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43층의 허름한 판자촌.
구색만 갖추고 있는 집들 사이에 태양교의 작은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은 에델라이어 주교.
그녀는 지금 수정구를 가볍게 건드리며 누군가를 부르고 있는 중이었다.
“여보세요, 그레이시 님?”
연락의 대상자는 그레이시 아서.
오광 중 한 곳인 만물의 수장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레이시 아서로부터 답이 들려왔다.
- 무슨 일이오, 에델라이어 주교.
에델라이어 주교가 웃음을 터트리며 외쳤다.
“유리한이 43층에 왔어요! 디에스 라고, 그 녀석이랑 같이요!! 그리고 세상에, 웬 드래곤이랑도 함께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수장님은 알고 계셨어요?!”
끄응, 앓는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름이 불리었다.
- 하루나.
자신의 진짜 이름이.
만물의 마법사, 그레이시 아서의 충성스러운 심복인 사토 하루나가 밝게 웃었다.
“네, 수장님!”
- 디에스 라고가 유리한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거야 진작 파악하고 있었다네. 물론, 그녀가 드래곤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고 있는 것도 일찍이 파악하고 있었지. 자네 쪽으로 간 실패자 녀석들한테서 들은 게 없나 보군.
“그게, 그 녀석들을 바로 실험에 투입시켰었거든요! 하지만 걔들한테서 들은 것 같기도 해요. 어쨌든, 수장님!”
사토 하루나가 낡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그래도 알려주시지 그랬어요!”
- 무엇을? 디에스 라고가 유리한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인가?
“아니요! 유리한이 43층에 온 거요! 수장님이라면 이것도 진작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요?”
-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자네가 괜한 신경을 쓸 것 같아 이야기하지 않았다만.
“무슨 신경이요?”
- 실험 말이네.
사토 하루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레이시 아서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예상이 가지 않아서다.
하지만 사토 하루나는 똑똑했고, 그녀는 곧 만물의 수장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레이시 님도 참~? 제가 실험 말고 유리한에게 신경 쓸까 봐 걱정하셨구나?”
- 그럴 것 아닌가?
“그렇죠!”
사토 하루나가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어댔다.
“하지만 그레이시 님,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 무엇이?
“유리한이 자신의 동생의 피가 이곳에서 이용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지요.”
-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도 모르나? 괜한 소리 하지 말게, 전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으니.
“저는 재미있을 것 같아요!”
꿈결에 잠긴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되면 저는 분명 유리한과 싸우게 되겠죠? 구시대의 영웅님과요! 상상만으로도 두근두근해요!”
벌어진 싸움 끝의 승리자가 만약 자신이 된다면 유리한의 몸은 제 것이 될 테다.
지금, 에델라이어 주교의 몸을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사토 하루나의 얼굴이 황홀해졌다. 그러나 수정구에서는 그녀의 말이 우습다는 듯이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 그래, 하루나. 그럼, 어디 한번 잘해보게.
걱정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말을 끝으로 그레이시 아서와의 연락이 뚝 끊겼다.
사토 하루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어련히 알아서 잘할 거예요, 그레이시 님.”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사토 하루나가 즐거워하며 소리 없이 웃고 있을 때였다.
“저… 에델라이어 주교님?”
그녀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애초에 자신이 불렀으니 그럴 수박에 없었다. 사토 하루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전 밖의 손님을 반겼다.
“에시아 양, 어서 오세요! 저랑 약속한 대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오신 거죠?”
“네? 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제 어머니한테도요!”
정말 몰래 찾아온 모양이었는지, 손님은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좋아요, 잘했어요. 지금부터 에시아 양에게 약속대로 태양교의 사제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찾아온 손님은 빈민가의 하층민.
사토 하루나가 에델라이어 주교의 얼굴로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 * *
해가 진 어둑한 밤.
43층의 하늘은 여기저기 깔린 먹구름으로 어떠한 빛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리한은 그 아래에 서있었다.
어둠만이 내린 테라스, 그 한가운데에.
“니르로르.”
유리한이 나지막하게 새끼 용의 이름을 불렀다.
“빈민가에서 내 기운을 느꼈다고 했지.”
- 그렇다, 인간.
니르로르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처음부터 그녀와 함께 있었다는 듯이.
유리한이 니르로르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정확히 어디에서 느꼈는지, 추적할 수 있겠어?”
- 어려울 것 같은데.
유리한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불가능한 건 아닌가 봐?”
니르로르가 미간을 좁혔다.
대답을 잘못한 것 같다. 처음부터 그럴 수 없다고 말할걸.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니르로르가 어떻게 하면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열심히 궁리할 때였다.
“솜사탕 하루에 세 개씩, 일주일 동안 매일 사줄게.”
- 짐에게 불가능한 것 따윈 없다, 인간. 당장 짐을 쫓아오도록.
니르로르의 얼굴이 결연해졌다. 유리한은 새끼 드래곤의 태도 변화에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니르로르와 함께 43층까지 탑을 오르며 그를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배운 것이 많은 유리한이었다.
그녀의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옅은 그림자에 니르로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다른 두 인간은 버리고 갈 거냐, 인간?
