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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55)화 (55/235)

55화 

고요한은 제 두 눈에 비치는 광경을 의심했다. 유리한의 온몸이 피로 낭자해 있다니.

그 순간 떠오른 건 리스체가스에서의 기억이었다.

‘나이스 타이밍.’

천장이 무너지며 나타났던 그녀 역시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있던 채였다.

저를 위협했던 리스체가스의 기사들의 것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유리, 너……!”

디에스 라고의 목소리가 고요한의 정신을 일깨웠다. 고요한은 그대로 유리한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힘겹게 다리를 움직이던 고요한이 이내 유리한의 앞에 멈춰 섰다.

유리한은 멋쩍게 뺨을 긁적이며 웃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웃음에 고요한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곧 그녀의 손을 끌어 잡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요한?”

유리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하지만 이내 손끝에서 퍼져오는 따뜻한 기운에 그녀는 놀라 말했다.

“요한, 저 괜찮…….”

그러나 유리한은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하얗게 질려있는 남자의 얼굴이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녀는 말했다.

“미안해요, 요한. 다음에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유리한이 건넨 사과에 고요한이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아니, 에요. 아니에요, 유리한 씨.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오히려 사과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하프들의 마을에서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 유리한은 사선을 넘나들고 있었을 거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바보같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 좋아라 떠들어 댔지.

고요한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도 쥐고 있는 유리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유리한은 고요한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 게 분명한 얼굴이었다. 요한이 잘못한 일이라고는 없다고, 그리 말해주고 싶었지만…….

유리한은 씁쓸하게 웃고는 다른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곧 엘프들이 군을 이끌고 쳐들어올 거예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에요?”

“거짓말! 엘프들이 어떻게 알고!”

“맞아! 엘프들이 우리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고 쳐들어온다는 거야?!”

곳곳에서 다양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유리한은 그에 일일이 반응해 주기보다는 곧장 말했다.

“일전에 제가 제압했던 플레이어들한테 추적 마법이 걸려있었던 모양이에요. 엘프들이 그 흔적을 따라 플레이어들과 함께 마을로 향하고 있더군요.”

“그럼…….”

“네, 이건 그들과 싸우며 묻혀온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요, 요한.

유리한은 맞잡고 있는 남자의 손에 힘을 주며 소리 없이 그 말을 전했다.

고요한이 그녀가 소리 없이 전한 말을 알아들었는지 모르나, 그의 두 눈에 순간 이채가 서렸다. 유리한은 보지 못한, 오직 디에스 라고만이 본 것이었다.

디에스는 일순 고요한한테서 유리한의 손을 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참았다.

지금, 유리한의 시선은 고요한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으니.

“저기, 네가 우리 마을로 돌아왔다는 건 그 녀석들 모두 물리쳤다는 거지?”

“엘프들과 플레이어들이요?”

“응.”

유리한이 고개를 저었다.

“무리에서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엘프를 놓아줬어요. 부장로라고 했던 것 같은데.”

“뭐?! 왜 하필 그 녀석을 놓아준 거야!”

하프 엘프 중 하나가 버럭 소리 질렀다. 유리한은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일 처리를 쉽게 만들기 위해서죠.”

유리한은 그렇게 말하며 네 개의 정령석을 가리켰다.

“저것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부숴야 하잖아요?”

물과 불, 바람과 대지의 힘을 각기 머금은 네 개의 정령석이 영롱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하프들은 유리한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것을 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엘프들과 드워프들이 보는 앞에서 정령석을 파괴하자는, 그 의견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정말 괜찮을까?’

‘저 인간의 말대로 정령석을 파괴하는 것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는데.’

다수의 하프들은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유리한은 제 의견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듯, 엘프들이 하프들의 마을을 노리는 걸 이용해 일을 빨리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크리브, 엘프들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드워프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올 수 있나요?”

“…불가능할 거 같은데.”

“그럼, 도중에 만나는 건요?”

“응?”

“지금이야 휴전 중이라지만, 드워프와 엘프는 오랫동안 서로 싸워왔잖아요.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무서운 인간.

크리브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유리한의 말대로 드워프들은 엘프들의 이것저것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크리브는 말했다.

“그건 가능할 거야.”

“좋아요, 엘프들과 만날 길목을 알려주세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잠깐만요.”

엘리가 손을 들었다.

“크리브가 드워프들을 데리고 오는 건 좋아요. 하지만 어떻게요?”

“네?”

뭘 어떻게라는 거지?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행히도 그녀가 따로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엘리가 입을 열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드워프들은 호전적이지만 무턱대고 몸을 움직일 만큼 멍청하지 않아요. 더욱이 크리브의 말만 믿고서 움직일 종족이 아니죠.”

“인정하기 싫지만 엘리의 말이 맞아. 오히려 돌아가면 다들 난리일걸? 지금쯤이면 너희 모두가 사라진 걸 알아차렸을 테니.”

분명 자신을 붙잡고 닦달할 거라면서 크리브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이 보였다.

“아아.”

