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 *
하지만 유리한이 드워프들에게 엿을 선사해 주기도 전에 손님이 찾아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미친 인간! 아니, 플레이어님!”
크리브였다.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크리브는 두어 번 헛기침을 터트린 후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크흠, 흠. 작은아버지가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고 오라고 해서 찾아왔어! 안으로 들여보내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유리한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이내 눈웃음을 지었다.
“굳이 찾아올 필요 없었는데! 뭐, 어쨌든 편하게 들어오세요. 그런데 크리브 님.”
“왜, 뭐요.”
“반말과 존댓말 중 하나만 써주시면 안 될까요? 말투 지금 너무 웃기신데.”
“이익……!”
분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기껏 예의를 차려줬건만! 저 망할 인간이!
괘씸하다는 생각도 잠시, 크리브가 뚱한 얼굴로 입술을 씰룩였다.
“비켜, 들어갈 거야.”
반말과 존댓말 중 전자를 선택한 크리브는 유리한에게 닿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리며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유리한이 그의 뒤를 따르며 재잘거렸다.
“그건 엘브리스크 님께서 준비해 주신 다과인가 보죠?”
크리브가 거실 한쪽에 놓인 테이블 위에 가지고 온 다과를 놓으며 말했다.
“응, 차는 더럽게 쓰고 과자는 더럽게 맛없으니까 안 마시고 안 먹는 게 좋을 거야.”
“흐음.”
“그렇게 보지 말지? 나 진심으로 하는 소리거든?”
“네네, 그렇겠죠.”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러고는.
“야!! 마시지 말라니까?!!”
“에헤이, 왜 그러세요? 맛만 좋은데.”
유리한이 입맛을 다시고는 크리브에게 물었다.
“크리브 님은 안 마실 거예요? 그럼 그거 제가 마셔도 될까요?”
“안 돼! 절대로 안 돼!!”
크리브가 빼액 소리를 지르고는 제 몫의 찻잔을 냅다 던져버렸다.
쨍그랑―!
조각난 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니, 던질 것까지야…….”
“너 때문이잖아!”
“그게 왜 저 때문이에요? 뭐, 차에 독이라도 탔어요? 왜 그렇게 과민 반응이시지?”
“……!”
크리브가 놀라 비명을 지르려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독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것이 유리한의 차에 풀어져 있기 때문이다.
“장난이에요, 크리브 님.”
장난이라니!
간담이 절로 서늘해지는 농담에 크리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이상하네요. 하암, 왜 이렇게 잠이 오지? 크리브 님, 감사 인사는 들은 걸로 칠 테니까 이만 가주실래요? 조금 쉬고 싶네요.”
“그… 그게…….”
크리브가 두 눈을 데굴 굴렸다. 그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유리한의 눈꺼풀은 닫히고 있었다.
“야! 자지 마!!”
크리브가 놀라 그녀를 깨우려고 했지만, 그런 그를 막아 세우는 사람이 있었다.
“크리브.”
그의 사촌 형인 브리스였다.
유리한의 앞에서 활기차게 입을 나불거리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호가니 마을의 위대한 지도자, 엘브리스크를 쏘옥 빼닮은 얼굴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인간 녀석과 많이 친해졌구나? 하긴, 코볼트 무리로부터 구해줬다고 했으니까 당연하겠지.”
그렇게 말하는 브리스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섞여있었다. 크리브는 아무 말 없이 어깨만 추욱 늘어뜨렸다.
그 모습이 또한 너무 한심해 보여 브리스는 짧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작게 손뼉을 외치고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향해 외쳤다.
“자, 여러분! 깨어나기 전에 이 인간 녀석을 어서 옮깁시다!!”
그러기 무섭게 곳곳에서 드워프들이 망토를 벗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브리스 도련님도 참! 자이언트 베어도 단번에 잠들게 하는 약을 썼는데 천천히 움직이자고요!”
“맞소! 우리보다 배는 큰 인간 녀석을 옮기는 게 쉬운 줄 아오?”
“그러니까 말이야. 드워프들이 나를 어떻게 옮긴다는 건지, 참.”
뚝, 목소리가 끊겼다.
찾아온 정적을 가장 먼저 깨뜨린 사람은 크리브였다.
“어떻… 어떻게……?”
크리브의 두 눈이 정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건 다른 드워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곧 그들한테서 경악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암만 해독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잠깐은 잠들 텐데!”
“그러게, 브리스 도련님! 내가 두 배로 약을 쓰자고 했잖소?!”
곳곳에서 터지는 비명과도 같은 말에 브리스가 외쳤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죽었을 거예요! 죽일 수는 없잖아요! 소중한 전투 노예로 부려먹어야 하는데!”
뚜욱, 다시 한번 정적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유리한이 그 고요를 깨뜨렸다.
“오, 그런 깜찍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였으나 왜인지 모르게 위협적으로 들렸다. 유리한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키득거렸다.
“그나저나 세 명이서 저를 들 수 있겠어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유리한의 손에 긴 막대기 하나가 들렸다. 하프들의 마을에서 플레이어들을 제압하는 데 사용한, 바로 그 봉이었다.
후웅―!
가볍게 허공에 휘둘러진 그것에 드워프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끼라도 챙겨올걸!’
그들은 어떠한 무기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유리한을 재우는 데 실패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시려고?”
