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하프 드워프와 하프 엘프는 유리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곳에 갇히면 하루 정도는 아무도 안 오거든! 형도 작은아버지도 거들떠보지 않아!!”
“크리브…….”
“그러니까 엘리, 제발. 응? 우리 마을에도 인간 녀석들이 왔단 말이야! 마을의 방비를 더더욱 단단하게 해야 한다고!”
아무래도 엘브리스크의 조카님께서는 드워프의 핏줄에서 물려받은 손재주를 엉뚱한 곳에 사용 중이었던 모양이다.
엘리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크리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가자.”
크리브가 활짝 웃으며 엘리의 손을 잡았다. 엘리는 크리브가 제가 서있는 나뭇가지 위로 올라올 수 있게 하였다.
그다음이야 뻔했다.
두 사람은 능숙하게 나무를 타며 마을 밖으로 벗어나 버렸다. 이내 사라진 두 사람의 모습에 유리한이 피식 웃었다.
“어이쿠야.”
곤란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유리한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곳에 갇히면 하루 정도는 아무도 안 오거든! 형도 아버지도 거들떠보지 않아!!’
혼란과 격변의 시대, 몇 번이나 사선을 뛰어넘은 제 감이 말하고 있었다.
크리브의 말은 플래그였다고.
“크리브, 이 녀석아! 멋대로 인간들을 보러 갔다지?!”
그의 작은아버지인 엘브리스크와,
“아버지, 너무 혼내지 마세요! 크리브도 반성 중이니까요!!”
그의 형인 브리스가 사촌 동생인 크리브를 거들떠보러 다락방에 찾아올 플래그.
마호가니 마을 전체가 소란스러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유리한은 크리브를 애타게 찾아대는 드워프들을 잠깐 구경하다가 하프들이 사라진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엘리와 크리브, 두 하프를 따라잡는 건 쉬웠다.
엘리가 크리브의 걸음에 맞춰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라면, 크리브와 엘리의 뒤에 붙은 사람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는 것.
“하프들인 거 같지?”
“그래, 조용히 따라가 보자고.”
유리한은 한 무리의 플레이어들을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아주 잠시뿐.
유리한의 입가에 짙은 웃음이 걸렸다. 영웅은 극적인 순간에 나타나는 게 좋지, 안 그래?
* * *
드워프와 엘프만이 존재하는 35층의 세계. 그곳에서 플레이어 사이에서 난 하프들은 갈 곳 없는 부랑자들이었다.
크리브와 같이 부모 중 한쪽이 종족의 지도자거나 높은 위치에 있다면 그나마 대우가 나았다.
하지만 하프의 대부분은 종족 사이에서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그렇게 배척받던 그들이 모여든 곳이 바로 이곳.
“크리브다! 크리브!!”
“크리브, 무슨 일이야? 네가 세워준 목책은 아직 멀쩡한데!”
하프들의 마을이었다.
‘호오.’
유리한은 마을을 빙 두르고 있는 울타리에 입술을 오므렸다. 평범한 목책으로 보이나, 곧게 세워진 나무 사이에서 희미하게 마력이 느껴졌다.
‘저걸 저 녀석이 세웠단 말이지?’
엘리크브스의 조카님께서 생각보다 솜씨가 뛰어난 듯했다. 하지만 침입자를 막아내기에는 부족한 재주인 것 같았다.
그야, 유리한은 엘리와 크리브의 뒤를 따라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으니 말이다.
“크리브~! 무슨 일로 왔냐니까? 드디어 우리랑 같이 살기로 마음을 먹은 거야?”
“그런 거 아니야!”
크리브가 불퉁하게 입술을 씰룩였다. 그를 달래듯이 엘리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크리브의 마을에 인간들이 새로 들어왔대. 그것 때문에 걱정이 되는 모양이야.”
“뭐? 에이, 크리브도 참! 너는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맞아, 크리브. 인간들은 단 한 번도 이곳을 찾은 적 없잖아.”
그럴 만도 했다.
드워프와 엘프가 한창 정령석을 놓고 전쟁을 벌일 때, 하프들은 그 화를 피하기 위해 숲의 깊은 곳에 터전을 마련했었다.
그 때문에 일시 휴전이 맺어진 지금도 하프들의 마을에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라 엘프나 드워프. 자신들을 밀어냈던 종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리한 역시 크리브의 뒤를 쫓지 않았더라면 하프들의 마을을 찾을 수 없었을 거다. 물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유리한은 끝내 하프들의 마을을 찾아냈겠지만.
어쨌든 유리한은 하프들이 서로 만나 회포를 푸는 사이,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보자, 정령석이 어디 있을까?’
크리브의 말에 따르면 정령석은 분명 이곳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다행히도 유리한은 마을의 중앙 광장에서 각색의 빛을 내고 있는 보물을 발견했다.
드워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정력석이었다.
물과 불, 바람과 땅. 네 개의 힘을 품은 보물이 그에 맞는 영롱한 빛을 내뿜으며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호오…….”
심봤다.
유리한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정령석을 발견한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하하하! 찾았다, 찾았어!!”
은신 스킬을 사용해 엘리와 크리브의 뒤를 쫓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한은 여전히 어둠을 지배하는 자(S)를 이용해 저를 감추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도 난데없는 플레이어들의 등장에 하프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 인간들이야! 플레이어들이라고……!”