유리한이 엘리와 크리브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해했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괜찮아요, 방법이 있거든요.”

“방법? 무슨 방법.”

“크리브 님께서는 엘브리스크 님께 엘프들이 정령석의 위치를 알아버렸다고 하면 돼요. 엄청, 다급하게.”

“엄청, 다급하게……?”

“네.”

크리브의 두 눈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야, 인간. 아니, 유리한! 야! 그거 내려놔!!”

유리한의 손에 들려있는 단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크리브의 다급한 외침에 유리한은 선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크리브 님. 그렇게 안 아플 거예요.”

“흐아아악! 미친 인간아아!!”

크리브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거 놔! 야! 망할 인간들아!! 이거 놓으라고!!”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눈치 좋게 그의 양팔을 붙잡아 버렸다.

이 미친 인간들!

크리브가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는 구세주를 찾기 시작했다.

“엘리! 엘리!!”

“…미안, 크리브.”

하지만 그를 도와줄 자,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 * *

“엘브리스크 님! 브리스 님께서 인간들의 숙소에 쓰러져 계신 걸 발견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던 인간들이 탈옥한 것 같습니다, 엘브리스크 님!”

엘브리스크는 이를 갈았다. 속속 들어오는 정보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크리브, 이 빌어먹을 녀석!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배신하다니!”

하나뿐인 조카, 크리브.

플레이어와 탑의 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의 운명으로, 태어날 때부터 제 아버지의 기운을 야금야금 해치운 녀석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뿐인 조카라 나름대로 귀하게 키웠다.

‘그랬는데……!’

감옥에 갇혀있던 인간들을 탈옥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제 아들까지 해쳤다. 까드득, 엘브리스크가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렇게 이를 갈 때였다.

“에, 엘브리스크 님!”

허겁지겁, 드워프 하나가 달려와 말을 더듬었다.

“크리, 브, 크리브가 마을 입구에 나타났습니다……!”

엘브리스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마을 입구로 달려나갔다.

“크리브!”

“자, 작은아버지…….”

성난 외침도 잠시, 엘브리스크는 엉망진창이 된 조카의 몰골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리브! 이게 무슨 일이냐!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지?! 당장 말해라, 어서!”

닦달하기 무섭게 크리브가 눈물을 떨구었다.

“크흡, 흡, 귀쟁이 녀석들이.”

“뭐?”

“귀쟁이 녀석들이… 정령석이 있는 곳을 알아차렸습니다, 작은아버지……!”

엘브리스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크리브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훌쩍였다.

“모든 정령석이 한곳에 모여있었습니다. 저는… 브리스 형님을 해치고 도망친 인간 녀석의 뒤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인간들의 도망을 도운 건 분명 엘프들의 짓일 터. 겁 없는 조카 녀석은 그들의 뒤를 쫓다가 험한 일을 당하고 만 거다.

엘브리스크가 분함에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크리브가 넝마가 된 천 조각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정령석 조각들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넷.

물과 불, 바람과 대지의 빛을 머금은 보석들에 엘브리스크의 두 눈이 빠질 듯이 크게 떠졌다.

크리브는 고개를 푹 숙이며 울먹거렸다.

“겨우 조각들을 챙겼지만, 아마 지금쯤 모두 엘프들의 마을에 있을, 큽, 흐읍, 죄송해요, 작은아버지.”

“아니다, 크리브.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겠느냐.”

엘브리스크가 크리브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동시에 조카의 손에 쥐어져 있던 정령석 조각들을 챙기며 그는 외쳤다.

“다들 무기를 들어라! 휴전은 끝이다!!”

하나뿐인 조카를 해친 것도 모자라, 정령석을 가지려고 들다니.

‘그렇게 둘 수야 없지.’

엘브리스크가 언제 챙겨왔는지 모를 도끼를 하늘 높이 번쩍 들어 올렸다.

“귀쟁이 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우오오오!!”

마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드워프들의 목소리에 크리브는 질린 얼굴을 보였다.

크리브의 상처는 모두 거짓이었다. 곳곳에 묻은 피는 유리한의 몸에 묻어있던 것들이었고, 넝마가 된 옷은 유리한의 솜씨였다.

‘진짜 무서운 인간이라니까.’

크리브는 옷을 여미며 진격할 태세를 갖추는 드워프들을 바라보았다.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는 유리한의 말은 사실이었던 모양인지, 그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입 안이 썼다.

한 마을에서 살고 있었는데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니.

“크리브.”

턱, 어깨에 두꺼운 손이 올려졌다. 엘브리스크가 전에 없던 다정한 눈길로 크리브에게 말했다.

“너는 브리스와 함께 마을에 있어라.”

유리한은 크리브에게 말했었다. 드워프들은 분명 상처 입은 줄 아는 너를 마을에 남겨둘 거라고.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마을에 남아있도록 하세요, 크리브 님.’

혹시 모를 위험 때문이었다.

드워프들과 엘프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만나 전투라도 벌어지면 큰일이었으니 말이다.

크리브는 제 어깨에 얹어진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작은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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