“버리고 가는 게 아니라 두고 가는 거야.”
- 어차피 같은 말이 아닌가?
유리한은 새끼 드래곤에게 설명을 덧붙여 주려고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말을 말지.”
해봤자 자신의 입만 아플 것 같았다. 저를 무시하는 듯한 유리한의 태도에 니르로르가 불퉁한 얼굴을 보였다.
저 얼굴로 보아 빈민가에 도착하는 즉시 망할 파충류가 툴툴거릴 것 같았다.
짐에 대한 공경이 부족하다거나, 예의가 부족하다거나 뭐 이렇게.
때문에 유리한은 친절하게 목소리를 내어주기로 했다.
“이건 내 일이잖아. 디에스와 요한에게 괜한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 피해라…….
니르로르가 불 꺼진 숙소를 흘긋거렸다.
- 다른 두 인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뭐?”
- 그냥 혼잣말이었다, 인간. 어서 출발하도록 하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옅게 피어오른 그림자가 유리한과 니르로르를 삼켰다. 곧이어 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인기척은 하나.
옅게 쳐진 커튼 뒤로 아른거리고 있는 한 명의 인영뿐이었다.
* * *
“후우…….”
불 꺼진 집 안에서 디에스 라고가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한과 니르로르가 떠나고 남았던 하나의 인기척은 디에스 라고였다.
그의 두 눈은 유리한이 사라진 곳을 향하고 있었다.
‘역시 나가버렸군.’
설마, 그 망할 용과 함께 나가버릴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디에스 라고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유리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던 디에스다.
빈민가에서 니르로르를 찾아 돌아왔을 때부터 그녀는 줄곧 나사 하나가 빠진 사람처럼 굴었었으니까.
‘유리는 나름대로 티를 안 내려고 했던 것 같지만.’
그녀가 보이는 동요를 알아차리지 못할 자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고요한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대로 가만히 있으실 생각인가 보네요, 디에스 씨.”
디에스 라고가 고개를 돌렸다.
고요한은 당장에라도 바깥으로 나갈 차림새였다. 그 모습에 디에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얌전히 있지 그래.”
부탁이 아닌 명령.
고요한은 방긋 웃었다.
“제 한 몸은 충분히 지킬 수 있답니다? 디에스 씨가 그간 열심히 가르쳐 주신 덕분에요.”
디에스 라고는 틈틈이 고요한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고요한은 디에스와 겨루어도 어느 정도 버틸 만큼의 실력을 가지게 됐다.
고요한이 능청스레 말하자, 디에스가 짜증스레 말했다.
“나는 너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너를 걱정할 유리를 걱정하는 거다. 고요한.”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고요한은 웃는 낯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여 주기만 했다.
디에스가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가려는 모양새였다. 그런 그의 앞을 디에스 라고가 막아섰다.
고요한의 웃음이 일그러졌다.
“비켜주시죠?”
“싫다만.”
디에스 라고의 입에서 날 선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유리를 방해하지 마, 고요한.”
“방해하는 게 아니라 도움을 주려는 거예요.”
고요한이 디에스 라고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저는 디에스 씨와 달라서 얌전히만 있는 게 그분을 도와주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거든요.”
디에스가 짜증 섞인 웃음을 터트리고는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움직여도 유리에게 도움은 되지 않을 건데.”
“그건 모르는 일이죠.”
고요한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걸렸다.
“저는 에델라이어 주교님을 찾아갈 생각이에요.”
에델라이어 주교? 그녀라면 빈민가에서 만났던 태양교의 인간이 아닌가?
‘그보다 그 인간을 만나러 가겠다는 걸 나한테 말해주는 이유가 뭐지?’
디에스 라고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빛에서 읽어지는 의심에 고요한이 말했다.
“나중에 찾으실까 해서요.”
“내가, 너를?”
디에스 라고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고요한은 디에스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주며 에델라이어를 찾아가려는 이유를 밝혔다.
“유리한 씨가 에델라이어 주교님을 신경 쓰시더라고요.”
“언제는 좋은 분이라고 유리에게 소개시켜 주더니?”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고요한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유리한 씨가 의심하시니 저도 의심을 해야겠죠?”
자신의 세계에서 유리한은 태양이었다. 결코 꺼지지 않을 밝은 빛. 그렇기에 그녀가 의심한다면 저 역시 의심해야 했다.
“그럼, 이만 나가볼게요.”
고요한이 디에스 라고를 완전히 밀어내고는 바깥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이번에 디에스 라고는 고요한을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멀어지는 고요한을 보며 두 손을 주먹 쥐었다.
‘저는 디에스 씨와 달라서 얌전히만 있는 게 그분을 도와주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거든요.’
자신 역시 마음 같아서는 유리한을 위해 움직이고 싶었다.
그녀가 보이는 동요를 자신이 직접 잠재워 주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했다.
‘하지만…….’
디에스 라고가 입술을 깨물었다.
불현 듯, 유리한과의 처음 기억이 떠올랐다.
‘네가 디에스 라고? 미국의 영웅이라는 루키님 맞아?’
세계가 모두 부서져 내려도, 홀로 고고하게 서있을 것 같았던 여자와의 첫 만남이.