“엘리! 크리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인간 녀석들이 쫓아오는 줄 몰랐어?!!”
하프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플레이어들은 이를 드러내며 웃어댔다.
“장로의 말대로 하프 새끼들 뒤를 쫓기를 잘했어! 봐봐, 저기!”
“하, 이 깜찍한 새끼들. 우리가 정령석 찾는다고 한 달 동안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
다섯의 무리를 이루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하프들 중 무장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당황한 탓도 있었고, 설마 인간이 이곳에 당도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엘프와 드워프 간의 전쟁 때에도 그 화를 피해갔던 마을이었다.
그들은 안이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그런 하프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들은 하프들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정령석을 갈취하고자 했다.
“귀찮게 따라붙지 못하도록 다리 먼저 분지르자고!”
“으아아악!!”
마을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크리브는 제가 세운 목책이 아무런 힘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에 당황하는 중이었다.
“크리브! 피해!!”
크리브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마호가니 마을의 위대한 지도자, 엘브리스크의 조카란 위치는 지금 이 순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크리브!”
크리브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제 머리를 감쌌다. 만약 죽는다면 고통 없이 죽기를!
빠악―!
뒤통수를 후려치는 경쾌한 타격음이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크리브의 머리를 가격하려던 플레이어가 두 눈을 뒤집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크리브는 슬며시 두 눈을 떴다.
“크리브! 괜찮아?!”
엘리가 다급히 다가와 크리브를 살폈다. 크리브는 엘리의 걱정에 아무런 답도 해줄 수 없었다.
아니, 못 했다.
“다들 너무하시네? 다 큰 어른들이 애들을 괴롭히면 안 되지!”
탁, 바닥을 짚는 기다란 봉(棒)이 보였다.
“너……! 너는……!”
크리브가 유리한을 알아보고는 그녀를 향해 삿대질을 시전했다. 유리한은 저를 가리키는 깜찍한 손가락에 웃음을 지었다.
하프들의 마을을 침입했던 플레이어들 역시 유리한을 알아보고는 경악했다.
“유… 유리한……!”
“젠장! 언제 여기까지 올라온 거야! 완전 괴물이잖아!”
“우, 우리끼리 덤벼도 승산이 있을까?”
“없어도 밀어붙여!!”
네 명의 플레이어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유리한에게 달려들었다. 저를 덮치려는 듯이 구는 그들의 모습에 유리한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후웅―!
쥐고 있던 기다란 막대기를 크게 한 번 휘둘렀다.
“컥……!”
“크흑!”
허공을 크게 한 번 휘저은 것이 하나같이 플레이어들의 목젖을 가격했다.
유리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봉을 고쳐 잡고는 켁켁거리고 있는 플레이어들의 목을 옆으로 세게 내리쳐 버렸다.
“……!”
따악! 한 명은 조준이 잘못되어 머리를 맞아버렸지만, 어쨌거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기절했으니 괜찮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황이 정리됐다. 모두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기만 할 때, 유리한은 쥐고 있던 막대기를 놓고는 몸을 돌렸다.
“어머, 이게 누구야! 마호가니 마을의 위대하신 지도자인 엘브리스크 님의 조카님이시잖아?!”
“……!”
크리브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크게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한은 그를 놀리듯이 입을 열었다.
“크리브 님, 브리스 님과 엘브리스크 님께서도 크리브 님이 하프들의 마을 들락날락거리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나요? 아아, 아니지.”
유리한이 웃음을 지었다.
“크리브 님께서 정령석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것을, 두 분께서는 알고 계시나요? 모르고 계시는 것 같던데?”
크리브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마을의 모두가 크리브와 똑같이 창백하게 질린 낯이었다.
“어휴, 다들 뭘 그렇게 무서워해요? 저 보다시피 강강약약(強強弱弱)인 사람이거든요.”
강자에게는 강하게, 약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게. 유리한이 우스갯소리로 겁에 질린 하프들을 달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누구, 제 제안을 좀 들어보실 분? 걱정 마세요, 제물을 바치라거나 그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유리한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 * *
유리한이 하프들에게 그녀 나름대로 재미난 제안을 건네는 사이, 디에스 라고는 고요한의 검술 훈련을 봐주고 있는 참이었다.
고요한이 예뻐서 그에게 검을 가르쳐 주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말했다. 유리한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그리고 디에스 라고는 그런 고요한이 기특하기는 개뿔, 잘됐다고 여겼다.
힐(Heal)이란 귀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가 전력에도 도움이 된다면…….
‘유리의 부담이 덜어질 거야.’
디에스 라고는 오직 유리한을 위해 고요한에게 검을 가르쳐 주기로 한 거다.
이렇게 유리한이 자리를 비우고 있는 틈을 타서.
붕, 부웅―!
위에서 아래로 허공을 베어내는 소리가 듣기 좋다.
디에스 라고는 고요한이 검을 휘두르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마을 밖의 숲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유리한 씨 나가신 지 아직 5시간 하고도 43분밖에 안 지났어요.”
“…그걸 세고 있었나?”
고요한이 무슨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이 선하게 웃었다. 디에스 라고는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고요한에게 내린 훈련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허공 가르기를 오백 번 시키면 유리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겠거니 했더만.’
오백 번이 아니라 천 번을 시킬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