그걸 그대로 둘 유리한이 아니었다. 코앞에서 유리한과 시선이 마주친 브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흐아악!”
유리한은 그대로 쥐고 있던 봉을 휘둘렀다. 빠악! 턱 아래를 가격당한 브리스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와 동시에 유리한이 쥐고 있던 막대기가 깔끔하게 반으로 부러지고 말았다.
“아, 수명이 다 됐나 보네.”
다르게 말하면 내구성이 다 닳았다는 거였다.
“어쩔 수 없지.”
유리한이 반으로 부러진 봉을 바닥에 버리고선 두 손을 주먹 쥐었다. 자고로 요리는 손맛. 유리한은 기쁜 마음으로 드워프들을 손수 요리해 주기로 했다.
“컥……!”
“크헉!”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다. 유리한은 나머지 두 명의 드워프를 깔끔하게 기절시키고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딸꾹.”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리한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는 곳에 입가를 가리고 있는 크리브가 보였다.
가까스로 딸꾹질을 멈춘 크리브가 떨리는 눈으로 유리한에게 물었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뭐기는요? 플레이어죠.”
“거짓말! 플레이어 중에서 너처럼 강한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오늘 봤네요.”
유리한이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
“참고로 차는 안 마셨어요. 해독 능력이라니. 그런 거 좀 있으면 좋겠네.”
“그, 그런 걸 나한테 알려줘도 돼? 약점 같은 거 아니야?”
“약점이죠. 그런데 크리브 님께서 그걸 가지고 저를…….”
크리브를 위아래로 훑어본 유리한의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떠올렸다.
“어떻게 하실 수 있겠어요?”
명백한 비웃음.
크리브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두고 봐! 언젠가 기필코 독살할 테니!”
“네네, 그 전에 저는 이 층을 벗어나 있겠죠.”
“이익……!”
태연한 얼굴로 저를 놀리는 여자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크리브가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래 봤자 유리한의 눈에는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2차 성징이 빠르게 일어나, 코 밑에 주홍색 수염이 옅게 난 어린아이.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
유리한은 빠르게 생각을 지우고선 인벤토리에서 망토 하나를 꺼내 크리브에게 넘겨주었다.
“크리브 님, 이걸로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이건 투명 망토잖아.”
유리한에게 망토를 받아 든 크리브가 그녀를 노려봤다. 이걸 네가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는 눈빛이었다.
유리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크리브 님께서 떨어뜨리고 가신 걸 맡겨놓고 있었어요. 저 착하죠? 그러니까 좀 도와주세요.”
크리브는 뒤늦게 자신이 이곳에 망토를 벗어두고 갔다는 걸 기억해 냈다. 하지만 또한 알았다.
‘거짓말쟁이.’
유리한은 절대로 이 망토를 잠시 맡아놓을 생각이 아니었을 거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분명 자신이 가질 생각이었지.
그리고 크리브의 가정은 정답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리한을 향한 경계 어린 눈빛을 거두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댁네 종족분들께 끌려간 제 동료들 좀 구해주시겠어요?”
크리브가 몸을 크게 떨었다.
유리한의 동료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는 것을, 그는 제 아버지인 엘브리스크에게 직접 듣고 온 참이었다.
하지만 그걸 유리한도 알고 있었다니. 크리브가 살짝 겁에 질린 얼굴로 유리한을 쳐다봤다.
유리한은 그 시선에 방긋 웃음을 지었다.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제 부탁, 들어주실 수 있죠?”
“…구해주기만 하면 돼?”
“아니요? 하프들의 마을까지 데리고 와주셔야죠.”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크리브가 소리를 질렀다.
“야! 들키면 어떻게 하라고!”
유리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크리브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턱 아래로 떨어질 정도였다.
‘저 망할 인간이 자기가 하는 일 아니라고!’
더욱이 투명 망토는 개당 한 사람만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그런 크리브에게 유리한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망토들을 주워 그에게 넘겼다.
그녀가 제압한 드워프들이 입고 왔던 것이었다.
“자, 이제 안 들키겠죠? 사실 들켜도 상관없어요. 제 목적 아시잖아요?”
“그, 그렇지만…….”
얼떨결에 유리한에게서 망토를 받아 든 크리브가 불안하다는 듯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어휴, 걱정 붙들어 매셔요, 크리브 님! 그렇게 겁이 많으셔서 이 위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시려고!”
크리브는 욱, 치밀어 오르는 목소리를 애써 집어삼키고는 유리한에게 물었다.
“너는 어쩌려고?”
“무기고를 털까 해요.”
“아하.”
아니, 잠깐.
“뭐라고?!”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마세요. 필요한 것만 가지고 나올 테니까요! 그러니까 크리브 님.”
유리한이 선하게 웃음을 지었다.
“무기고 위치 좀 알려주실래요?”
꽈악, 제 손을 끌어 잡는 여자의 악력에 크리브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설레어서는 당연히 아니었고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망할 인간 같으니라고!’
이대로 있다가는 손이 으스러지고 말 거다. 크리브는 고통과 맞바꿔 유리한에게 무기고의 위치를 알려주기로 했다.
어차피 크리브는 제 동족을 향한 애정 따위 버린 지 오래였다. 정확히는, 하프들의 마을에서 유리한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럼, 부탁할게요!”
유리한의 온몸이 옅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