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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45)화 (45/235)

45화 

“아니야, 디에스. 네가 사과할 게 뭐 있어.”

오히려 그레이시 아서의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마웠다.

멀린 아서는 왜 그에 대한 것을 자신들한테 숨겼을까? 다른 제자는 모두 보여줬으면서. 그레이시는 우리에 대해 모르고 있었나? 그건 아닐 텐데…….

유리한의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를 끌어당기는 손에 복잡하게 일어나던 사고(思考)가 뚝 끊겼다.

“디에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디에스의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대게 된 유리한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그 위를 디에스 라고의 커다란 손이 덮었다.

“나 너 때문에 잠 다 깼거든? 만물의 수장님에 대해 생각할 게 있으니까 손 좀 치워줄래?”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군.”

“야.”

디에스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두 눈이 그의 커다란 손으로 덮여있는 유리한은 보지 못할 웃음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자장가를 불러주마, 유리. 그레이시 아서는 한숨 푹 잔 다음에 생각하도록 해.”

유리한이 실소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나온 웃음이었다.

하지만 디에스 라고는 자신의 말을 지킬 요량인지, 듣기 좋은 허밍을 내기 시작했다.

아주 본격적으로 재울 요량이군.

피식, 웃음을 흘린 유리한은 디에스의 바람대로 두 눈을 꼭 닫아주기로 했다.

* * *

디에스 라고는 유리한의 두 눈을 덮고 있던 제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림자 진 아래로 새근새근, 곤히 잠들어 있는 유리한의 얼굴이 보였다.

많이 피곤하기는 했나 보지.

디에스 라고가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는 빠르게 사라졌다. 디에스 라고는 여전히 생각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유리한이 현실이 아닌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손가락 끝에 닿는 숨은 그녀가 꿈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유리…….”

디에스는 그녀의 이름을 입 안에서 한 번 굴려보고는 살짝 미소를 일그러뜨렸다.

유리한은 알까? 제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는 여린 몸을 부러뜨릴 듯이 안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아마, 영원토록 드러내지 못할 저의 추악한 연정이라.

디에스는 유리한의 잠든 얼굴을 두 눈에 새길 듯,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회랑에 내려앉은 고요가 깨진 건 그 순간이었다.

게일 요한스의 모든 치료를 끝마치고 온 고요한이 자리에 멈춰 섰다. 유리한이 디에스의 무릎을 베개 삼아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 탓이다.

하지만 고요한은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겨 디에스 라고의 옆에 자리를 붙이고 앉았다.

그런 그가 신기하다는 듯이 디에스가 말했다.

“바로 깨울 줄 알았더니.”

“곤히 잠드신 분을 깨우는 취미는 없어요. 물론, 잠들어 계시는 분이 디에스 씨라면 말이 달라졌겠지만요.”

제 신경 긁는 건, 세상에서 제일인 녀석일 거다.

디에스 라고가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가 표정을 풀었다. 괜히 고요한과 입씨름을 하여 유리한을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다시 회랑에 침묵이 찾아오려는 찰나.

“제게 검을 가르쳐 주세요.”

고요한이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들린 말에 디에스 라고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기초 훈련은 되어있어서 가르치는 게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리스체가스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몸이라고 하나, 어쨌거나 그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좋든, 싫든.

리스체가스 가문의 사람으로 배워야 할 기본 교양은 모두 배웠단 말씀.

그중에는 검술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요한의 말에 디에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 알아보지 그래? 나는 네 스승이 되고 싶지 않다만.”

누구는 좋은 줄 아나.

고요한은 속으로 디에스의 욕을 신랄하게 하고는 방긋 웃었다.

“디에스 씨를 제외하고 검을 잘 쓰시는 ‘다른 사람’을 한 명 알고 있기는 하죠.”

고요한의 시선이 디에스의 무릎 위에 곤히 잠들어 있는 유리한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디에스 라고가 짐승이 또 다른 짐승을 위협하듯이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이봐.”

“요한이랍니다, 디에스 씨.”

고요한이 선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미소를 그렸다.

“사실, ‘너’라거나 ‘이봐’라거나 그렇게 부르셔도 저는 딱히 상관없지만요.”

“그런데, 왜.”

난데없이 토를 다는지, 그 물음은 디에스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리한 씨가 싫어하는 것 같아서요.”

고요한이 그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답을 말해줬기 때문이다. 고요한의 입에서 거론된 유리한의 이름에 디에스 라고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그것이 무섭지도 않은지, 고요한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리고 저는 유리한 씨의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거든요.”

“유리는 네 치유 능력을 꽤 높게 사고 있던데.”

“그뿐이잖아요.”

시종일관 웃음을 짓고 있던 고요한의 표정에 금이 갔다. 고요한은 두 손을 꽉 주먹 쥐고선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유리한 씨가 상처를 입고 난 다음에야 저는 그분에게 도움이 되잖아요.”

지금까지 줄곧 그랬다.

고요한이 유리한의 잠든 얼굴을 두 눈에 담으며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함께 상처를 입고, 그 상처를 제가 직접 치료해 드리고 싶어요.”

