레이어 중 최초로 50층에 들어선 자였소! 하지만 그 이상 탑을 올라가지는 않고, 누군가를 계속 찾았다고……!”
옳거니, 그 ‘누군가’가 분명 디에스 라고의 약점일 터. 이 자식, 탑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만났나 보다.
“그게 누군데!”
리프탄 라올이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탑의 바깥에서 영웅이라고 칭송받는 여자라고 했다.
모두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 세상에 낮을 되찾아 왔다고도 하던 플레이어.
그 이름이, 분명.
“유… 유리한.”
“뭐?”
난데없이 들린 제 이름에 유리한이 눈가를 찡그렸다. 하지만 리프탄 라올은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바로 자네였소.”
황망해진 유리한의 옆으로 창끝이 스쳐 지나갔다.
【 6.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것은 곧장 리프탄 라올의 목을 꿰뚫었다.
“끅… 끄흡……!”
“대, 대주교님!”
태양교, 제1위의 주교.
요바네스 한나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대주교의 몸을 받아 들었다. 리프탄이 연신 피를 토해내며 살려달라는 듯이 요바네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치료를……! 치료를 할 테니……!”
불가능했다.
태양교에 소속된 이들이 치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오직 해가 떠있을 때.
그러나 여기, 그런 제약에 상관 않고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자가 있었다.
“요한! 요한 리스체가스!!”
요바네스의 애타는 부르짖음에 고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가망이 없어요.”
요바네스를 향해 뻗었던 늙은 대주교의 손은 힘없이 떨어진 지 오래. 리프탄 라올은 진즉 숨이 끊겨 두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요바네스 한나가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리프탄 라올의 주검을 내팽개치고서 유리한에게 달려왔다. 디에스 라고가 그 모습을 보고서 공겨을 가하려고 했으나, 유리한이 요바네스를 보호하는 것이 더 빨랐다.
“사, 살려주게! 아니, 살려주십시오! 이곳을 나갈 수만 있다면, 아니. 나가기만 하면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절박하게 매달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유리한은 겁에 질려 횡설수설하는 요바네스 한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리프탄 라올이 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 요바네스 한나다.
‘써먹을 곳이 많겠지.’
가령, 힘을 들이지 않고 35층으로 올라가게 해준다거나 그런 거 말이다.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약속, 꼭 지키세요. 요바네스 한나 대주교님.”
유리한이 말을 바꿀세라, 요바네스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한은 그 고갯짓에 만족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요한, 요바네스 주교님과 함께 물러나 계세요.”
하지만, 이라는 말이 바깥까지 튀어나올 뻔했으나 고요한은 이를 근근이 집어삼켰다. 유리한이 금지한 단어다. 몇 번 경고를 받기도 한 것을 또 어길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고요한은 대답했다.
“네, 유리한 씨.”
유리한은 고요한이 다리에 힘이 풀린 요바네스 한나와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때까지 디에스 라고를 경계했다.
그러나 그는 요바네스 한나를 향해 공격을 가하려고 한 후,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디에스.”
남자의 시선이 느릿하게 닿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유리한이 싱긋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멀린이 펼친 환각에도 제정신이었던 넌데, 도대체 지금 뭘 보고 있는 걸까? 응?”
이제, 나를 좀 봐줬으면 하는데.
유리한이 치밀어 오르는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선 창을 고쳐 잡았다. 디에스는 자신과 달리 다룰 수 있는 무기가 한정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창은 지금 리프탄 라올의 목을 꿰뚫고 있으니…….
‘제압하려면 지금.’
물론, 디에스의 가장 큰 무기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유리한은 바닥을 박차며 그의 품을 파고들고자 했다.
화르륵―!
불길이 인다.
살갗에 닿는 열기에 유리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곧이어 코앞에서 하얀 빛이 터졌다.
피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
콰과광, 터진 폭발음에 유리한의 몸이 튕겨나갔다.
고요한이 비명을 내지르듯,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유리한의 귓가에 들려왔다.
괜찮다며 고요한을 안심시켜 주고 싶었지만, 유리한의 입에서는 앓는 목소리가 먼저 나오고 말았다.
“아오……!”
바닥을 여러 차례 굴렀던 유리한이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옛 정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지?”
유리한은 두 눈을 번뜩이며 디에스 라고를 향해 다시 한번 걸음을 박찼다.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것은 아니었다. 오감 지배자(A)가 발휘되며 디에스 라고의 감각이 하나, 둘 빼앗기기 시작했다.
“아…….”
돌연, 디에스가 눈가를 짚으며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유리, 유리한.”
“그래, 왜 불러?”
그의 코앞에 다가온 유리한이 창을 휘둘렀다.
날이 선 곳은 아래로, 대신 뭉툭한 끝을 그의 머리로 향하게 하였다. 후웅, 휘둘러진 것이 디에스의 머리에 세게 부딪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디에스 라고의 몸이 기울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 제 손에 검을 쥐어 유리한을 노렸다.
피하지 않으면 꿰뚫린다. 다행히 그 궤적이 급소가 있는 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으면 치명상.’
하지만 유리한은 다가오는 날 선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다리를 그대로 두었다.
괄육취골(刮肉取骨).
여기서 제 살을 내주고 남자의 뼈를 취하고자 하지 않으면, 디에스 라고는 더욱 거세게 저를 공격하려 들리라.
이내 쇄도한 검이 유리한의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유리한은 입술을 꾹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이거, 생각보다 아픈데? 오랜만에 검에 찔러서 그런가? 유리한이 가쁜 숨을 내쉬며 디에스 라고를 쳐다봤다. 마주친 시선에서 읽히는 감정은 없다.
여전히 꿈에 잠긴 듯, 초점이 맞지 않는 두 눈만 보였다. 오감 지배자(A) 때문은 아닐 거다.
유리한은 제 살을 내주기로 마음먹었을 때, 디에스에게 모든 감각을 돌려준 참이었다.
그런데도 이렇다니.
“디에스, 이제 제발 좀 정신을 차려주면 안 될까……?”
유리한이 서글프게 얼굴을 일그러뜨렸을 때다.
“유리한 씨!”
고요한의 비명과 함께 디에스 라고의 황금빛 두 눈에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유리…한……?”
하, 실없는 웃음이 유리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뭐야, 디에스. 이제야 내가 보여? 혹시 몰라 네 감각 모두 돌려줬는데 잘했나 보다.”
디에스 라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뚝뚝, 떨어지는 붉은 핏물에 뺨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디에스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아직도 헛소리를 하네.”
“진짜일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유리한.”
“내 이름 잘도 부르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디에스?”
나지막하게 닿은 제 이름에 남자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유리한은 디에스 라고의 얼굴에 떠오른 동요를 알아차리고선 눈웃음을 지었다.
“디에스, 아직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까…….”
유리한이 움직이기 편한 팔을 들어 손을 주먹 쥐었다.
“조금만 자.”
노린 건, 턱.
유리한은 디에스 라고의 얼굴에 강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이건 절대로 내 어깨를 검으로 꿰뚫은 것에 악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다행히도 유리한의 주먹은 디에스의 턱을 정확하게 가격했고, 그는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후우.”
제대로 안 먹히면 어쩌나 했네.
유리한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는 크게 숨을 토해냈다. 그러기 무섭게 어깻죽지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오, 진짜.”
하필 검이 꿰뚫린 곳이 화상을 입었던 바로 그 자리.
제대로 치료받지 않으면 어깨를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다.
유리한이 숨을 크게 내쉬고는 손을 올렸다. 어깻죽지에 꽂힌 검을 빼내기 위해서였다.
“안 돼요, 유리한 씨.”
그 손을 고요한이 붙잡았다. 고요한의 얼굴은 창백했다. 유리한이 디에스 라고의 검에 찔리는 순간부터 그랬다. 유리한이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웃음을 지었다. 고요한이 제 행동에 많이 놀란 모양이다.
“저 괜찮아요, 요한.”
몬스터가 곳곳에서 들끓었던 혼란과 격변의 시대에서는 이보다 더 크게 다친 적도 많다.
이 정도야 살짝 긁힌 수준…이라기에는 좀 심하지만! 아프다고 엉엉 울 수준은 아니었다는 거다.
하지만 고요한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유리한의 말을 무시하고서 입을 열었다.
“요바네스 대주교님. 와서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어? 어어, 알겠네!”
요바네스 한나가 뒤늦게 자신이 불린 것을 알고는 허겁지겁 달려왔다. 고요한이 그런 그를 보고서 차갑게 말하였다.
“제가 검을 뽑을 테니 바로 지혈을 부탁드립니다. 그 정도는 하실 수 있겠지요? 그리고 유리한 씨, 아프시면…….”
“제 손이라도 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능청스레 답하는 목소리에 고요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당신 손 말고, 제 팔을 무세요. 팔이 아니더라도 좋아요. 그냥 저를 물도록 하세요, 유리한 씨.”
고요한은 그렇게 말하고는 유리한의 어깻죽지에 꽂혀있던 검을 단숨에 빼내었다.
“……!”
유리한은 상처 입지 않은 어깨를 움직여 고요한의 옷깃을 끌어 잡았다. 일순,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기 때문이다.
고통에는 꽤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요한은 곧장 유리한에게 힐을 시전했다.
유리한은 어깻죽지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에 막힌 숨을 토해내었다. 곧이어 디에스에 의해 난 모든 상처가 치료되었다. 유리한은 어깨를 한 번 돌려보고는 방긋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요한. 괜찮으시면 디에스도 좀 봐주실래요? 힘 조절을 잘 못한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그딴 걱정 하지 마세요. 왜 당신을 다치게 만든 자식을 걱정하는 거예요? 왜 당신을 아프게 만든 자식을 걱정하는 거냐고요.
고요한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억지로 집어삼키고는 느릿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 유리한 씨.”
디에스, 라고 불린 남자는 유리한에게 있어서 꽤 소중한 존재인 것 같았다.
그러니 죽이지 않고 제압했겠지. 상처 하나 입히지 않고. 고요한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디에스 라고를 살폈다.
그렇게 그를 향해 힐을 시전하려고 했을 때였다. 탁, 손목이 강하게 붙잡혔다.
“너는 뭐지? 만물의 인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