명확한 주어가 나오지 않는 말이었으나 디에스 라고는 고요한이 가리키는 대상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말했다.

“단단히 돌았군.”

“디에스 씨만 할까요?”

지금도 봐라, 제 시선이 유리한에게 닿기 무섭게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리지 않나.

고요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디에스 라고를 놀리듯이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부터 잘 부탁드릴게요. 스승님.”

정중하면서도 예의 바른 목소리였으나 디에스에게 있어서는 한없이 가식적으로만 들렸다.

때문에 디에스 라고는 고요한이 짓고 있는 미소를 그를 향해 그대로 돌려주며 말했다.

“그래, 오늘부터 잘해보자고.”

아주 혹독하게 굴려주마. 알아서 유리의 곁에서 나가떨어질 만큼.

안타깝게도 고요한의 두 눈에는 디에스 라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비단, 고요한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디에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눈에 뻔히 보였으리라.

하지만 고요한은 잠든 유리한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디에스 라고의 손을 치워내며 미소를 그릴 뿐이었다.

* * *

“실패했답니다.”

57층, 만물이 자리 잡고 있는 마탑의 최상층.

그레이시 아서는 심복이 전해준 소식에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실패했다?”

“네, 디에스 라고의 옆에 유리한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리한?”

“네, 수장님.”

그레이시 아서가 침음을 삼켰다.

9층의 리스체가스에서 그 모습이 마지막으로 확인된 후,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유리한이었다.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했더니…….

“34층에 있었단 말인가.”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소망의 탑은 규격 외의 힘을 가진 플레이어들에게 ‘특별 시험’이라고 하여 따로 시험을 내리기도 했으니.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탑을 껑충 오른 경우는 없었다.

“그래… 구시대의 영웅이라고 해도 영웅이라는 거겠지…….”

그레이시 아서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심복은 그레이시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었다.

“또한 유리한이 수장님께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뜸 들이지 말도록.”

그레이시 아서의 심복이 크흠,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자신이 만물과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엉덩이 무거운 분께서 직접 찾아오라고 했답니다.”

“뭐라?”

심복은 입을 다물었다. 숨이 턱 막혀올 정도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그레이시 아서의 심복이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 눈을 데굴 굴릴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장님, 태양교의 제2위 주교께서 연락하셨습니다.”

중력감이 느껴지던 대기가 가벼워졌다.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심복은 눈치 빠르게 그레이시 아서를 향해 고개를 꾸벅인 뒤 물러갔다.

곧이어 그레이시의 손에 수정구 하나가 쥐어졌다. 그는 태양교 제2위의 주교의 연락을 알린 마법사에게 나가보라 손짓한 후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에델라이어 주교.”

- 에이, 새삼스레 인사는?

한없이 가벼운 목소리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 대주교는 어떻게 됐어요? 죽은 거 맞아요? 디에스 라고란 놈은요? 걔도 죽었나요?

우다다, 질문이 쏟아졌다.

그레이시 아서는 눈가를 한 번 문지르고는 답해줬다.

“대주교의 죽음은 확인된 바 없소. 에델라이어 주교께서는 들은 것이 없는지?”

- 아직 없어요. 태양교 측에서 연락이 하나 오기는 했는데, 별 중요한 내용은 아닐 것 같아서 아직 안 열어봤어요. 그보다 제 질문에 먼저 답해주세요! 디에스 라고는요? 걔는 어떻게 됐나요?

만물의 마법사들이 들었다면, 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개인 주제에 버릇없다면서 혀를 찼을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시 아서는 익숙한 양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처리하는 데 실패했다더군.”

- 아하하하하!!

유쾌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만물의 수장께서는 미간을 한 번 좁혀다가 짜증이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에델라이어 주교께서는 언제 43층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신지. 지금 31층에 있다지? 그곳에 뭐가 있기에 그러고 있나.”

- 딱히 뭐가 있는 건 아니고요. 제 출신이 오키나와거든요. 수장님께서는 어디인지 모르죠?

31층이 마침 고향과 비슷한 풍경이라며 에델라이어 주교가 말을 덧붙였다.

- 향수병 일어날 것 같아서 잠깐 방문했는데, 아니 글쎄 몰라보게 발전했지 뭐예요?

그레이시 아서는 기가 찬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단순히 놀러간 거란 말이군.”

-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휴양 온 거라고요, 휴양! 어쨌든, 걱정 마세요. 곧 43층으로 올라갈 생각이니까요.

“그래서 할 말은 끝났나?”

- 아니요!

밝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 임무에 실패한 녀석들 말이에요. 저한테 주시면 안 될까요?

“그 녀석들은 왜…….”

- 실험체 부족하거든요!

그레이시 아서가 주름진 이마를 짚었다.

“이봐, 에델라이어 주교. 아니, 하루나.”

본명은 사토 하루나.

일본 태생의 플레이어로, 그레이시의 진정한 심복이었다. 만물의 수장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수정구 너머의 어린 마법사에게 물었다.

“빈민가의 하층민들은 어쩌고 그 녀석들을 달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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